봄소풍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상큼한 이 노랫말을 들으면 지금도 나는 풀 향기 그윽한 푸르른 아이가 된다. 환경미화 기간이 지나면 어느 새 산천은 온통 짙게 푸르렀다. 흡사 천천히 아주 느리게 아다지오의 선율로 시작되어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의 흐름으로 펴져 경쾌한 알레그레토 교향곡으로 변한 왕연한 산천초목의 느낌이다.
시와 때를 구분하는 질서와 정렬 그리고도 분수껏 품위를 스스로 낮추는 봄의 꽃 마음을 읽는다. 그 시절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빛나는 청춘의 계절을 음미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순진한 꿈은 마냥 부풀었다. 5월은 어버이날에 스승의 날 그리고 우리의 날이 있어 늘 분주하였으며 더욱이 5월 초는 반드시 봄 소풍을 갔기 때문이다.
우리의 봄 소풍은 늘 안양유원지였다. 못을 기찻길에 놓아 칼을 만들던 기찻길을 넘어 태평방직의 벚꽃 길을 따라 긴 행렬을 이루며 화사한 유원지를 향하였다. 긴 행렬에는 뽑기 장사도 솜사탕 장사도 열을 만들었다. 잠은 설쳤지만 니꾸사꾸(룩색) 안에 든 캬라멜, 생과자, 서울사이다, 양갱, 삶은 달걀을 일어나자마자 다시 확인했다. 엄마는 선생님 드릴 찬합에 비싼 마호병을 따로 챙겨두셨다.
소풍이라고도 하고 원적을 간다고도 하던 그 시절. 선생님은 소풍도 실습시간의 연장이라고 말하였지만 선생님도 그리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보물찾기를 하고 장기자랑을 하고서는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돌아갈 시간쯤엔 아이들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 모여라 소리를 수없이 하던 때 아이들은 그쯤 유원지의 놀이 풍경에 빠져 정신들이 없었다. 해마다 진기한 볼거리가 늘어나던 그 유원지.
처녀도사 철학관, 꽁보리밥, 순대 집, 닭발 집, 뻥튀기, 파전 집, 번데기, 소라, 솜사탕, 리어카에 실린 곰 인형, 고무풍선, 엿장수, 다리 잘린 몸으로 노래하는 카수, 하모니카 부는 장님, 조준 안 된 간이사격장, 3꼴 꼴인 하면 선물 주는 농구 대, 뺑뺑이판, 전기구이 통닭, 망이 쳐진 야구장, 무조건 십 원 하는 옷핀, 떡판, 튀김 집, 노상을 뒤뚱대며 걷는 오리 장난감, 싸구려 총.......
소풍을 다녀오면 동생들을 주기 위해 맛있는 음식은 고스란히 남겨왔다. 돈도 아껴 그 다음날부터 학교 뒤편 가게들은 아이들로 불이 났다. 아이들 관심은 단연 달고나 뽑기였다. 소다 때문 뒷맛이 개운치 않은 달고나. 연탄불위에 검게 그을린 국자에다가 흰 설탕을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타지 않게 젓다보면 설탕물이 되고 소다를 한 량 툭 집어넣으면 금세 똥색의 달고나가 된다. 이를 철판으로 쿡 눌러 모양을 만들었다.
소풍이 새뜻한 출구이었던 그 어린 때를 지나서 6학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때 간 곳이 온양온천으로 그 해 처음으로 고속도로가 천안까지 개통이 되어 다들 들뜬 마음이었는데 아쉽게도 가정형편 때문에 반에 열 명 넘는 아이들이 같이 가지를 못하였다. 졸업여행도 졸업앨범도 못 챙긴 그로 못이 박힌 아이들은 훗날 두고두고 그 아픔을 말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못 입고 못 먹었기 때문 더욱 더 챙겨주려 한 그 시절이다.
뭐든 흔한 요즘은 간단한 복장에 돈만 들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달랑 김밥 한 줄이라 해도 이에 마음을 따로 두지는 않는다. 아쉬움과 서글픔은 간절한 소망이 되고 애틋함도 된다. 그로 더욱 소중하였던 그 시절의 소풍이기도 하다. 푸르른 오월은 지금도 여전히 청춘의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