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국과 터키의 문화적 유사성
‘괵 투르크’란 명칭에서도 분명하듯이 돌궐은 하늘을 섬기는 신성한 종족으로 늑대를 숭상하는 건국설화를 갖고 있다. 그들은 하늘은 “텡그리(Tenggri)"라 불렀으며, 우리의 하늘이다. 지도자인 카간(kagan) 혹은 하칸(Hakan)은 하늘로부터 신성한 통치카리스마인 kut을 받았으며, 악정을 일삼거나 외적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지 못할 경우 천신이 kut을 거두어 간다고 믿었다. 이 kut이 한국 샤머니즘의 ”굿“이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부적, 조상숭배, 성인존경사상, 삼신사상, 자연에 대한 경외감,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가르침, 악한 기운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다양한 금기와 의례, 민간신앙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민족은 다른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족의 중요성과 공동체주의를 실천해 왔으며, 선배와 연장자, 스승과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남다른 예의의 표현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사회입니다.
▲ 늑대가 낳은 10명의 아들 중 하나가 돌궐의 조상인 아사나씨라는 신화를 가진 돌궐의 국기 늑대(이리)기. ©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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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동질성은 언어에서도 잘 남아있습니다.
초기 투르크족들의 민족 이동은 언어생활에도 영향을 끼쳐, 기원전 1500년경을 전후해서 우랄어 및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 요소가 투르크어에 상당수 유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근원적으로 놀랄만한 언어적 근친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 견해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단어의 유사성에 그치지 않고, 문장구성, 음운구조, 언어적 사고구조, 발성 등에서 많은 친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대학에서 공부하는 많은 외국인 유학생이나 한국내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유독 터키학생들이 월등하게 빨리 한국어를 습득하고 그들의 발성법이나 발음도 다른 외국인에 비해 거의 한국인에 가깝다는 결과도 이를 잘 증명해 줍니다.
일찍이 20세기초 핀란드 언어학자 람스테드(Ramstedt)는 한국어와 터키어어 사이에 2000단어 이상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연구결과를 밝혔고, 두 언어의 친근감을 보여주는 비교언어 사전까지 편찬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현대 언어 사용은 많이 달라지고, 러시아 등 다양한 외래어가 침투해서 서로 소통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어떤 다른 민족들보다 쉽게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은 언어적 친근감의 가장 분명한 증거일 것입니다.
문화적 양식면에서도 7세기 전후 고구려의 관모 중에서 돌궐의 영향이 보이고 있음은 양국 교섭을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물론 이러한 교류의 결과 고구려의 웅장한 예술기법과 모티브들이 서역 특히 돌궐 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권영필 교수는 이를 ‘북방기류’라 칭했다. 예컨대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408년), 무용총 벽화(5세기)와 돈황 429굴 벽화의 수렵도, 고구려 삼실총 벽화(5세기 후반), 돈황 285굴 벽화의 지그재즈식 건룰 표현 등은 고구려풍의 영향을 잘 알 수 있는 있는 흔적들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도 이러한 고구려풍의 상호영향과 교류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100기가 넘는 고구려 고분(4~7세기) 벽화 속의 서역적 요소들은 분명히 고구려와 고대 투르크 국가들과의 문화적 교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4. 한반도에 살았던 위구르 투르크인
돌궐을 이어받은 위구르 투르크족들은 중앙아시아를 통일하여 위구르 제국(8-9세기)을 건설했습니다. 그들은 이후 몽골 지배시대에는 가장 활발한 실크로드 문화전파자로서 최고의 두뇌집단으로 동서교류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활동함으로써 중세 한국과 투르크문화권과의 문화교량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위구르인들을 Hui-hu(회흘), Hui-ho(회골), 나아가 회회인(回回人) 등으로 불렀으며, 그들이 믿는 이슬람교를 중국과 한국에서는 회교(回敎), 회회교(回回敎)로 불렀습니다. 위구르인의 종교란 뜻입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무수히 등장하는 회회인들이 이슬람화 된 위구르인을 지칭하고 있으며, 고려말 몽골의 제국공주를 모셔왔던 회회인 삼가(三哥)는 현재 덕수 장씨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류하고 접촉을 계속해 온 중앙아시아 투르크 종족집단들은 몽골의 고려지배 시기에 대규모로 이주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에 집단 공동체를 이루고 살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기록에 의하면 13세기말에서 15세기초까지 이슬람화 된 중앙아시아 투르크족들은 그들의 공동체내에서 고유한 종교의식을 치르고, 투르크어를 말하고 고유한 복식과 풍습을 유지하며 모스크까지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들 투르크 이슬람 집단들이 결국 15세기 조선의 세종대왕의 과학 르네상스에 기여한 지적 두뇌집단 역할을 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세종시기에 완성된 천문학적 역법인 “칠정산외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역법은 조선 왕조에서 발명한 가장 뛰어난 역법으로 오늘날 한국인들이 전통의례에서 사용하는 음력의 단단한 기초가 되었는데, 그 모태가 바로 이슬람 역법의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고려 가요 중의 하나인 『쌍화점』에도 ‘회회(回回) 아비’라는 말이 등장한다. 투르크 계통의 문화와 문화유산들이 13-15세기 사이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세종 때 완성된 천문학역법인 칠정산외편에 대한 설명 ©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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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제 시대, 한반도의 투르크 민족
20세기 초에도 한국과 투르크족들의 만남은 이어졌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수의 투르크계 민족의 일부가 극동으로 이주하여 당시 일본군의 보호를 받아 한반도로 이주했다. 그들은 무역에 종사하거나 양복점이나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정착했습니다. 대부분 카잔 투르크계인 그들은 단단한 공동체 결성(Mahall-i Islamiye)과 국제무역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한국에 최초로 양복문화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민족교육을 위해 학교(Mekteb-i Islamiye)나 모스크 시설이 있는 문화회관도 있었고 서울 근교에 공동묘지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비호를 받아왔던 이들은 해방 후 우리 민족의 따가운 눈초리와 국제 정세에 불안을 느끼고 모두 터키, 호주, 캐나다 등지로 떠났다.
6. 한국 전쟁과 터키
한국전쟁에 터키가 동참함으로써 우리 민족과 투르크 민족간의 군사적 협력은 거의 1000년만에 재개되었다. 즉, 수나라를 경계해 고구려와 돌궐이, 그 후 당나라를 대상으로 발해와 돌궐이 군사협정을 맺은 지 천년만에 한반도에서 다시 군사적 지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공교롭게 중국을 상대로...
터키는 당초 한국전쟁에 5,000명을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지원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형제의 나라’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15,000명이나 자원했다. 터키는 한국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을 파견해 미국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공식 수치는 721명 전사, 168명 실종, 2,111명 부상(이 중 100여명이 부상 후유증으로 1년 이내에 사망)이다. 역사적으로 용맹한 전사들이었던 투르크 민족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서도 그 용맹성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무기로 미군보다 훨씬 용맹스럽게 싸웠다. 특히 ‘군우리’와 ‘금오리’ 전투는 전쟁사(戰爭史)에서 보기 드문 전투로 이 전투에서 터키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휴전선의 위치는 훨씬 남쪽으로 그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군사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 부산 유엔군묘지에 잠들어있는 터어키 장병들 ©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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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국과 터키의 최근 관계와 미래협력
어느 민족보다도 우리와 피가 가까운 터키 민족. 민족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서로 협력했던 두 민족.
한국과 터키는 1999년 터키 대지진 참사 때 한국국민의 형제애적인 대규모 모금 운동과 2002년 월드컵 3-4위전의 감동을 넘어 이제 FTA 체결이후 진정한 협력적 파트너로 미래를 구상하고 있다.
양국간의 진정한 협력과 발전은 진정한 상호이해와 실질적인 문화적 교류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두 국가, 두 민족 사이의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상호 원활한 고대 역사적 교류를 21세기 다시 활성화하고 연결하는 것만큼 더 매력적인 작업도 없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선 두 나라 사이의 모든 분야의 문화 동질성관계를 지금까지처럼 조각조각 부분적으로 연구할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공동 연구랩을 구성하고 지속적이고 통합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2002 월드컵 3.4위전이 끝나고 어깨동무를 한 한국과 터어키 팀 ©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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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연재를 마칩니다
출처:http://m.greatcorea.kr/a.html?uid=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