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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욥38:26-27)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에 처한 우리들에게 고난을 이기는 방법을 알게하시며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며 은혜를 입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늘 봐왔습니다. 마음이 울적하고 힘들 때에, 광야 한복판에 버려진 듯, 혼자 나동그라진 것과 같은 절망감을 느낄 때에도 우리는 이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위로를 얻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 없는 땅과 사람 없는 광야도 보라고 말씀합니다. 광야에 외로이 자라고 있는 이름 없는 들풀들도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풀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 (26-27절)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도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문제에만 빠져 아둔해져버린 욥과 세친구들에게 폭풍가운데서 엄히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십니다. 이는 한쪽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속삭이시는 말씀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서 천둥과 번개를 뚫고 우레소리와도 같은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대명천지에 당당하게 선포하시는 위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하나님이 드디어 입을 여셨습니다. 가만히 있다고 안 듣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과 세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고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분이 드디어 입을 여셨습니다. '너희가 도대체 무엇을 아느냐' '너희가 도대체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고 그러느냐'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에 대해 감히 논하는 너희들이 정말 무얼 얼마나 안단 말이냐. 뭐 하나라도 제대로 알긴 하느냐. 언성을 높이시는 하나님, 허리띠를 단단히 매고 귀 기울여 들으라고 고함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욥과 세 친구들처럼 나 역시 내 머리 속에서만 뱅뱅 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내 주관, 내 감정, 그리고 내 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나의 한계 안에 갇혀계신 하나님은 아니십니까? 스스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때론 삶의 문제에 얽매여,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불신자들처럼,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고아나 사생아처럼 절망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때 눈을 부릅뜨시고 호통 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네가 내게 대해 뭘 아느냐, 뭘안다고 너는 나의 능력을 자꾸 제한하느냐'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 없는 땅에, 또 내가 생각지도 못하던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시고, 축축한 토지에서 연한 풀을 나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오늘도 그 같은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도 없고, 풀도 나지 않을 것 같은 그 황무하고 공허한 곳에, 축축한 단비를 내려 생기를 주시고,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시는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상상과 능력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 앞에서 오늘도 욥처럼, 그리고 그의 세 친구들처럼 함부로 말하지 말고 입을 가리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동토와 같은 이 땅에도 우수, 경칩을 지나 새봄이 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관계’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나와 나의 내면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뒤틀릴 때에 모든 것이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잘못이 있을 때에 관계 회복을 위하여 ‘사과’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말 한마디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이 사과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존심’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존심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사실 인간은 자존심 하나 때문에 사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나의 존재감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무너지면 자신의 존재가 다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자존심이 상처를 받아 인격의 모독으로 느껴지셨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죽음과도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너무 상해 몸을 던진 대통령도 보았습니다. 자존심이 그렇게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소중한 자존심도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너와 내가 하나 되기 위해서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나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피 속에는 <아담>으로부터 흐르는 죄의 근성이 있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사단과의 관계를 더 좋아합니다. 죄는 우리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죄는 우리의 영과 육을 병들게 하는 암보다 더 무서운 존재입니다. 선교사 <짐 엘리옷>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사탄이 세 가지 요소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음과 성급함과 군중이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사단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성급함도 좋아합니다. 사단은 진리보다 여론을 더욱 좋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군중들을 동원합니다. 성급함이나 군중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망하는 것을 사단이 좋아합니다. <조지 스웬돌>은 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그 본심을 숨기고 겉으로는 환영한다. 죄는 <유다>처럼 미소 지으며 입맞춤하지만 결국에는 배반한다. 죄는 겉으로는 정중하지만 <요압>처럼 결국 <아브넬>을 죽이고 만다.’ 라고 했습니다. <요압>이 <아브넬>과 악수하는 척하면서 그를 죽였습니다.
사단의 조정을 받은 <유다>가 주님께 찾아와 미소를 지으면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입맞춤은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사람들 앞에 사랑의 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은 삼십을 받고 스승 예수를 팔아먹기로 일을 끝낸 뒤였습니다. 이런 것이 사단의 이중성입니다. 이렇게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절대로 회복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의 종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고 말합니다.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은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주님의 보혈로 우리 안에 깊이 흐르는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에게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관계회복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이 없는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말씀대로 광야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살 수 없습니까?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70%가 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물을 많이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유지 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생명을 유지 하고 있는 모든 것은 물이 있어야 합니다. 생물도 물이 있어야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도 물이 있어야 자랍니다. 물 안 먹고 자라는 동물을 보았습니까? 물 없이는 사람이나 식물이나 동물도 자랄 수 없습니다. 물은 인간이나 돌물이나 식물이 생존을 해 나가는데 절대 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이런 생존에 절대 적으로 필요한 물이 적다는 것입니다. 적은 것을 넘어서 아예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야 할 길도 없습니다.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그 광야는 앞이 보이지 않아 깜깜한 곳입니다. 광야는 춥고, 배고프며, 고독과 온갖 독사와 전갈 등 여러 맹수들의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광야에는 ‘생존’이 아니면 ‘자멸’뿐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평생 먹을 수밖에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광야는 장소적인 광야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광야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계신 분 중에도 광야를 거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먹을 물이 없는 것처럼 먹고 살기가 힘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춥습니다. 배고픕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 나를 삼키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광야를 헤매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힘든 인생을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힘이 들어서 막다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자식을 보아도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희망이 없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탄식과 눈물과 한숨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상황이 오늘 우리 인생의 메마른 광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이라는 광야에 있을 때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기가 기회란 말입니다. 우리의 고달픈 광야는 이론이 아닌 실제 고난과의 싸움의 현장입니다. 고난과의 싸움의 현장에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존법칙을 아십니까.
우리가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때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인간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본능입니다. 교회 나오시는 분들 중에 광야를 경험할 때, 교회에 나오셔서 하나님을 만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고난은 우리로 하나님을 찾게 하는 도구입니다. 목마를 때에 물을 찾는 것처럼 고난이 있을 때에 기도합니다. 고난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성경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뢰’라고 하는 말은 ‘나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나를 비우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광야에서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안과 밖 모든 것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현장인 광야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어느 글을 보았습니다. ‘큰 재앙은 사람을 최선으로 만들든지 최악으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큰 재앙을 만날 때에 최선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은 어떤 형편이든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고난이든지 축복이든지 모든 마음과 삶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라가듯이 주 바라기가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고난이 있다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복을 받았어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합니다. 복과 불행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기업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인생철학을 8가지로 말합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면 첫째가 냉혹해라(be ruthless)고 합니다. 자신에게 냉혹하지 못한 사람은 고난에서 정금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절대 좋은 결과를 만들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냉혹해야 합니다. 먼저 시간의 활용에 냉혹해야 합니다. 잠잘 것 다 자고 어떻게 일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하루 24시간 중에 14시간을 생산적으로 삽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10시간만 생산적으로 산다면 하루에 4시간을 뒤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14시간의 사람과 견주어서 이겨 나갈 수 있겠습니까? 먹는 것에도 냉혹해야 합니다. 먹는 것은 건강과 직결됩니다. 술이나 담배 같은 것 다 먹고 건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은 자신에게 무서울 정도로 냉혹한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달려갈 길을 올바르게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잡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달리기를 하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대부분 넘어진다. 그때 달리기를 그만두면 결승선을 통과할 수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장애물이 나타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만났던 장애물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수도 있는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장애물을 정면으로 돌파해서 결승선을 밟고 싶었다.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내 자신에게 정말 나는 냉혹했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냉혹해야 합니다. 내 인생을 다른 사람이 살아줄 수 없습니다. 부모도 내 인생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냉철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냉철하면서 기도로 깨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회복이 만들어진 사람에게 광야 같은 그 사람의 인생에 비를 내리십니다.
이런 자라야 목마른 대지위에 단비의 축복이 어떤 것인가를 압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들은 목이 타들어가 한 방울의 물을 먹기위하여 한 나절을 걸어갑니다. 목마르게 사는 인생들에게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만나가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산 것처럼 말입니다. 땅에 관정을 파 물을 얻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에 한방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 미국 서부지역 관광을 같을 때 들었습니다. 오래전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불이 났습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합니다. 한 달 내내 불을 꺼도 꺼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산세가 험악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해도 불이 안 꺼집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20일이 지난 어느 날 하늘에서 비가내립니다. 한시간 만에 그 큰산불이 진화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광야의 아픔을 알고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 비를 내리시는 축복을 주십니다. 이제까지 내리지 않던 광야에 비를 내려주십니다. 비가 하늘에서 내리면서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촉촉이 적시어주십니다. 연한 풀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꽃이 핍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없는 광야에 비를 내려 광야에 있는 미물들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돌볼 가치가 없는 미물까지 챙기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니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면 하늘에서 축복의 단비가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습니다.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당나귀도 늙었습니다. 쓸모없는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였습니다. 농부는 당나귀를 포기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파묻기 위해 삽을 가져와서 흙을 파 우물을 메워갔습니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어서 바닥에 떨어뜨리며 발밑으로 흙이 쌓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흙더미를 타고 높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서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고난의 우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덮으려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환경이라는 흙더미가 나를 덮어 올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자기를 덮으려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순간에 하늘에서 비를 내리십니다.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과감하게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당나귀도 털고 일어나는데 왜 하나님의 사람이 낙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의 자리에서 진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고난의 그 순간에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고난의 그 순간이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은 광야의 고난가운데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고난의 그 순간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광야의 단비를 체험하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모두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새봄을 허락하신 사랑의 하나님,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광야와 같은 험한 인생길에 단비를 내려주셔서 낙심과 좌절과 고난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과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