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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투브에 올라온 영상입니다 영상을 보고 들으면서 적다보니 긴문장이 됩니다
이글을 정리하는데 꼬막 한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이글을 읽으시고 신앙의 길을걷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참고로 이본문안에 인용된 성서귀절은 제가 가톨릭새번역 본문에서 인용하였기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문과 설명이 매끄럽지 못한점은 있을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영상에서 가져왔기 떄문입니다
문장을 읽어보기 쉽도록 약간 다듬었습니다
제목은 그리스도인에게 더 잘 어울리는 직업이 있을까?
이것은 그리스도청년들에게 있어서 직업의 선택에 관한 의미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가정속에서 성당안에서 내가 하고있거나 맡겨진 사명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을것입니다. 내가 그곳에서 하는 것은 모두다가
하느님의 일이기에 소중하지읺는것도 없으며 이를헤쳐가면서 겪는 모든 실수나
자만까지도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귀히 쓰여질것이기 때문이라 여겨봅니다.
하느님은 필요하시다면 우리가 한 모든 것을 귀하게 쓰신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서의 첫 걸음을 내딛는 청년들에서 이제는 제법 사회생활을 했다고
말할수 있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직업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만큼 청년들의 삶에 있어 직업은 늘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고민거리가 되는 것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청년들도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의 평생 직업인가 라는 질문을 종종 던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청년의 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직업에 대한 고민은 참으로 다양하고 끝이 없다고 할수 있어요
2013년 Forbes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5세에서 65세까지 평범한 사람이
96,000시간을 일터에서 보낸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을 기준으로 발표된 내용이니
일반적으로 미국 사람들에 비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 한국 사람의 경우
아마 어렵지 않게 100,000시간을 넘길 것으로 여겨진다.
재미난 사실은 우리 청년부의 주를 이루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 즉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에 태어난
세대의 91%가 한 직장에서 3년 미만으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는 산술적으로 계산했을 떄 그들이 평생 15-20개의 작장을 옮겨 다닌다는 것을 말할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이들은 그들이 자라난 환경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밀레니얼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좋은 직업이 아닌 본인이 정말 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직업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상지 못했던 Baby Boomers
세대인 그들의 부모세대가 만들어 낸 모습 일것입니다.
베이비부머들은 그들의 안정 평안 정체성을 자신들이 택한 직업에서 발견하고 자 했습니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볼 때 많은 경우 그러한 삶에서 만족을 얻지 못했던 것이에요
따라서 우리의 부모세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택한 직업이 우리들에게 참된 만족과 성취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한 교육을 간 접적 또는 직접적으로 받고 자란 세대들인 밀레니얼들은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자신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는 환경을 중시하는 문화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직업에 대한 이해는 일 자체에서의 만족보다 어떤 면에서는 그 일이 주는 목적에
조금 더 큰 의미를 두고자 하는 바램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장 돈을 벌기 위한 선택보다 나에게 더 큰 의미를 주는 일을 통해 얻게 되는 만족이
직업 선택의 이유가 되어 왔던 것입니다.
많은 밀레니얼들은 어떤 직업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할까?
라는 질문보다 어떤 직업이 내자신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 것인가?
를 고민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인식에서는 자연스레 우리라는 개념보다 '나'라는 개념이 뿌리깊게 자리갑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 믿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직업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우선 우리는 신앙이라는 분명한 틀안에서 우리의 직업을 이해하고 이야기해야 해요
여기서 신앙은 곧 하느님과의 관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갖게 되면 하느님이 우리를 향해 특별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꺠닫게 됩니다
직업에 대한 것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삶의 터전 곧 일터가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1서 7장 17절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님께서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하느님께서 각자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내가 모든 교회에 내리는 지시입니다.(1고린토 7,17)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첫번째는 하느님이 각 사람에게 모두 다른 것을 나눠 주셨다 라는 것이다.
나눠주셨다는 표현은 떼어 내어 필요한 곳에 무언가를 주다는 의미인데
이 본문에서는 이것을 구원의 은혜로 이야기 할 수 있고 또는 주어진 은사나 환경
으로 생각할 수도 잇습니다 두가지 모두 결론은 같아요 각자에게 주신 것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모양이 다르고 그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어지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이 부르심에는 두가지가 포함됩니다
척번째는 구원으로서의 부르심으로 이야기 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르심 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변화되는 수직적인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에서 우리는 신앙이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업을 이야기함에 있어 이 부르심이 중요한 이유는
직업 또한 이 수직적인 부르심으로 변화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선택하는 기준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구원으로서의 부르심이 그리스도인의 직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삶의 자리 곧 일터로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세상 속으로의 부르심으로 수평적인 부르심입니다.
이 두번째 부르심에도 기쁨과 성취 그리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헌이 있지만
이것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는 부르심은 될 수 없습니다.
이 두가지 부르심을 이해하는 것이 직업에 대한 어떤 질문에 앞에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였던 마틴 루터는 이것을 이중적 부르심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이중적인부르심을 갖는데 하나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게되는 부르심 또다른 하나는 삶의 자리에서
특정한 직업을 갖게되는 부르심이러고 했어요
그리고 두번째 부르심은 신자의 삶이 맞닿는모든 삶의 자리 예를 들어 가정 학교 직장 교회에서
하느님의 일을 대신하여 감당하도록 하신 부르심으로 정의했다.
루터는 그래서 이 두번째 부르심을 하느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렀어요
우리의 직업이 하느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참 적절하고 재미난 묘사인 것 같습니다.
말그대로 우리가 직업을 통해 하느님의 손가락이 되어 대신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첫번째 부르심인 구원으로의 부르심을 깨닫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도 그에 맞게
무언가 거룩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이 그들을 구원하셨을 때
직업에 대한 변화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마음의변화를 원하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1서에서 바오로는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에요
하느님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원하시는 참된 변화는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내적인 환경 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직업이 바뀐다고 그 사람이 더욱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직업을 결정함에 있어
아무런 기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토1서 7장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할례와 무할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할례 받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누가 할례 받지 않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만이 중요합니다. (1고린토 7,18~19)
이방인이었던 그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구원을 받은 후 그들의 겉모습을 바꾸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겉모습이 바뀌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할례를 받은 대로 할례를받지 않은 사람은 할례를 받지 않은
무할례 상채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할례와 무할례의원리가 오늘날 직업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가?
하례와 무할례의 중요성을 강했다는 것은 그들이 복음으로 새로워진 그들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삶의 모습은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지 삶의 외적인 변화가 각 사람의 정체성을
바꾼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였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해하는 직업의 선택과 변화에 있어
내가 첫번째로 고려하는 사항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쟈 보았으면 좋겟습니다.
그마음의 중심이 만약 겉모습의 변화를 통해 더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를 기대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과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직업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모습일지 모릅니다.
다시 한번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직업의선택이 우리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결정된 우리의 정체성이 오늘 우리의 일터를 바꾸는 것입니다.
직업을 생각할 때 무엇이 나에게 참 만족을 주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직업을 선택하고 바꾸려는 첫번째 이유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선택이 더 복음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것인지는 각자에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 각자 다른 것을 주셨어요 다른 은사와 환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좋은 환경을 통해
복음안에서의 자유 또는 더 효과적인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환경에서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모든 직업이 하느님이 부르신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통한 부르심은 새로운 직업이나 환경으로의 부르심이 아닌 이미 각기 다르게 주어진 현재 우리의 직업이나
환경에 새로운 의미를 보여하는 부르심이자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우리는 직업을 선택하거나 변경할 때 우리 안에서의 만족한 마음을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직업은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기억해야한다.
지금의 환경에서도 평생 머물 수 있다는 자족함이 있을 때 직업을 결정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가시덩쿨과 엉겅퀴가 자라나는 땅이라 할지라도
그 땅에서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인정하고 자족할 필요가 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환경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환경을 피하거나 바꾸기위한 결정보다
현재의 상황에 자족할 수 있기에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
그리스도안다운 결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시간을 마무리하면서 반지의제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톨킨의 니글의 이파리라는 단편소설의 이야기를 나눗고 싶어요
많은 분들은 아마 팀 켈러 목사님이 쓰신 일과 영성이라는 책을 통해 접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니글이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화가였습니다
그는 꼭 그리고 싶은 그림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큰 나무 한 그루였습니다
그는 이파리 하나에서 시작해서 나무 한 그루 전체를 그릴꿈을 꾸며 살았어요
그 나무 둣편으로 펼쳐질 멋진 세상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크고 멋진 나무를 그리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커다란 캔버스도 준비했어요 언젠가 죽기 전에는 꼭 그 그림을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어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파리 하나에 너무 공을 들였기 때문이고
또다른 이유는 그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웃을 돕기 위해 수시로 붓을 내려놓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니글은 결국 또다시 이웃을 돕기 위해 붓을 내려놓고 비를흠뻑 맞게 되는 일이 있은 후
독감에 걸려 죽게 됩니다 결국 니글이 이 땅에서 완성한 그림은
정서을 꼳아 완성한 이파리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톨킨의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니글이 죽어서 가게 된 하늘나라에서
그는 그가 그토록 그리고 싶어하던 커다란 나무가 완성된 채로 서 있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영원히 살아 즐길 수 있는 곳에서 그가 그토록 보기 위해서 원했던 나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땅에서 우리가 꿈꾸는 삶이 우리의 직업을 통해 완성되지 못한다고
느낄 떄가 분명히 있을것입니다.
지금의 환경에서는 도저히 하느님이 주신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이에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어린 시절에꿈꾸던 어른의 모습은 우리의 바램과는 다르게
니글이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두고 이파리 하나를 그리는 모습과 같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이파리 하나 그리는 그것도 벅찬 것처럼 느껴질 떄가 있습니다
어떤때는 이파리 하나를그리는 나의 삶이 초라하고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바록 그런순간을 마주한다 할지라도
우리를부르신 첫번째 부르심대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루의 시간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붓으로
이파리 하나를 정성껏 그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하느님과 함꼐 하는 삶을산다면 어떤 직업을 통해서도 우리는하늘나라에
완성된 나무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안에서 헛된 시간도 헛된직업도 없다는 사실을
한번 더 가슴에 새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