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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를 열광시킨 위대한 감동실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영국 왕실이 흔들린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1500년 영국 왕실이 흔들린다!
1997년 8월, 영국 왕실에서 배출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이미 왕실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다이애나 비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하였고, 영국 국민은 순식간에 패닉 상태에 빠진다.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는 추모 행렬을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만 정작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어린 두 왕자를 데리고 발모랄 성으로 잠시 떠나 있는다. 그 사이, 다이애나 비의 죽음과 관련해 조기 게양도 하지 않고 그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없는 여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날로 심해져 가고, 각종 언론들도 이런 여왕의 태도를 연일 비난한다. 심지어 군주제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체제 위기론까지 거론되며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새로 부임하게 된 토니 블레어 총리는 멀어지기만 하는 왕실과 국민들 사이의 화해를 위해 여왕을 설득하기 시작하는데...
【 INTRO – 사건의 개요 】
▪ 1981년 7월 29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런던에서의 동화 같은 결혼식.
▪ 1996년 8월 28일
결혼 생활의 불협화음이 대중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 나오다 결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공식적인 이혼 결정.
▪ 1997년 5월 1일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압도적인 지지로 총리에 당선.
▪ 1997년 8월 31일
파리에서 다이애나와 그녀의 남자 친구인 도디 알 파예드가 함께 탄 승용차가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해 달리다가 충돌 사고가 남. 이 사고로 다이애나와 도디 알 파예드 사망.
▪ 1997년 8월 31일
토니 블레어 총리가 추모사를 통해 다이애나를 ‘민중의 왕세자비’로 지칭.
▪ 1997년 9월 2일
다이애나의 거주지였던 캔싱턴 궁전 앞에 추모의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조화들이 쌓여감. 한편 침묵으로 일관하는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 고조.
▪ 1997년 9월 4일
다이애나의 죽음 5일 후, 왕실의 첫 번째 공식 기자 회견이 열림.
▪ 1997년 9월 5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다이애나 비를 ‘비범하고 재능이 넘치던 인물’로 표현.
▪ 1997년 9월 6일
국장으로 치러진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수백만의 대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옴.
【 About Movie 】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화려한 결혼식,
그리고 더욱 화려한 장례식…
1981년 7월 29일, 런던 세인트 폴 성당에서 진행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결혼식은 74개국 10억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동화 같은 결혼 생활은 찰스 왕세자와의 불화로 끝내 이혼을 맞게 된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 비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녀가 평소 보여줬던 거침없는 사랑과 따뜻한 미소, 그리고 봉사정신을 잊지 않은 전세계 사람들을 큰 슬픔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버킹엄 궁전을 둘러쌀 정도의 어마어마한 꽃다발 세례가 추모 행렬에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600만의 애도 인파가 몰렸으며 영결미사에 참여한 추모객만 무려 2천여 명이 넘는다. 게다가 운구 행렬 경비에 동원된 경찰 병력만 무려 3만 명. 영국 BBC 방송은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을 187개국에 생중계 하였고, 세계의 25억이나 되는 사람들은 결혼식보다 화려했던 다이애나 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보았다.
2007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과 각본상 2관왕 등극에 이어
아카데미 주요 6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
각종 영화제를 휩쓴 세계가 인정한 최고의 화제작!!
영화 <더 퀸>은 영국 왕실과 다이애나 비의 죽음이라는 다소 민감하면서도 흥미로운 소재만큼이나 화려한 영화제 수상경력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먼저, 아카데미상의 전초전이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시상식인 2007년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 각본상의 2개 부문에 수상하였으며, 미국 최대의 영화상인 아카데미에선 아카데미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여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의상상, 음악상, 이렇게 주요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2006년 제63회 베니스 영화제’에선 여우주연상과 각본상을, ‘2006년 보스턴 비평가협회’에선 여우주연상, ‘2006년 뉴욕 비평가협회’에선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또한 ‘2006년 LA 비평가협회’에서 우수영화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을, 그리고 골든글로브나 아카데미에까지 영향이 이어진다는 ‘2006년 전미 비평가협회’에선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각종 영화제의 주요부문을 석권했다.
의심할 여지 없는 영화, <더 퀸>에 쏟아지는
해외 언론과 관객들의 만장일치 찬사!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과 전 세계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헬렌 미렌의 만남만으로도 영화의 완성도를 짐작하게 하는 영화 <더 퀸>은 영국과 미국 개봉 당시, 많은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최고의 영화’라고 찬사를 이끌어 냈다.
인간이기에 슬프지만 여왕이기에 지켜야 한다!
영화로만 만나볼 수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인간적인 모습.
영화 <더 퀸>에서는 전통과 명예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권리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화려한 왕관 뒤에 가려진 인간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이 있다. 여왕이기에, 전통과 명예를 지켜야 하기에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혀야 하는,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교육받은 그녀는 가장 주목을 받으면서도 외로운 존재이다.
갑작스런 다이애나 비의 죽음으로 지금껏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원망과 미움 속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뜻을 따를 것인가, 지금껏 왕가가 지켜온 그리고 그녀가 지켜야 할 전통을 지킬 것인가의 기로에 놓인다. 최고의 결정권자인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근엄함을 유지해야 하는 여왕이기에 자신의 외로움, 슬픔은 내놓을 수 없어 괴로워하는 인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습은 영화 <더 퀸>을 통해 만날 수 있다.
【 Production Note 】
전세계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쉬는
다이애나 왕세자비, <더 퀸>을 통해 다시 본다!
영국 왕세자와의 결혼, 이혼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맞이한 죽음까지 불꽃 같은 인생을 살다간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명예만 내세우기보다 진실된 마음으로 보여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항상 전세계의 주목을 받아왔고 이에 못지않은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러기에 그녀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충격과 함께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다이애나 비의 죽음 이후 영국 왕실이 위기를 맞는 일을 보여주며 흥미를 더하고 있는 영화 <더 퀸>에서는 전세계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는 다이애나 비의 생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적인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
새로운 시각으로 영국 왕실을 보여주다!
<더 퀸>의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이야 말로 영화로 제작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닌 완벽한 소재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금지된 구역에 발을 디딘다. 하지만 영국을 상징하는 존재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내면을 파헤쳐 영상에 담기 위해선 영국인으로서,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고 중도를 지키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이 과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책임감을 요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또한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은 단지 왕실 가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매혹적인 영화 작품을 만드는데 충분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더 퀸>을 ‘세속되는 오랜 권력’인 영국 왕실을 대표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적극적 개방을 요구하는 ‘영국 대중’과의 갈등으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이로써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은 <더 퀸>을 통해 세계의 가장 주목 받는 왕실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준다.
피터 모르간의 최고의 시나리오로
2007년 골든글로브 각본상 수상과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되다!
강력한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의 왕실과, 현존하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의 제작 자체가 모험이었다. 최대한 과장을 배제하고 솔직하고 사실에 입각해서 영화 내용을 그려내야만 했기에 피터 모르간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전형적인 왕실 생활에 대한 조사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으로부터 장례까지의 일련이 과정들을 상세하게 조사를 해야했다. 다행히도 피터 모르간은 토니 블레어 총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던 드라마 ‘The Deal’의 제작을 통해 얻은 정보와 다양한 개인적인 인맥으로부터 왕실과 총리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또한 피터 모르간은 여왕의 어투나 매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그 동안의 기록 영화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동시에 그는 팀을 구성하여 그 동안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토니 블레어 총리에 관한 신문이나 TV등을 다시 한 번 분석하는 작업도 아울러 시행했다. 이렇듯 오랜 시간에 걸친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피터 모르간 작가는 다이애나 왕세자의 죽음 후, 영국 왕실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었다.
영국 여왕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연기자, 헬렌 미렌!
2007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되며 최고의 배우로 인정받다!!
니콜라스 하이트너 감독의 <조지 왕의 광기 (The Madness Of King George)>에서 여왕 샬롯으로 분해 1995년 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헬렌 미렌은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으로부터 “현재 여배우 중 영국 여왕을 대변할 수 있는 연기자는 헬렌 미렌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라는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더 퀸>에 캐스팅된다.
타고난 연기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끊임없는 노력으로 배역을 100%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헬렌 미렌은 <더 퀸>에서 역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라는 배역에 친숙해 지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하였다. 헬렌 미렌은 여왕의 사진과 영상자료들을 모니터하며 여왕의 헤어스타일과 걷는 자세, 손의 움직임에서부터 여왕의 독특한 연설 스타일까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강렬한 카리스마로 관중을 압도하는 흡입력있는 목소리를 배우기 위해 목소리 연구가를 찾아가 수개월에 걸쳐 여왕의 어투를 연습하며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녀는 이 같은 노력으로 여왕으로의 품격과 강인함을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놓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력은 2007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증명되었으며 이어 ‘아카데미의 꽃’이라 불리는 200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영국의 최대 권력자들을 연기하라!
<더 퀸>의 배역들은 모두 생존하고 있는 영국 최고의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에 캐스팅에 있어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역할은 가장 큰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영국의 군주로 군림하면서 우상과 보호의 대상인 여왕을 스크린에서 ‘인간 엘리자베스’로 다룬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이 ‘영국 여왕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여배우’로 지칭된 헬렌 미렌은 영화 <더 퀸>에 출연하는 것은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민감함을 넘어 위험하기까지 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을 수락하였다.
토니 블레어 총리 역에는 이미 드라마 ‘The Deal’에서 완벽하게 총리 역을 소화해 낸바 있는 마이클 쉰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마이클 쉰에게도 <더 퀸>에 출연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용기가 필요하였다. 같은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그 안의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하지만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과 2번의 호흡을 맞추어 본 바 있던 마이클 쉰은 감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으로 영화에 합류하게 되었다.
DAUM영화
이 영화는 사건 당시를 배경으로 하되, 철저히 여왕의 시선을 따라간다. 당시 다이애나의 죽음에 신속하게 성명을 발표하지도 않고 장례식을 앞두고 휴가를 떠나 국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여왕의 시선 말이다. 국민들로부터 숱한 질타를 받은 사람,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국 내 최고 권위에 있는 여왕의 심정을 들여다봄으로써, 변명이나 왕실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게 아니냐 하는 얘기도 나올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런 수준에 그치는 영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변화의 한 가운데에 선 여왕의 시대적이고 인간적인 고민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핵심이다.
어떤 국가원수라 해도 국민 대다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당연한 생각이다. 왕이 있는 영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국민에게는 왕실 역시 그들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곳이다. 이렇게 왕실의 위상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건만, 왕실의 전통은 그런 시대에 발맞춰 함께 흘러가기 곤란한 상황이다. 천년을 이어 온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국가를 상징하는 위치에 있는 이로서 국민의 소리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왕실과 국민들은 끊임없이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97년 다이애나의 사망 이후 그 갈등이 격렬했을 것이다. 다이애나를 둘러싼 왕실과 국민들의 시각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왕실의 가족이면서도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추구했고, 소외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최대한 국민들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다이애나는 이로 인해 국민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이런 그녀의 행적이 미디어에도 자주 노출되면서 왕실, 특히 시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세월이 어느 때인데 왕실의 권위를 아직도 얘기하는가" 생각하며 여왕이 악역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악역을 자처하는 듯했던 여왕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간 이 영화를 보며, 여왕이 그렇게 악역인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왕이 되려 피해자라는 건 아니지만, 일방적인 질책만 받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아무리 시대가 급변하고 미디어가 발달한들, 천년이 넘게 이어져 온 왕실의 전통과 사고방식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고수하려 한다. 감정적이지 않고 침착한 태도. 언론에 쉽게 떠벌리지도 않고, 여론에 쉽게 휩쓸리지 않으며 묵묵히 굳은 의지를 고수하는 무게감을 자랑으로 여겨왔을 것이고, 때문에 그런 전통과 사고방식을 이어오려 노력했다. 왕실의 최고 권위자로서, 여왕도 이런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여론이 뭐라하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며 다이애나의 죽음에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절제와 평정심이 몸에 배인 그녀에게 있어 그건 당연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런 여왕의 판단을 곱게 보지 않았다. 중요한 사람의 죽음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이고 국민의 소리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왕실의 모습이 국민들에겐 마냥 매정하고 인간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국민들은 국민의 소리에 금방 답하는 위정자를 원하기에. 오랜 시간 한 길을 고수하는 사람보다는, 국민의 외침에 귀기울여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을 원했다.국민들은 민주주의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여왕을 비롯한 왕실은 오랜 전통에 머물러 있었다. 한 나라 안에서 과거와 현재, 어제와 오늘이 공존했던 것이다.
영화는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 선 채 갈등하는 여인의 모습으로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겪었을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조명한다. 영화 속에서 여왕은 한번도 표정이나 말투를 변화시키지 않지만, 그녀의 심정이 혼란에 빠져있을 것이란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변화를 거듭하는 시대 속에서도 한 나라의 상징으로, 왕실의 일원으로 살아온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렇게 쌓아온 전통이 하루아침에 국민들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심적으로 크게 좌절한다. 과거의 모습을 여전히 갖고 현재에 살고 싶었지만, 국민들은 그런 과거의 모습을 거부하며 군주제 폐지를 운운하기까지 한다. 그동안 절제와 침착을 미덕으로 여기며 눈물조차도 아껴온 여왕에게 국민은 오히려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며 질책한다. 자신이 그동안 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믿고 있는 국민들로부터 의심을 받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여왕은 결국 자기 행동이 왕실에 먹칠하는 건 아닌가 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마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휴가를 간 여왕이 사냥터에서 매우 드물다는 14갈래 뿔이 난 사슴을 발견하는 부분은, 이처럼 과거의 모습때문에 현재의 위치를 불안해 하는 여왕의 심리가 잘 반영되어 있다. 희귀해서 그 가치가 높은 존재, 하지만 발견했다하면 순식간에 총에 맞아 그 생명이 금방 시들어갈 존재. 홀로 남은 채 외로운 생존의 싸움을 하는 사슴을, 여왕은 어쩌면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모습으로 현재에 서있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영화는 대다수의 언론과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마냥 고지식한 노인네처럼 비춰졌을 여왕이, 실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서서 그 누구보다 외롭고 힘든 심적 싸움을 벌였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여왕이란 존재의 무게감을 역설하기도 한다. 군주제 폐지 여부까지 논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도 여왕은 끝까지 국민들을 믿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게 국민들에게 질타를 받았음에도 그녀의 등장은 여전히 국민들로 하여금 깊은 존경심과 사랑이 다시 싹트게 한다. 현재를 지탱해주는 전통의 무게감으로 여전히 여왕은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변화가 쉼없이 충돌하고 악감정을 낳는 가운데서도, 여왕의 존재는 영국 사회를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구심점이 된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져온 신념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오랜 세월 추구해온 신념이 요즘 사람의 시선으로 보기엔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그 신념이 잘못되었다고 질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영국 사회의 중심이 되어온 전통은 그만의 힘을 갖고 있었을 것이고, 때문에 왕실 역시 그 강한 전통에 오랜 세월 의지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더 퀸> 에는 변화해 가는 현재 속에서 과거를 지키느라 힘들었을 여왕도, 현재의 시각에 길들여져 과거를 불편해 하는 국민도 모두 갈등속의 '인간'이었다. 아울러 이 영화는 단지 영국의 특수한 현실을 얘기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모두가 겪는 어제와 오늘의 충돌, 그리고 화해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NAVER영화 jimm***님의 리뷰(일부 수정보완)
인물세계사
영국의 왕세자비
[Lady Diana Frances Spencer ]
출생 - 사망 | 1961.07.01. ~ 1997.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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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7월 영국의 세인트 폴 성당 앞, 한여름의 무더위도 잊은 사람들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제 곧 시작될 20세기의 동화를 기다렸다. 동화의 히로인은 자락이 7m나 되는 아이보리색 실크 웨딩드레스를 입고 마차에서 수줍게 내려섰다. 그녀는 젊고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군중들은 현실에 나타난 동화 속 주인공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아버지 스펜서백작의 팔짱을 낀 레이디 다이애나는 이제 남편이 될 영국의 왕위계승 서열 1위 찰스왕세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성당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결혼식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전 세계 7억의 사람들도 모두 찰스왕세자 부부가 동화의 마지막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삶은 동화가 아니다. 이 결혼식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두 사람의 가장 비극적이고 불행한 결혼의 시작이었다. 1981년 7월에 시작된 이 영국 왕세자 부부의 우여곡절 많은 결혼 생활은 15년 후 1996년 8월 결국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년 후 1997년 8월 다이애나 비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결혼 당시 갓 스무 살이었던 다이애나 비와 그녀보다 12살 많은 찰스왕세자는 여러 면에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다이애나는 귀족신분이었지만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이제 막 세상에 나와 유치원 보모로 독립적 삶을 시작하려던 순진한 아가씨였고 찰스는 태어날 때부터 제 1 왕위 계승자로 떠받들어지며 공부에도 소질을 보여 케임브리지를 나온 그야말로 노련한 지식인 왕자님이었다. 다이애나는 자기 발로 뛰는 스포츠와 춤을 좋아했지만 찰스는 말을 타는 폴로와 사냥을 즐겼다. 다이애나는 함께 하는 대화와 유대감을 중시했지만, 찰스는 혼자 하는 사색과 독서를 더 좋아했다. 다이애나는 결혼 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했지만, 찰스는 가는 곳 마다 스캔들을 뿌려대는 난봉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다이애나와 결혼 당시 그는 오랜 연인이었던 카밀라 파커볼스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신혼생활에 들어갔다. 훗날 다이애나 비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세 사람이 함께 한 결혼이니 좀 붐볐죠’ 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세인트 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다이애나 비와 찰스왕세자
결혼은 연애기간부터 삐걱거렸다. 순진하고 미숙했던 레이디 다이애나는 자신이 왕세자비가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 찰스왕세자의 주변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찰스왕세자에게 결혼은 왕으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그는 한 남자로서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지낼 배우자를 찾기보다는 공석인 왕세자비의 자리를 메워줄 적당한 여인을 찾고 있었다. 왕세자비로써 그리고 훗날 왕비로써 부족하지 않을 귀족 신분과 미모, 2세를 낳아줄 건강, 그리고 자신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 순종적 태도를 가진 처녀라면 누구라도 괜찮았다. 애초에 사랑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나누어줄 사랑도 충분치 않았던 찰스왕세자는 순진무구해 보이는 20살의 다이애나를 편의상 왕세자비로 골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찰스왕세자의 오산이었다. 생각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줄 알았던 다이애나 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자아는 강했고, 의지는 굳세었으며, 왕실 누구보다도 현명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의 불행이 싹텄다. 다이애나 비는 마치도 20세기 이전의 왕들처럼 버젓이 애인을 따로 두겠다고 나온 찰스왕세자의 뻔뻔함을 참을 수 없었고 자신을 왕세자의 액세서리처럼 취급하는 왕실의 태도에 깊이 상처를 입고 반기를 들었다. 그녀는 동화 속 왕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고분고분한 공주가 아니라 20세기 후반을 살아내고 있는 자립심 강하고 자존심이 센 여성이었다.
다이애나 비는 1961년 7월 1일 훗날 스펜서 백작 7세가 되는 올소프 자작 에드워드 존 스펜서와 퍼모이 남작 4세의 딸 프랜시스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 두 딸아이를 둔 스펜서 부부는 그녀가 가문을 이어갈 아들이 아닌 것에 상당히 상심했다. 부모의 상심은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전달되어 다이애나는 어렸을 때 자신이 남자아이로 태어나지 않은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올소프 자작 부부의 근심은 4년 후 다이애나의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해소되었지만, 아이 때 느낀 자존감의 혼란은 다이애나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7살 때 일어난 부모의 이혼사건도 그녀의 소녀시절을 불운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양육권과 재산권을 둘러싼 지루한 법정싸움에 다이애나의 남매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어머니가 떠난 집에 남은 어린 다이애나와 남동생은 부모의 따사로운 손길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인형과 작은 생물을 돌보는 일에 집착했고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행복을 느꼈다. 학업에서는 그다지 뛰어난 편이 못되었다. 언니 사라와 남동생은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수재였지만 다이애나는 평균 이하 정도의 성적에 만족해야 했고 이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열등감이 되었다. 그녀는 발레를 좋아하고 요리와 청소, 아기와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에 능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이런 재능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주변의 사람들도 다이애나를 특기가 없는 그저 그런 아이라고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이 모든 일을 예민하게 느끼고 상처 입었지만, 겉으로 자신의 불행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귀족가문의 영양인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10대다운 반항이 아니라 속으로 삭이며 남들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뒷자리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의 아가씨로 성장했다. 그녀의 이런 성격은 왕세자비가 된 후 갑자기 세상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자 문제를 일으켰다. 엄격한 왕실에 적응하는 것도, 대중 앞에 나서 왕세자비의 일을 수행하는 것도 모두 스트레스가 되어 그녀의 몸과 마음을 침범했던 것이다. 다이애나가 찰스왕세자를 처음 본 것은 그가 언니 사라의 남자친구였던 17살 때였다. 누구나 선망하는 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 다이애나가 느낀 감상은 그가 가여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언니 사라와 8개월간 좋은 만남을 이어가던 찰스왕세자는 사라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다이애나의 시야에서도 사라졌다. 그로부터 3년 후, 다이애나는 가까스로 부모의 허락을 받아 런던에서 여자 친구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막 직업을 구했고,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수다를 떨고 파티를 열고 클럽에 가는 생활이 한창 즐거운 스무 살이었다. 그녀는 이때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이 뒤로 젖혀질 만큼 웃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귀족의 딸이라는 허울을 벗어 던지고, 독립한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인생을 마음껏 향유하기 시작한 다이애나 앞에 찰스왕세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들의 만남은 극적이지 않았다. 존경하던 친척을 잃은 찰스왕세자를 위로하는 모임에 초대받은 다이애나는 우연히 찰스왕세자의 옆자리에 앉게 되고 그녀다운 따뜻함으로 왕세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상심의 시기에 다이애나의 위로를 들은 찰스왕세자는 그녀에게 갑작스레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살 미숙한 사춘기 소녀가 아니라 스무 살의 처녀로 성장한 다이애나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다이애나는 여러 면에서 찰스왕세자가 찾던 여인이었다. 영국 왕세자의 비가 되기 위해서는 성공회 신자이고 결혼한 적이 없는 처녀이며 왕족이거나 귀족가문 출신이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는데 다이애나는 이 조건에 합당했다. 거기다 그녀는 아름답고 건강했으며 무엇보다도 순진무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따뜻함도 가진 여자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소나기처럼 몰아치는 찰스왕세자의 데이트신청과 왕세자와의 데이트가 거듭될수록 증폭되는 언론과 세간의 관심 속에서 다이애나는 중심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어디로 떠밀려 가고 있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찰스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만남부터 결혼까지 모든 것이 주변에 의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결혼 며칠 전 다이애나는 문득 자신이 찰스왕세자의 진짜 마음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에게 사랑을 묻자 찰스왕세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사랑하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이 말은 결혼식 중 주교의 질문에도 다시 한번 반복되었다 ‘사랑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매우 기묘한 말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을 붙인 찰스왕세자의 진심은 신혼이 시작 되자마자 곧 밝혀졌다.
다이애나 비에 대한 찰스왕세자의 사랑은 자연인 여성에 대해 자연인 남성이 품은 자연스럽고 애틋한 사랑이 아니라 왕세자가 왕세자비에게 가지는 공식적인 사랑이었다. 찰스왕세자가 한 명의 남자로서 가진 사랑은 연애시기에도 결혼 후에도 다이애나 비에게 있지 않았다. 찰스왕세자가 아니라 인간 찰스로서 그가 사랑한 여인은 첫사랑이었지만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카밀라 파커볼스였다. 처녀시절 카밀라는 찰스왕세자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 증조할머니가 당신의 고조부인 에드워드 7세의 정부였답니다. 우리도 그럴까요?’ 라는 매우 도발적인 말을 건넸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만난 찰스왕세자와 카밀라는 서로 사랑을 느꼈지만 너무 젊은 나이와 카밀라가 귀족신분이 아니라는 장애가 찰스왕세자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찰스왕세자는 카밀라와의 사랑을 남겨둔 채 군에 입대해 몇 년간 영국을 떠났다. 왕세자의 청혼을 기다리던 평민 처녀는 신분을 한탄하며 찰스왕세자의 친구인 앤드류 파커볼스대령과 결혼했다. 그러나 찰스왕세자와 카밀라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카밀라와 앤드류 파커볼스와의 결혼소식을 들은 찰스왕세자는 무척이나 후회하고 상심했다고 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우정을 가장하며 파커볼스 부부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정은 이미 허울일 뿐 두 사람은 곧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남편 앤드류 파커볼스는 찰스의 왕세자라는 신분에 주눅 들어 이 부정한 두 남녀의 관계를 방조할 수 밖에 없었다.
제 1 왕위계승권자로서 결혼압박에 시달리던 찰스왕세자는 사랑하는 여인 카밀라를 두고 신부감을 찾아야만 하는 고뇌에 빠졌다. 그래서 이런저런 염문을 퍼뜨리며 난봉꾼을 자처했다. 카밀라가 평민 처녀라는 이유로 결혼을 망설였던 찰스왕세자에게 이혼녀 심프슨부인과 결혼하면서 왕위를 버려버린 큰할아버지 에드워드 8세의 호기가 있을 리 없었다. 찰스왕세자는 왕이 되고 싶었고 왕이 되기 위해선 적당한 왕세자비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사랑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두 손에 든 떡을 다 가지고 싶은 천상 왕족인 찰스왕세자는 적당히 속여먹기 좋은 어리고 순진한 여자가 필요했다. 다이애나가 찰스왕세자의 눈 안에 들어왔다. 카밀라는 자신들의 사랑을 이어가기위한 만만한 상대로 다이애나가 적당하다고 찰스왕세자에게 그녀를 권했다.
다이애나와의 약혼시기에도 찰스왕세자는 카밀라에게 사랑을 담은 커플 팔찌를 선물했으며 신혼여행 중에는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다. 흥분과 혼란 속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침착을 되찾은 다이애나 비의 눈에 찰스왕세자와 카밀라의 불륜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청산해줄 것을 읍소했다. 그러나 찰스왕세자는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한다고 밀어붙이며 아무런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몇 차례의 자살시도와 폭식증, 거식증을 오가며 다이애나 비가 질투와 자기혐오에 빠져 피폐해져 가도 찰스왕세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훗날 찰스왕세자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 다큐멘터리에서 다이애나 비와의 관계가 거의 파탄난 다음에 다시 카밀라와 혼외정사를 했다고 고백했지만, 다이애나 비는 찰스왕세자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결혼생활 중에도 단 한번도 카밀라와의 관계를 끊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다이애나 비는 해리 왕자가 태어난 후부터 이미 찰스왕세자로부터 마음이 떠났다고 훗날 고백했다.
카밀라 파커볼스로 인해 결혼 직후부터 찰스왕세자와 다이애나 비는 불화했지만, 그들은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들의 갈등을 감추어야만 했다. 다이애나 비는 시어머니인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찾아가 찰스왕세자의 부정을 폭로하고 바로잡아 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 란 대답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왕실은 그 구제불능 왕세자가 국민들 앞에서 더 멋지고 신뢰감 있게 보여지도록 끊임없이 언론 플레이를 했고 그 옆에 서서 다이애나 비는 방긋방긋 웃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연기해야 했다.
원래 소극적이고 수줍은 성격이던 다이애나 비는 폭발적인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왕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언론에 노출되면서 성장한 찰스왕세자는 다이애나 비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카밀라에 대한 질투와 남편에 대한 불신, 거기에 더해 대중 앞에서의 가식적인 연기까지 모든 것이 다이애나 비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손목을 그었고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으며,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면서 여위어갔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윌리엄과 해리 두명의 왕자를 낳아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하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는 다했다.
어머니가 된 다이애나 비는 자신이 어린 시절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두 왕자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왕족으로 특별대우를 받으며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시작한 봉사활동에 아이들을 대동하였으며, 그들이 궁궐 안에서 가정교사로부터 특별교육을 받기 보다는 일반 학교에 가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바랬다. 다이애나 비의 사랑 속에서 월리엄과 해리 두 왕자는 영국 왕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두 왕자는 한시라도 왕실을 박차고 나오고 싶은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었으며, 고통스러운 왕실 생활 중에 유일하게 시름을 잊게 해주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미 결혼 초기에 찰스왕세자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진 다이애나 비가 그나마도 15년간 영국의 왕세자비로 살았던 것은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아이들에게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남편 찰스왕세자와 왕실은 다이애나 비를 푸대접 하였지만 영국 국민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결혼 초 남편의 부정에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 비의 모습은 대외적으로 아무리 행복을 연기한다 해도 어색함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갈구해도 돌아보지 않은 찰스왕세자의 사랑을 단념하고 찰스의 아내가 아니라 진정한 영국 왕실의 왕세자비로서 의무를 다하기로 결심한 다이애나 비의 모습은 아름답게 변했다. 짧은 숏커트 헤어스타일에 심플한 정장을 차려 입은 그녀는 세계 여기저기를 누비며 자신의 소질인 봉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라는 자리는 그녀의 자선활동이 의미 있는 결실을 맺게 해주었다. 그녀가 관여하는 자선활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녀를 도왔다. 그녀가 일반인다이애나가 아니라 영국의 왕세자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충분히 파악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마다 않고 기꺼이 해나갔다.
진심 어린 그녀의 봉사활동에 세계는 감동했다. 그녀의 인기는 왕실 가족 그 누구보다 더 높았다. 찰스왕세자가 다이애나 비의 인기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저 왕세자를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 왕세자비가 필요했던 찰스왕세자와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 비의 인기에 당황했다. 그들은 다이애나 비의 대외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하고자하는 일을 찰스왕세자가 가로채기도 하였다. 다이애나 비는 겨우 찾은 자신의 소명을 왕세자비라는 굴레로 인해 놓쳐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청춘과 사랑에 대한 희망을 짓밟고 새로 찾은 삶의 의미까지도 싹을 죽이려는 왕실에 분노한 다이애나 비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신혼 초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징징대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1992년 그녀는 저명한 왕실전문 작가를 찾아내 자신의 암담했던 결혼생활을 낱낱이 고발하는 책을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발간 이후 별거를 선언하였다. 별거 후 1994년에는 이혼도 해 주지 않으면서 그녀가 날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는 왕실과 찰스왕세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국 국영 방송 BBC와 인터뷰를 했다. 이 인터뷰에서 다이애나 비는 영국 왕실과 찰스왕세자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결과는 자유였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인터뷰 직후 그녀와 찰스왕세자를 불러 들여 이혼을 지시했다. 1996년 8월 다이애나 비는 처녀 적 이름 다이애나 스펜서를 되찾으면서 왕세자비와 왕족의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제2, 제3의 왕위계승권자인 월리엄과해리왕자의 어머니로서 왕실가족으로 대우를 받았으며 웨일즈의 공주(The Princess of Wales)라는 공식 직함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녀는 두 아들의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여전히 켄싱턴궁에서 살 권리와 거액의 위자료, 왕궁내의 사무실을 얻었다.
이혼 후 1년간은 다이애나 스펜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친한 여자친구와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현재 상태가 ‘천국 같다’ 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왕세자비의 지위를 잃었다 해도 봉사활동을 통해 쌓은 그녀의 세계적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왕세자비라는 답답한 옷을 벗어버리고 날개를 단 듯 더 자유롭게 자신의 행보를 결정해나갔다. 그녀는 세계적 명사들과 함께 AIDS 환자들을 도왔고 대인지뢰반대 운동에 나서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결과를 이끌어 냈다. 남편 찰스왕세자의 불륜에 지쳐 맞바람으로 대응하던 지난날의 음습한 남녀관계가 아닌 대명천지에 떳떳한 사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997년 다이애나는 여름휴가를 애인과 함께 보냈다. 그녀의 애인은 영국 최고급 백화점인 해롯백화점을 운영하는이집트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장남 도디 파예드였다. 도디 파예드는 ‘불의 전차’ 등을 제작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였으며 다이애나 스펜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상류층 사이에 꽤나 바람둥이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지중해에서 꿈같은 여름 휴가를 보낸 두 사람은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는 도디 파예드의 호사스러운 아파트가 있었다. 도디 파예드는 이곳에서 다이애나에게 청혼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이애나도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파리시내의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호텔이 제공한 벤츠에 오르자 그들의 연애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던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자동차를 따라 잡기 시작했다. 빗발치는 카메라 세례를 벗어나기 위해 차는 과속했다. 그리고 운명의 지하차도로 접어들자마자 벤츠는 중심을 잃고 기둥으로 돌진했다. 차는 미끄러져 한 바퀴 돈 다음 반대방향으로 멈춰 섰다. 도디 파예드와 운전사 앙리 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다이애나 스펜서는 앞자리와 뒷자리에 끼어 치명적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뒤따라오던 파파라치의 행렬이 차 옆에 섰다. 그들은 차의 뒷 문을 열고 죽어가며 괴로워하는 다이애나 스펜서를 향해 구조의 손길은 뻗치지 않고 카메라 플러시를 터뜨렸다. 스무 살, 찰스왕세자와 데이트가 시작된 순간부터 언론의 카메라 세례 때문에 고통 받았던 다이애나 스펜서는 영국의 왕세자비였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구조받지 못한 채 번쩍이는 카메라 불빛 속에서 36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15년간 영국 왕실에 청춘을 바치고 이제 막 자유를 얻어 새로운 삶을 찾아 가려던 다이애나 스펜서의 급작스런 사고사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특히 그녀를 사랑했던 영국 국민들의 상실감은 매우 컸다. 그녀는단순한 왕세자비가 아니라 영국 ‘국민들의 공주’로 사람들에게 재평가되었다.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그녀가 살던 켄싱턴궁뿐만 아니라 여왕이 사는 버킹검궁 정문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다이애나 비를 애도하기 위해 버킹검궁 앞에 모인 영국 국민들
그때까지도 왕실은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에 냉담했다. 이미 이혼으로 왕실을 떠난 사람에 대해 그 어떤 의무도 없다는 것이 왕실의 기본적 입장이었다. 영국 국민들은 왕실의 쌀쌀한 반응에 분노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젊은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종국에는 언론의 횡포 앞에 방치하여 비명횡사하게 한 책임을 왕실에게 묻고자 하였다. 국민의 깊은 애도와 비난에 당황한 영국 왕실은 관례를 깨고 다이애나 스펜서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치르도록 하고 텔레비전을 통해 전세계에 방영했다. 영국 정부는 다이애나 스펜서의 유지를 이어 항구적인 기념 사업을 도모할 위원회를 설치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 직후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이 떠오르기도 했다. 음모론을 주장한 사람은 도디 파예드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 파예드였다. 영국 왕실이 유색 인종에다 이슬람교도인 자신의 아들과 다이애나가 결혼 하려고 하자 자칫하면 왕위를 이을 윌리엄 왕자에게 혼혈 의붓 동생이 생길 것을 우려해 사고를 위장하여 그들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그는 암살의 주체가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이며 그 계획을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도왔다고 주장했다. 재력가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주장은 묵살되지 않았고 그 후 오랫동안 다이애나 스펜서와 도디 알파예드의 죽음은 프랑스 경찰에 의해 수사되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 재판부는 다시금 이 사건은 운전자 앙리 폴의 음주운전으로 인한 자동차 사고였다고 확정지었다. 모하마드 알 파예드는 유감을 표시했지만 영국 왕실은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35년을 기다려 마침내 정식으로 결혼한 카밀라와 찰스왕세자
다이애나가 찰스왕세자와 이혼하기 1년 전 카밀라 파커볼스는 오랜 기간의 기만적인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했다. 하지만 찰스왕세자와 카밀라 파커볼스는 다이애나의 국민적 인기와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 탓에 오랫동안 법적으로 결합하지 못했다. 2005년 마침내 30여 년 세월을 기다려 카밀라는 찰스왕세자의 정식 부인이 되었다. 영국 왕실도 시대의 변화 속에서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왕실 가족으로이혼녀 카밀라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이혼녀라는 결함 때문에 비록 찰스왕세자가 왕으로 즉위한다 하더라도 왕비의 호칭은 얻지 못하고 ‘왕의 배우자’라고 불릴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죽기 직전까지 ‘웨일즈의 공주’ 라는 직함을 가졌던 다이애나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를 의식한 듯 찰스왕세자가 겸직하고 있는 콘월공작의 작위를 딴 ‘콘월공작부인’이라는 호칭에 만족하고 있다. 다이애나의 두 아들 월리엄과해리 왕자는 이제 30대가 되었다. 윌리엄 왕자는 2011년 4월 29일, 캐서린 미들턴이라는 평민 출신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엄격하고 전통을 고수하던 영국 왕실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은 다이애나 비라는 강하고 도전적인 여성이 왕실에 머물렀기에 가능하게 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다이애나 비의 일생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책들이 나와 있지만 그 중 영국 왕실 전문 작가인 앤드루 모튼이 쓴 <나, 다이애나의 진실> 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은 다이애나 비가 왕세자비 자리에 있을 때 앤드루 모튼과 비밀리에 다각적인 방면에서 접촉하여 자신의 인생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1992년 출간 당시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독자를 모은 책일 뿐아니라 이 책으로 인해 다이애나 비는 찰스왕세자와 별거에 들어갔다.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책은 1992년 이후 다이애나 비의 이혼과 1997년 죽음까지도 모두 함께 다루고 있다.
2006년 나온 영화 <더 퀸(The Queen)> 은 1997년 다이애나 비의 죽음 직후 영국 왕실과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취한 입장을 조명한 작품이다. 다이애나 비 측이라기 보다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국왕으로서의 고독과 고뇌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자료 화면으로 군데군데 다이애나 비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로 분한 헬렌 미렌의 탁월한 연기가 호평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Lady Diana Frances Spencer-영국의 왕세자비 (인물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