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2 도전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응씨배
대만 재벌 고 잉창치(應昌期)씨가 40만달러(약 4억 4000만 원)의 최고 우승 상금을 걸고 1988년 창설한 최초의 본격적인 세계 기전. '잉창치배'라고도 하며, 4년 주기로 개최되어 '바둑 올림픽'이라고도 불린다. 이 대회를 계기로 일본이 일방적으로 주도했던 세계 바둑계의 판도가 한ㆍ중ㆍ일 3국이 공존하는 구도로 바뀌었다.
제1회 조훈현9단, 제2회 서봉수9단, 제3회 유창혁9단, 제4회 이창호 9단이 잇달아 우승하여 창설 시부터 한국기사들이 대회를 휩쓸었다. 2012년 현재에는 박정환 9단이 응씨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이창호 9단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면서 세계 바둑랭킹 1위에 올랐다.
17수
낮게 또 낮게. 조훈현의 돌은 여전히 3선으로 흐른다. 상대의 움직임에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내 길을 간다. 실리는 현금과 같아서 함부로 탐하면 허점이 노출된다. 상대의 공격을 받고 한 방에 쓰러질 수 있다. 그 점을 경계하며 법도를 지키되 겁을 먹지 않는다.
18수
최대한 팔을 뻗어 하변을 키운다. 너무 넓어 허술하다. 침투의 급소가 한 눈에 보인다. 그러나 상대의 침공이 두려워 품을 좁혀서는 비겁한 모습이 된다. 실리에의 미련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지 않은가. 큰 꿈을 품고 드넓은 중앙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19수
들어오라며 넓게 벌렸으므로 무심히 쳐들어간다. 허허실실이다. 마음을 비우고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긴다. 사실은 이 장면에서 이 한 수 뿐이라는 것을 상대도 알고 나도 안다. 이 한수로부터 이 판의 골격과 상(相)이 결정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떨린다. 이젠 돌아갈 수 없다.
묘수가 빛나는 바둑이란 그동안 불리한 바둑이었다는 반증이다.
聲東擊西(성동격서):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
20수
중앙을 틀어막는다. 네웨이핑의 일관된 전략이다. 자잘한(?)실리는 내주기로 한다. 살점을 떼어내는 것 같은 아픔이지만 기꺼이 감수한다. 바둑은 때때로 너무나 운명적이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逢危須棄(봉위수기): 위기에 처한 경우 불필요한 것을 버려라.
21수
제4국에서 조훈현은 흑을 쥐고 우주류라 불리는 대 세력 전법을 펼쳤다. 중앙을 크게 에워쌌다. 상대는 지하철처럼 밑으로 기었다. 그러나 바둑은 2,3집의 미세한 차이로 지고 있었고 역전의 희망은 없었다. 그때의 고통 때문일까. 오늘은 반대다. 오늘은 반대다. 조훈현이 밑으로 기고 있다.
22수
제4국에서 네웨이핑을 패퇴시킨 것은 뇌리를 스쳐간 의심 한 조각이었다. 골인 지점이 눈앞이었는데 그 한 조각의 의심이 뭉게뭉게 커졌다. 네웨이핑은 끝내 진로를 변경했고 한 집을 졌다. 네웨이핑은 오늘 양면의 적과 싸운다. 하나는 조훈현이고 다른 하나는 4국의 악몽이다.
23수
조훈현은 계속 실리를 훔친다. 상대가 오직 중앙 세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철저하게 실리를 파낸다. 백의 작전권을 제한하여 오직 세력만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 다시는 집으로 돌아설 수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게 실리 탈취의 또 다른 목표다.
24수
조훈현의 국내 라이벌인 서봉수는 “한 집은 땅이요, 두 집은 하늘”이라고 했다. 열 집도 때로는 잔돈푼에 불과하다. 그러나 반집을 지고 있는 사람에겐 한 집이 전부다. 모든 수는 두 얼굴을 갖고 있으며 그 양면성이 바둑의 본질이다. 백의 세력 역시 집을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25수
실리와 세력은 균형을 이루는 게 좋다. 3선과 4선이 고저를 맞춰야 아름다운 포진이 된다. 그러나 오늘의 승부는 계속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큰 숭부는 심장싸움이다. 겁먹은 자가 진다. 그래서 두 기사는 나란히 호랑이 등에 올라탔고 이젠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게 됐다.
26수
외길 수순이 이어지고 있다. 백의 응수는 단순하다. 흑의 진로를 꾹꾹 막아 물샐 틈 없는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세력을 등에 업은 강력한 공격으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는 것이다. 네웨이핑은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장기전은 불리하다. 그는 속전속결을 원하고 있다.
27수
흑은 기고 또 긴다. 한 수 둘 때마다 두 집, 또는 석 집이 늘어나고 있다. 땀방울에 비해 소득은 누추하지만 그래도 확정된 집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닌 조훈현이건만 오늘 그가 믿는 것은 집 또는 실리라 불리는 한 푼의 소득이다.
28수
흑이 집을 긁어가는 동안 중앙에 하얀 장벽이 하나 생겨났다. 집과는 무관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무한한 힘을 낼 수 있는 강력한 장벽이다. 이 장벽이 어떤 역할을 해낼지 아직은 모른다. 확실한 것은 엄청난 투자가 들어간 이 장벽이 반드시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29수
A로 넘어가면 깨끗하고 안전하다. 아마도 그게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편하게 갈 수 없다. 조훈현은 반대로 파고들어 다시 한번 실리를 챙겼다. 독하다. 지긋지긋하지만 참으로 분명한 노선이고 선악을 떠나 사금파리처럼 날카로운 기세다. 후유증은 피할 수 없다.
30수
상대 진영을 가르고 돌파하면 반드시 이익이 따른다. 실리를 빼앗긴 백이 보복적으로 대가를 구하고 있다. 흑의 몸에서 생채기가 나고 피가 묻어나는 느낌이다. 당사자인 조훈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다. 세상의 고수 중에 초식동물은 없다. 고수는 본능적으로 평등과 평화를 거부한다.
31수
단수(單手)! 죽음 직전의 상황을 단수에 몰렸다고 한다. 단수에 몰렸다고 해서 무조건 삶을 서두르지는 않는다. 폐석(廢石)은 그냥 버리고 요석(要石)은 반드시 살린다. 어느 것이 폐석이고 어느 것이 요석이냐. 그건 판이 정한다. 상황이 변하면 애지중지하던 요석도 순식간에 폐석이 되고 만다.
32수
요석 중의 요석이므로 즉각 살린다. 이 돌이 잡히면 백이 거의 전 재산을 투자한 중앙의 장벽에 구멍이 뚫려버린다. 요석과 폐석을 한눈에 알아보는 것이 안목이다. 판 전체의 상(相)을 볼 줄 알면 안목도 깊어진다. 폐석을 살리고 요석을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를 하수라 부른다.
33수
이 한 점을 살리는 것은 하변 흑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다. 한바탕의 접근전이 끝나고 있다. 실리로 일관한 조훈현은 조용히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판 위에 놓인 돌의 마음(石心)을 들여다보고 돌의 소리(石音)에 귀를 기울인다. 친구여, 나는 지금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