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다를 만난 사람들 11 ◉
☸☸ (설법연구원) 2014년 11월호 원고
◉ 어머니의 위대한 힘 ◉
어머니와 자식의 인연은 세상의 어떤 인연보다도 끈끈하고 아름답다. 이런 인연으로 부모와 자식이 모두 출가자의 길을 걸으면서 도반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다. 한편 모친은 출가하지 않았어도 적극적으로 자식을 밀어주고, 스님은 부모를 제도해주기도 한다. 부모와 스님 자식간의 다양한 인연을 소개하려고 한다.
부처님 당시, 아바야마타(Abhayamātā)비구니가 있었다. 아바야마타는 아바야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녀의 이름은 빠드마바티(Padmavati)인데, 웃제니 시에서 매우 유명한 유녀였다. 그녀의 용모가 매우 뛰어나 그녀를 보고자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마침 이 소식이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은 빠드마바티의 용모에 궁금해 하던 차, 그녀를 왕궁에 초대했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왕과 빠드마바티는 만남이 잦아졌고, 마침내 그녀는 왕의 후궁이 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고, 왕궁에서 매우 행복한 생활을 보내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빔비사라왕의 아들인 아사세 태자가 반란을 일으켜 빔비사라왕을 옥에 가두었다. 아사세왕은 점점 포악해져갔다. 결국 아버지를 굶겨 죽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터지자,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그녀는 매우 절망했고, 아들을 데리고 몰래 왕궁에서 도망쳐 나왔다. 빠드마바티는 어린 아들(아바야)을 출가시켰다. 아바야 사미는 비록 어리지만 매우 열심히 수행했고, 만 19세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비구가 된 아바야는 더더욱 정진해 훌륭한 성자가 되었다. 빠드마바티는 아들의 설법을 듣고, 그녀도 출가해 무외無畏 비구니라고 하였다. <장로니게>에 그녀가 아들과 주고받은 게송이 전한다. 먼저 아들 스님이 보낸 게송이다.
어머니!
발뒤꿈치에서부터 머리 방향으로 올라가며 거슬러 살펴보고,
다시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더듬어 관조觀照해서
이 육신은 ‘청정하지 못하며, 악취를 풍기고 있다’고 관하셔야 합니다. - 33편
다음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내용이다.
“아비야 스님.
이처럼 시간을 보내는 존재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욕심은 모두 근절되었습니다.
또한 뜨거운 고뇌도 모두 끊어졌습니다.
나는 청정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귀의하였습니다. - 34편
아비야 스님.
범부들이 집착하는 이 신체는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철저하게 마음 기울여 관조하고 있습니다. - 35편
이 육신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속성이 많기 때문에
나는 노력하고 정진하며,
망상을 소멸하는 길을 체득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36편
아들과 어머니가 승단의 비구 비구니로서 서로 탁마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소납이 미얀마에 있을 때, 베트남 사람들인데 아들 비구와 샤알레이 어머니[비구니는 아니지만 삭발하고, 승복입은 여성 출가자]가 함께 수행하러 온 경우를 보았다. 남방은 비구에게 무조건 삼배를 해야 하는데, 이 어머니 샤알레이는 아들 스님을 만나면, 땅바닥에서 삼배를 올렸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공부하는 <치문> 책에 ‘동산양개화상화친서’가 있다. 이는 당나라 때 양개 화상과 어머니와의 서신 내용이다. 처음에는 모친이 아들의 출가에 눈물짓다가 나중에는 스님 아들에게 목련존자처럼 자신을 구제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우리나라에도 출가한 아들과 모친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의상대사의 제자인 진정 스님과 어머니다.
진정은 출가 전 집이 가난해 장가를 들지 못했다. 겨우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 어느 스님이 불사를 하는데 시주할 것을 권하자, 어머니는 부러진 솥을 주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꾸지람을 들을까 걱정하던 차, 아들이 돌아와 그 사실을 말하자, 아들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솥을 시주하였다니 매우 잘하셨습니다. 그 솥이 없더라도 밥을 끓여 먹을 와분瓦盆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이 아들은 오래전부터 태백산맥에 머무는 의상 대사에게 출가하고 싶었다. 홀어머니가 걱정되어 출가할 생각을 내지 못하던 어느 날 출가할 뜻을 비치자, 어머니가 말했다.
“불법 만나기 얼마나 어려운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출가해 열반 언덕에 오른다면, 그것이 효도하는 길이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빨리 떠나거라.”
“어머님도 연세가 들어서 제가 없으면 힘드실 텐데 어찌 쉽게 집을 떠나겠습니까?”
“네가 나 때문에 출가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일이다. 지금 네가 내 곁에 있는 것이 효도가 아니니라.”
다음날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모든 쌀을 모아 밥 덩어리를 만들어 아들이 떠나는 바랑에 넣어 주었다. 자신이 떠나면 어머니는 동냥을 해서 얻어먹어야할 것을 알기에 아들이 밥 덩어리를 사양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당장 먼 길을 떠나는 일이고, 나는 옆집에서 며칠 얻어먹으면서 차차 양식을 구하면 된다. 걱정 말고 떠나거라.”
아들은 어머니의 간곡한 말에 길을 떠나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죄가 되거늘 어머니께서 한사코 밥을 싸 주시니, 내가 열심히 공부해야 겠구나.’
아들은 밤낮으로 걸어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 대사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는 바로 삭발하고 출가해 이름을 진정이라고 하였다. 3년 후 진정 스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진정은 좌선을 해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만 7일 만에 일어났다. 진정이 선정에 들어 어머니를 관觀해보니,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매우 행복해 하셨다.
진정이 의상 대사에게 어머니에 대해 말하자, 의상은 제자들을 데리고 소백산 추동錐洞에 가서 초가를 짓고, 약 90일 동안 화엄대전華嚴大典을 강론했다.
이 강론을 마치고, 지통智通 스님이 그 요지를 뽑아 책 두 권을 만들고 이름을 <추동기錐洞記>라고 하였다. 이 강론을 마치고 나니,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너의 공덕으로 이미 천상에 태어났다. 내 걱정 말고 불도 수행을 잘 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다음은 남방불교의 대표 나라인 태국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태국의 모녀 비구니 이야기다. 현재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여성 출가는 허락된다. 하지만 비구니가 감히 비구와 동등하게 가사를 수할 수도 없고, 비구니라는 호칭 자체도 없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해외 뉴스를 통해 태국의 여성 출가자들이 반기를 들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대표되는 스님이 담마난다(Dhammananda)이다.
비구니 담마난다를 중심으로 6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송담마카야니(Songdhammakalyani) 사원에서 비구니를 위한 교단과 사회적 편견을 개선하며, 부처님 당시처럼 승려로서의 권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DW AKADEMIE〉지에 따르면, 이 비구니들은 방콕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나콘 파톰(Nakhon Pathom)의 송담마카야니 사원에서 비구처럼 가사를 수하고, 공부하며 마을에서 탁발하는데, 이는 태국 승단에서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이렇게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담마난다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인터뷰하였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아 기르면서 비구니가 되기를 희망하다가 출가하였다. 담마난다는 어릴적 어머니 없이 자랐는데, 그 어머니를 10년 만에 만난 것이다. 모친 비구니는 구족계는 받지 못했지만 당시 태국 불교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담마난다의 모친은 보라마이(Voramai) 스님으로, 1950년대 여성 출가가 허용되지 않았던 태국 불교계의 ‘금기’를 깨고, 출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담마난다도 어머니처럼 출가한 것이다.
그녀는 출가 전 방콕의 타마사(Thammasat)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로 활동하며, ‘여성과 불교’를 주제로 한 저술에 몰두했었다. 또 태국 정부가 수여하는 여러 상을 받았고, 방송 매체의 단골 게스트로도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는 사회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세속적인 삶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출가를 결심했던 것이다. 스님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사회적인 성공도 비구니 어머니의 삶에 비춰보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참 삶의 길을 찾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고, 비구니계를 수지하기 위해 스리랑카 불교계로 인생의 향로를 돌렸다.” 담마난다가 스리랑카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하고 태국으로 돌아온 이후, 태국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2000년전 태국에 있었던 비구니 교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비구니 권익을 위해 바로 잡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보수 비구 스님들과 담화를 통해 태국 불교계를 변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원래 이 글을 쓰는 취지가 어머니와 출가한 자식과의 소중한 인연인데, 태국 담마난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다. 독자들은 ‘비구니 문제가 무슨 큰 문제이냐?’고 하겠지만, 남방에서는 대단히 획기적인 사건이다. 담마딘나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담마딘나와 같은 용감한 비구니 개혁자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바위를 뚫는 것처럼 담마난다와 모친 비구니 스님들의 노력으로 훗날 반드시 태국 비구니 교단에 큰 결실이 맺히기를 기대한다.
부모 자식 간의 인연으로도 소중한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모와 자식이 부처님의 진리를 공통분모로 하여 서로 탁마하고, 서로를 이끌어주는 인연이라니... 세상에서 이보다 가장 값진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첫댓글 참 감사한 인연입니다. _()_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