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수 생활 4일째 입니다. 스텝의 상태를 보니 아직 일을 할 수 없는
처지라서 후시딘과 밴드를 사다주고 들어왔어요. 미안했던지 오피스텔
임대료를 자신이 내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실내온도가 31도,
다소 눅눅한 공기가 살갗에 닿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웃통을 벗고
러닝머신에 올라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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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분, 4k, 210칼로리를 태우고 났더니 아무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일 대신 러닝머신을 탄 것이니 달밤에 체조한다고 너무 흉보지 마시라.
돈이 필요해서 은행털이 드라마를 보았어요. 복권이든 강도든 돈만 생긴
다면 뭐든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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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생각하라!’ 어데서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몇 안 되는
네트워크 중 요새 자꾸 손이 가는 사람은 고전평론가 고 여사입니다.
"백수는 직업이 없는 게 아니라 직업을 스스로 만드는 존재다"
고전의 스승은 모두 백수 출신인데 그 중 원조는 공자라고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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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노자는 아예 직업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었고, 소크라 테스나
디오게네스 같은 서양철학서의 현자들도 전부 '자유인'출신이라고 해요.
자유인이란 직업을 갖지 않는 존재로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직업을 갖는
건 노예였대요. 노예는 확실한 정규직인데 평생 동안 하나의 직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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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세습까지 되니 그보다 더 안정된 직장이 어디 있겠냐고 하더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직업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와서 유독 노동에 대한
예찬과 직업에 대한 열광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 삶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아닙니다. 화폐의 증식을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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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를 무한히 증식하려면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노동을
열망해야 합니다. 직업이 없으면 자신을 자책하고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억지로 정규직이 되고나면 다음엔 무엇을 꿈꾸는가?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엔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인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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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대해 배우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게 백수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정규직의 미래도 역시 백수인 것입니다. 소유와 증식의 끝임
없는 추구는 삶의 번뇌와 몸의 질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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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인류의 비전은 소유에서 자유로, 증식에서 순환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부터 ‘사는 것 자체가 직업’입니다.
직업 따로 인생 따로 가 아니라 삶을 통째로 살아야 한다고.
2.
새빨간 옷에 하회탈을 쓴 사람들이 총을 들고 서 있어요. 같은 옷에 가면까지
써서 누가 범인이고 누가 인질인지 구별되지 않아 경찰들은 난감합니다.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한 아홉 명의 범인들은 누구도 다치지 않는 걸 목표로
4조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1’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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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통일을 앞둔 한반도를 배경으로 가상의 공동경제구역 조폐 국에서
벌어진 인질 강도극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시즌5까지 제작된 스페인
원작 ‘종이의 집’을 한국판으로 리메이크했어요. 대부분 원작 이야기와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새로운 배경과 가상 설정이 더해져 곳곳에 달라진 점이
숨어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스페인 판보다 한국판이 더 재밌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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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스페인 드라마를 K드라마로 만들어 한국 시청자들에게 소개하겠다는
목표가 제작진에게 있었다면,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은 더없이 성공적인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배경 지역만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디테일한 설정과
정서까지 더했어요. 하지만 외국 드라마 리메이크 모범 사례로 보긴 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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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있어요. 더 걸렀으면 좋을 장면과 더 낫게 만들 여지가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원작과 한국 드라마의 매력, 원작과 한국 드라마의 단점이
골고루 섞여 원작의 매력이 크다고도, 리메이크를 잘했다고도 보기 어렵다고나
할까요? ‘오징어 게임’처럼 국내 시청자보다 해외 시청자들에게 더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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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을 이끌어 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연기 톤이 통일
되지 않는 감이 있지만 배우 박 해수는 뛰어난 연기로 등장할 때마다 긴장
감을 일으키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 같습니다. 1회는 선입견대로 흘러
갔고 2회부터 공동경제구역에 위치한 조폐 국을 터는 강도와 인질, 사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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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하려는 경찰 모두 남북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원작 속 이야기 구조에
분단국가 현실은 새로운 변수로 작용합니다. 한국판 ‘종이의 집: 공동경제
구역’이 리메이크여도 빤하지 않고 독립적인 작품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전형적인 한국형 범죄 물처럼 흘러가는 초반 전개는 호불호가 갈릴 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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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후반으로 갈수록 캐릭터 플레이와 심리전, 적절한 반전이 어우러져 눈
뗄 수 없는 재미를 줘요. 박 해수는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등장만
으로도 극의 긴장감을 좌우해요. 김 윤진 역시 뛰어납니다. 심리전 사이
로맨스를 튀지 않게 연기해내는 힘이 있어요. 분량은 다소 길게 느껴졌어요.
미드 폼 드라마가 인기인 요즘 시대에 70분짜리 드라마 6회 차를 보는 건
어느 정도 각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극을 볼수록 부담과 압박보단 몰입감과
흥미가 더욱 커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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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재미가 붙는 작품입니다.
클리셰에 냉정한 한국 시청자보다는 해외 시청자들이 더욱 좋아할 공산이
높다는 평입니다. 전종서는 야성미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배우들
과도 좋은 케미스트리를 보여준다. 박 해수는 살벌하고 김 윤진은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덴버 역의 김 지훈도 약간 과하긴 해도 잘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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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는 모델 장 윤주가 나왔어요. 연기는 언제 배웠는지 대단하더이다.
아직까지 볼까 말까? 고민하시는 분들은 일단 보시라. 오락거리로는 나쁘지
않습니다. 초반 연출이 진입장벽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주인공 일당이 일단
조폐 국으로 입성하고 난 뒤엔 사건이 흥미진진하게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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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하고 야비한 조 영민(박 명훈)이 감정을 즉시 자극해 시청자를 빠르게
몰입시킨다면, 사건이 진행될수록 미묘하게 흐르는 교수(유 지태)-도쿄
(전종서), 선 우진(김 윤진)-교수의 관계는 꾸준히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시청자를 붙듭니다. 스페인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지만, 한국 오리지널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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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각색이 잘 됐다고 봐요. 남과 북이 공동경제구역을
만들고, 이를 통해 한 몫 단단히 챙기려는 이들이 들러붙는다는 설정은 남북
정치 상황과 어우러져 설득력을 얻는 것 같아요. 남과 북의 경제 교류가
계급 갈등을 심화한다는 전제 또한 팬데믹 이후 벌어진 계급 격차를 고려
하면 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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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말하지만 원작이 가진 이야기의 힘이 뛰어납니다. 여기에, 남북한의
미묘한 신경전부터 경찰과 교수의 치열한 두뇌 싸움이 극에 재미를 더합니다.
관점에 따라 새로운 볼거리가 생깁니다. 경찰의 편을 들다가도 강도들에게
연민이 드는 순간이 종종 찾아옵니다. 하회탈과 사자탈 등 한국적인 요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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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띕니다. K감성이 전 세계에 통하는 요즘 시대,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은 글로벌 시청자들이 열광할 요소가 빼곡한 작품입니다. 지인이 그러는데
인생을 인생자체로 살라고 합니다. 살아보니 모든 것은 허무라대요.
그러니 의미부여를 하지 말래요. 유일하게 허무로 끝나지 않는 것은 '아는 것
(알아가는 것)'뿐이라고 합디다. 그리스로마인들이 '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더니만 결국 지혜가 그 지혜(Jx)인가?
2022.7.1.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