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따라 가을 속으로/전 성훈
계절이 시월로 들어서자 마음이 허전해진다. 딱히 근심하거나 걱정할 일도 없는데 자꾸 공허한 마음이 든다. 칠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가을을 타는 지 문득 길을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친구들 대화방에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싶다고 하소연하니 곧바로 반가운 대답이 올라온다. 짬이 나는 친구들과 1박2일간 동해안으로 가기로 하자 한 친구가 속초에 숙소를 잡았다고 연락을 한다. 떠나기 이틀 전에 고성 건봉사를 첫 목적지로 정한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지금쯤이면 고성지역에는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든다.
첫날 이야기, 떠나는 날 아침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에는 영동지방에 간간히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다. 복장을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유독 추위에 약하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어도 더위는 그런대로 잘 견디지만 추위는 남들보다 심하게 탄다. 밑에는 내복을 입고 위에는 내복 대신 패딩에 두툼한 겨울 잠바를 걸치고 겨울모자도 준비한 채, 2호선 강변역 전자상가 앞에서 친구 자동차에 오른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길이 막히지 않아 자동차는 시원시원하게 잘 달린다.
이른 점심을 하자는 의견에 따라 홍천에 들러 돼지갈비 숯불화로구이 전문점이라는 ‘양지말’을 찾아간다. 삼겹살이나 목살은 좋아하지만 돼지갈비는 별로다. 게다가 양념갈비는 양념 때문에 잘 타서 갈비를 먹고 싶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다. 일행이 좋다고 하면 말없이 따를 뿐이다. 맛있게 먹는 친구들 모습을 보고 나도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며 낮술도 몇 잔 마신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메밀로 만들었다는 커피 한 잔 마시고 기분 좋게 금강산 건봉사로 향한다. 건봉사로 가는 도중에 사진작가 친구가 멋진 비경을 소개해준다. 인제군 남면 소재 ‘비밀의 정원’이다. 한 때 인기를 얻었던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구릉지에서 하늘과 구름과 가을이 물드는 숲 그리고 작은 오솔길을 보는 순간 저절로 탄성이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이름 그대로 숨겨진 정원이다. 사진작가들이 반드시 찾아가는 비경이라는 설명이 딱 들어맞는 곳이다. 친구가 찍어 준 ‘독사진’을 보고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 웃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인다며 영정사진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사진 속의 내 모습을 보니 마음에 든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정사진으로 써도 괜찮을 것 같다. 역시 사진작가의 솜씨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비밀의 정원을 떠나 건봉사로 가다가 인제군 인제읍 합강 앞에 잠시 자동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합강은 내린천과 인북천이 홍진포 옛 합강나루 용소에서 합쳐서 흐르기에 합강(合江)이라 부른다. 50년 전 그 옛날 이곳에서 군대 생활을 했던 한 친구의 추억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다시 자동차를 타고 건봉사로 향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바람도 분다. 건봉사에 도착하니 잠시 비가 그쳐서 다행이다. 겨울복장으로 단단히 차려입어 때 이른 추위를 견딜 만 하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모두 등산용 재킷을 꺼내 입으면서 내가 두툼하게 잘 입고 왔다고 한 마디씩 거든다. 5년 전 가을 건봉사를 찾았을 때에도 비가 내렸는데 이번에도 비가 오는 것을 보니 건봉사는 비와 인연이 깊은 절인가 보다. 청아한 스님의 독경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주변을 바라보니 산중에는 이곳저곳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계곡 물소리는 우렁차다.
건봉사를 나와 속초에 들어서니 어둑어둑하다. 가을 속 겨울을 재촉하는 비는 을씨년스럽게 추적추적 내려 스산하다. 그동안 여러 번 동해안을 찾았지만 직접 영랑호수 주변을 걸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영랑호수 저 멀리 구름 속에 늠름한 모습의 울산바위가 보인다. 구름 속으로 석양의 햇빛이 잠시 얼굴을 내밀자 그야말로 멋진 한 폭의 수채화가 그려진다. 40분 정도 영랑호수 둘레를 걷고 나서 저녁을 먹으려고 ‘아바이 마을’에 있는 물회 전문점을 찾아간다. 식당 안에는 제법 손님들이 들어차서 왁자지껄하다. 커다란 그릇에 나온 가자미 비빔회에 공깃밥 절반을 넣고 고추장을 듬뿍 쳐서 비빈다. 따뜻한 미역국과 새우젓갈을 곁들이니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야말로 꿀맛이다. 빨강 뚜껑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술맛이 싱겁다. 술맛이 싱거우면 그날은 평소에 비해 술을 많이 마시게 된다. 식사를 마치고 속초 중앙시장에 들려 도다리 회를 뜨고 문어는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꿩 대신 닭이라고 한 마리에 만원하는 물오징어를 큰 맘 먹고 사가지고 숙소로 향한다. 밤 8시가 되어 숙소에 들어가 좌판을 벌리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 되어간다. 상당히 술이 오른 김에 잠자리에 드니 금방 잠에 곯아떨어진다. 습관은 정말 무섭긴 무섭다. 다음 날 새벽 5시 경에 눈이 떠져 옆에 두었던 페트병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한다. 5시 30분 알람소리에 일어나 방을 살짝 빠져나와 거실에 불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둘째 날 이야기, 곰치국으로 아침식사를 하려고 식당으로 가는 데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울산바위가 다가온다. 울산바위를 더욱 가까이 볼 수 있는 포인트로 이동하여 사진을 찍는다. 맑은 지리보다는 묵은지 곰치국이 내 입맛에는 훨씬 잘 맞아 친구들에게 강력하게 묵은지 곰치국을 권한다. 펄펄 끓는 곰치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털어 넣으니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흐물흐물 푹 익은 곰치덩어리를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 사라져버린다. 미끌미끌하면서도 달착지근한 식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십대 첫 입맞춤처럼 잊을 수 없는 감촉이다. 곰치국은 이번 여행에서 꼭 먹고 싶다고 벼른 단 하나의 음식이다. 간절히 원하던 음식을 맛보니 세상에 부러운 게 없다. 상쾌하고 흐뭇한 기분으로 바다를 보러 속초시 영금정을 찾는다. 세찬 바람이 부는 정자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확하고 뚫리는 듯하다. 장소를 옆으로 옮겨 커다란 바위에 부딪치는 집채보다 큰 파도를 보면서 아옹다옹하는 우리네 삶을 떠올려본다. 바위에 부딪친 파도는 포말을 이루며 사라져간다. 멋진 가을 바다의 위용을 뒤로 하고 다시 영랑호수로 간다. 자동차로 넓은 영랑호수를 한 바퀴 돌고나서 아늑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창문으로 비치는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만끽한다.
느긋하게 오전 한 때를 즐기고 속초를 떠나 영월로 향한다. 메밀꽃의 고장 봉평과 대화를 지나며 이효석 선생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인 허생원과 동이를 떠올린다. 평창군 토담 막국수 집에 들려 늦은 점심을 먹는다. 찬 음식을 싫어하는 나는 뜨거운 옹심이 칼국수를 다른 친구들은 시원한 막국수를 주문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메밀전에 막걸리 한 잔을 걸친다. 맛집으로 소문이 난 집인지 벽에 붙어 있는 방문객의 글을 보니 알만한 연예인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영월군 무릉도원면 주천강에 있는 또 다른 비경 돌개구멍과 요선정 그리고 무릉리 마애여래좌상을 찾아가는 길이다. 처음 돌개구멍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다가 안내문에 Pothole이라는 설명을 보고 알아듣는다. 단단한 중생대 쥐라기 화강암이 수억 년 동안 물살의 등살에 못 견디어 둥글게 움푹 파인 모양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3.5미터로 고려시대 암벽에 부조로 새긴 것으로 충남 서산 마애여래삼존불 보다도 불상 훼손이 더 심한 듯하다. 읽기도 어려운 한자 요선정(邀僊停), 조선 중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의 시조를 지은 양사언 선생이 이곳 경치에 반하여 선녀탕 바위에 요선암(신선을 맞이하는 바위)이라는 글자를 새긴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지방에 살던 원, 곽, 이씨를 중심으로 요선계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숙종 임금이 하사한 어제시(御製詩)을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 정자를 짓고 요선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특이하게 무릉리이다.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소망이 지역 이름을 수주면에서 무릉도원면으로 바꾼 연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 같은 경치를 구경하고 나니 하늘이 어두워진다. 웃음과 수다로 점철되었던 기분을 털어내고 이제는 차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 가야할 때이다.
이틀 동안 운전하여 힘들어도 즐거운 표정으로 가끔 과속운전을 하여 놀라게 했던 스포츠맨 기사, 조수석에 앉아 졸지도 못하고 운전기사가 심심하지 않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종종 좌충우돌하여 핀잔을 듣기도 했던 배려심이 돋보이는 친구, 운전기사와 조수석에 앉은 친구는 애니메이션 영화 ‘톰과 제리’ 주인공 고양이와 생쥐 사이처럼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보지 않았거나 잘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으로 안내하며 섬세한 솜씨로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내면서도 짬짬이 거친 말투를 내뱉어 웃음을 선사한 멋쟁이 사진작가, 자동차만 타면 스르르 졸음에 쫓겨서 끄덕끄덕 고개를 떨구며 벼슬 빠진 수탉 신세가 되어버린 나에게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깊어가는 가을을 뒤따라가며 찍은 비밀의 정원, 동해 바다, 울산바위, 주천강 돌개구멍의 작품 사진 속에 백발 늙은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가을을 맞으며 허전하고 쓸쓸했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삶의 소소한 즐거움과 여유로운 기분이 샘솟는다. 그 누가 우리나라를 좁디좁은 땅덩어리라고 말했던가.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이 내뿜는 자연의 손짓에 취하며 가을을 따라간다. 가을은 그렇게 우리를 유혹하며 부른다. (2021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