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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의와 바리새인의 의”
첫째주일 |
□ 마5:13-20 □
박창환 (본원장・신약학)
I. 본문의 역사적 배경
어떤 글을 막론하고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썼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근자의 대부분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마태복음 저자가 유대인이었고 그 첫 독자들은 시리아 안디옥 지방에서 A.D 80 중반에 살고 있던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였을 것이라고 한다. 유다 전쟁(Jewish War, A.D 66-70) 때 북쪽으로 피난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유대인이 많이 사는 큰 도시 안디옥에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동족인 불신(不信) 유대인들의 동족애에서 우러나오는 보살핌과 구호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그 두 그룹은 한 회당에서 같이 지낼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을 가지게 됐다. 마침내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떨어져 나와서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본국에 있을 때에도 불신 유대인들에 의해서 믿는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여러 가지로 공격과 비난을 받았었는데, 여기 피난지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 토라(율법)와 장로들의 유전을 문자대로 지키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율법도 유전도 마구 범하고 있으니 불의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2) 유대인들은 예언된 메시아를 꾸준히 기다리고 있으며 아직 메시아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자기들(불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사람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밖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동시에 내적으로는 (1)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이론을 오해하여,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극단적 생각을 하면서 무법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던 것이고 (2) 마가복음이 이미 읽혀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신앙인의 윤리 생활에 대한 가르침이 별로 없고, 구전으로 예수의 교훈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신도들의 삶을 실제로 교도(敎導)할만큼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풀러 Reginald H. Fuller 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 서설에서 마태복음 저자의 저술 목적을 간단히 아래와 같이 말한다. “마태는 그의 공동체에게 랍비적 교훈(토라=rabbinic instruction)을 대치할 만한 것을 공급하려고 글을 썼다. 즉 참 이스라엘의 창건자이시며(16:17- 19), 새롭고 보다 나은 의(義)의 메시아적 해설자로서의(5:17-20)의 예수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Harper's Bible Commentary, 1988, p. 951)
그리고 그는 마태복음을 다음과 같이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Harper's p.951).
1. 1:1-4:16 메시아 예수의 사람됨
2. 4:17-11:1 말씀과 행위의 메시아 예수
3. 11:2-16:20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제자들의 초기적 신앙
4: 16:21-20:34 예루살렘에로의 여행
5: 21:1-25:46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6: 26:1-28:20 수난과 부활
위에서 말한 것을 토대로 해서 볼 때, 오늘의 본문은 동족에게 박해와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에게,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고, 불신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와 기독교의 의를 비교하여, 참된 의가 무엇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진 그들의 의가 얼마나 우월하다는 것을 깨우치려는 것이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유혹을 받고 있는 공동체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인다.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번에 걸쳐 가르치신 교훈이 요약되어 격언(格言)조로 구전으로 혹은 단편적 문서로 전해지던 것이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서 수집되어 5장, 6장, 7장에 배열된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그 나름의 맥락이 있고, 어떤 특정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원래의 배경은 언급되지 않고, 여러 상황에서 말하여진 것들이 구슬들처럼 꿰어져 하나의 어록이 되어 있는 것이다.
II. 주 해
< 13절 >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 어전에서 쫓겨나 실낙원의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 세계의 특성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 아닌 사탄의 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되는 세상을 건설하시려는 것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본 생활 법칙, 즉 십계명을 받아서 선포하였다. 5:1-12에서는 사탄 왕국의 질서나, 낡은 이스라엘의 질서와 법 대신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법을 개진한 것이다. 세상 나라에서는 돈 있는 자, 권세 있는 자, 난폭한 자, 무자비한 자 등이 잘 살고,그런 방법으로 출세한 자들을 행복한 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8 복의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11-12절에서는 박해적 상황을 말하면서, 그런 처지를 당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야말로 행복하다고 언명하셨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13절이 나온다. 즉 마태 공동체는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동족에게서와 많은 반대자들에게서 부당한 욕을 먹고 억울하게 박해를 당하는 역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은 종말까지 악마가 적의를 가지고 해코지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어둡고 악한 세상을 포기하시거나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원하시려고 적극적인 배려를 하시고 행동으로 옮기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 사건이며 성령 사건이다. 그것을 내다보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 된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현 세상은 소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썩었고 또 썩어 가고 있다. 행복해야 할 세상에서 행복이 사라졌다. 즉 살 맛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세상을 고치고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도가 있어서 그 세상 한복판에 그리스도 공동체를 두신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냥 소금이 아니라 세상 (‘땅’ γή)의 소금이다. 즉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말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소금이라고만 생각한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조금도 세상과 격리됨이 없이 염화나트륨 NaCl 의 효능을 발휘해야 할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선 상식적으로 말해서 소금은 생선이나 육류나 부패하기 쉬운 식물에다 쳐서 부패를 방지하는 preserving 역할을 한다. 그뿐 아니라 소독하고 깨끗하게 하는 cleansing 역할도 한다. 또한 음식 맛을 나게 하는 seasoning 중요한 작용도 가지고 있다. 막 9:50에서는 소금을 치면 뻣뻣하던 것이 절여져서 누그러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배추를 소금으로 저려서 김치를 담그듯이 말이다. 자기 주장만 하고 고집스러운 인간이 소금에 저려진 배추처럼 나긋나긋한 사람이 되어, 대인관계가 부드러워져서 화평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한복판에 보내어지는 목적도 그럴 것이다.
문제는 소금이 … 그 맛을 잃게 되는 경우다. 나트륨과 염소가 합성체가 되어 NaCl이라는 물체로 있는 한 그것은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물질과 만나서 화학 반응을 일으켜 나트륨과 염소가 분해되면, 더 이상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염분을 함축한 어떤 물질을 가리키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금 같지만 사실은 순수한 소금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많이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염분이 화학 작용에 의하여 사라지면 남는 것은 소금 같지만 짠맛은 없는 물질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면서 동시에 소금과 같은 능력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소금 맛을 가지고 있어야 할 그리스도인이 맛은 없는 보통 사람이 된다면 아무리 썩은 세상, 맛없는 세상, 더러운 세상에 들어간다 해도 하등의 작용도 하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소금은 무엇에 대한 은유(隱喩 metaphor)일까? 그리고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본래 죄인이었던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했으니, 소금 아니던 자가 어떻게 갑자기 소금으로 둔갑하느냐 말이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욕심과 갖은 불의로 가득하던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사랑하는 마음,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 기쁨과 평안으로 찬 마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등을 가진 인간으로 변한다. 사랑과 진실 등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 나라의 성품이 바로 소금이라는 은유가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라는 어마어마한 작용을 통해서(엡 1:19 참조) 소금과 같은 성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맛을 잃는다”(⌈모란데⌋ μωρανθῇ)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역행이어서 이를테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해당할 것이며(막3:29), 회복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결국은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는 절망적 결론을 내렸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세상 속에서 소금과 같은 천래(天來)의 성품과 요소를 가지고 작용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역할을 하라는 것인데, 그 소중한 소금의 요소를 잃어버린다면, 존재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다. 매우 무섭고 심각한 이야기이다. 마태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는 역경 속에서도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 14절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12절의 세상은 땅(게 γή)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기의 세상은 코스모스 κόσμος 즉 세계(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금은 어떤 물건에다 치는 것이지만 빛은 공간 속에서 작용을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치 빛이 어떤 공간 속에 있음으로 인해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광명을 주는 것처럼 암흑한 세상 속에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의 죄악과 그것으로 인한 고통, 슬픔, 불안 등을 몰아내고,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어두움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본래는 어둡기만 하던 사람이 성령을 통한 재창조로 인해서 빛이라는 정 반대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냥 빛이라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상을 위한 빛이라는 사명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그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것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이어서 제자들을 작은 빛으로 만들어 그 속에 투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빛으로 재창조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다. 동네가 산 위에 있을 때 사방에서 다 잘 보이는 것처럼, 빛이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빛에다 비유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과, 그렇게 되기를 의도하셨다는 말도 된다.
< 15절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번에는 또 다른 유비(類比)를 가지고 보충 설명을 한다. 즉 등(燈) 이야기이다.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려는 것이 목적이어서 가능한 한 그 효능을 다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밝히기를 목적으로 하는 등불을 켜 가지고 말이나 됫박 따위 그릇 밑에다 놓는 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일 것이다. 정상적으로는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서 모든 것을 비쳐 보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 16절 >
여기서 빛이라는 은유(隱喩)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말해 준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 죄인인 인간이, 즉 어두움이, 자기를 자기 힘으로 빛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은총을 입은 인간이 성령의 재창조의 능력으로 빛이 되는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빛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랑하기만 하고 골방에 처 밖아 둔다던가 무엇인가로 가려 둔다면 빛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그 혜택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촛불이 타서 자기는 없어지면서도 빛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희생하면서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빛을 반영하는 사명을 다 해야 한다.
여기서 빛이라는 은유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에서는 착한 행실(타 칼라 에르가 τὰ καλὰ ἔργα�)라는 것으로 나타냈다. 그리스도인이 어두운 세상 속에 빛처럼 작용할 구체적인 것은, 속사람의 변화, 올바른 사상과 정신 습득 , 참된 도리와 원칙의 인식 등도 꼽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그 당시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나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구두선(口頭禪)으로 듣고 또 들어 식상(食傷)할 지경이었다. 선한 말이 선한 행실로 나타나야만 그 선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한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말없이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연히 그 사람을 보면서 놀라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와 꼭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저렇게 나하고 다를까. 그 사람이 나하고 다른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구나. 예수가 그렇게 만들었구나”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발전시키려고 하신 것이고, 마태 공동체가 처하여 있던 제1세기 4/4분기의 상황에서도 이런 방법이 그 시대를 사는 가장 현명한 길이었을 것이다.
< 17절 >
5:17-20은 5:21-48에 나오는 여섯 개의 대구 antithesis 들에 대한 서론 격인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나 마태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서 유대인 일반이 가진 성경관(聖經觀)과 그리스도와 그의 사후(死後) 교회(특히 마태 공동체)가 가진 성경관은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파괴 또는 폐지(⌈카타뤼사이⌋ καταλύσα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당신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파괴하려고 혹은 폐지해 버리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성취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물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키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가장 존중하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교훈 instructions 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쓴 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전선지서(前先知書 former prophets) 4권 즉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후선지서(後先知書 latter prophets) 4 권 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12 소선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지칭(指稱)하는 방법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들” (토라 우느비임 םיאיבנו הרות)이었다. 구약 성경의 셋째 부분 즉 성문서(聖文書 크투빔 םיבותכ)가 예수님 나시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늘처럼 그 세 부분을 다 부르지 않고 “율법과 선지자들” םיאיבנו הרות이라고만 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히브리어 성경을 율법, 선지자들, 성문서 『토라 느비임 우크쿠빔⌋
םיבותכו םיאיבנ הרות라고 부른다. 그 첫 글자들을 따 가지고 “타낰” tanak ךנת라고도 한다). 눅24:44에서 구약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개는 예수께서 구약 성경을 두 부분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마 7:12; 11:13; 22:40; 눅16:16; 요1:45; 참조:행13:15; 24:14; 28:23). 바울 사도 역시 그런 식을 따르고 있다(름 3:21).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이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대로는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예수는 성경 말씀을 파괴하는 자라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 당연하였다. 시리아 지방의 유대인들이 볼 때 거기에 사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성경 말씀을 파괴하는 자라고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거나 무용지물이라고 해서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πληρώσαι .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이 될 수 있고, 또는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것이 예수 자신에게서 성취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눅 24:44에 따르면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πληρώσαι 하리라 한 말”처럼,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부분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예수는 그 말씀들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며,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함축한 말씀을 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1) 유대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고 율법주의로 흐르지만, 예수님은 그 문자들을 그대로 두시면서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을 밝혀 주시러 오셨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완성품이며 그 글자 하나 하나의 액면대로 알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성경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글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제약성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도록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당신은 사람의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초적 의미를 밝혀서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둘째로(2) 예수의 인격에 대한 문제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단적 존재로 보고 유대인의 전통을 깨는 무법자라고 판단하여 죽여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하나의 괴이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예고되어 있는 메시아로서, 예수에게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에 대한 도전이요 시정(是正)이다.
< 18절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ἀμὴν γὰρ λέγω ὑμίν). 이런 식의 표현은 예수밖에는 쓰지 않은 것으로서 랍비들의 문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아멘” ןמא 이라는 말은 원래 “확실히” certainly , “참으로” truly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누가 말을 하면 그것을 다 들은 후에 거기에 동의한다는 뜻에서 “아멘” 즉 “옳소” 하고 말하는 것이다. 들어보고 생각해 보고 나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통상적 태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려는 중대한 말씀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특이성을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것이 예수의 신성을 암시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예수는 중대한 발언을 하실 때마다 “아멘”이라는 말로 시작하셨고, 요한복음에는 “아멘 아멘”이라는 형식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아멘이 마태복음에는 30회, 마가복음에는 13회, 누가복음에는 6 회 나온다. 요한복음에는 아멘 아멘이 25회 나온다). 마태복음 저자는 5:18에서 처음으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의 형식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적대적 유대인들은 예수가 성경을 파괴하고 폐지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하고 있었고, 마태 공동체가 듣는 비난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안디옥 지방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바울의 교훈을 오해해 가지고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흘렀을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중대한 발언을 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선 여기서 율법이라고 한 것은 성경 전체를 함축한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후대의 많은 사본들이 [Θ ƒ13 565 등] “선지자들” καὶ τών προφητών 을 삽입하여 17절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었다) 율법만을 존중하고 다른 부분은 차별하시는 뜻에서 하신 말씀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글로 전해 주신 것은 그의 뜻이 인간에게 전달되어 인간에게 인식될 뿐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의 뜻을 다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글은 생각의 표현으로서 그것을 표현한 문자가 바뀌면 뜻도 자연히 바뀌게 마련이다. 고로 하나님의 뜻을 담은 글의 글자가 바뀐다던가 빠진다던가 더하여진다던가 하면 자연히 뜻도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다 성취되기 전에는 그 어느 작은 한 부분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늘과 땅이 존재하고 인간이 그 속에 살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가지신 뜻은 불변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을 기록한 성경도 결코 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나 성경이 변하지 않지만,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에 의해서 보다 충실하게 깨달아져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고, 아울러 성경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성경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경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예수는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 19절 >
18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충하고 강조하는 설명이 19절에 뒤따른다. 18절에서는 일점 일획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이란 말로 나온다. 613 조항이나 되는 많은 법조문들 중에는 안식일 법이라든가 할례에 대한 법 등 매우 중대하다고 보는 조항들이 있는 가 하면,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조항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사람마다, 지방마다 거기에 대한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보잘 것 없는 조항 하나라도 어기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법을 범하도록 가르친다면, 그가 누구인가를 불문하고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로 취급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하늘이라는 공간에 있는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피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고유명사인 ⌈야훼⌋ ה 는 물론이고 보통명사인 ⌈엘로힘⌋ םי΄ 마저도 가급적 입에 담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단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를 가리킨 것으로 알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고 이미 그 왕국에 들어 가 있는 자들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취급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반면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조항의 법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행하고 또 남을 가르쳐 그대로 지키게 하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큰 자로 취급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특히 마태 공동체를 의식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재래적인 전통을 무시하고 율법 없는 자들처럼 삶으로써 불신 유대인들의 비난을 사고 있었고, 더 나아가 방종하고 무법한 생활을 함으로 세인의 빈축을 사는 일이 있었다고 볼 때, 이 말은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들어 간 자들 중에서 누가 크고 누가 작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거나 남에게까지 잘못 가르칠 때 오는 결과를 말씀한 것이다.
< 20절 >
19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간 자들을 두고 말씀하셨지만, 이제 20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임금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세계는 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 의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것과 같아서는 안되고 그 것보다 훨씬 나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따져야 할 것은 우선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왕국과 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며, 셋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고 그보다 나은 의는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1) 6:1에 의하면 의란 구제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구제가 바로 옳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라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구제를 남이 보도록 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어 대며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보아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유대인에게 있어서 옳음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문률, 비성문률을 다 꼬박 꼬박 지켜서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판정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요 법의 하나님이셔서 모든 것이 법대로 되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사람들에게도 그 법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사람도 그 법도를 지킴으로써 의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의 왕국은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법과 뜻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의로운 자에게만 입국 허가를 주신다.
(3)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율법 조문을 지키면 의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막 10:17-22 참조). 5:21-48에 나오는 여섯 가지 대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조항들이 가지고 있는 배후의 정신을 알아서 그 정신에 맞도록 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 정신을 밝혀 주셨다. 즉 사랑의 정신이다. 풀러 Fuller 는 “사랑으로 재해석된 모세 율법 혹은 하나님의 원(原) 의도에 따라 사랑으로 해석된 모세 율법” the better righteousness is the Mosaic law reinterpreted as love or rather interpreted according to God's original intention as love 을 보다 나은 의라고 지적했다 (Reginald H. Fuller, Matthew, Harper' s Bible Commentary, p.956).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법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는 일이 필수적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켰고, 자기에게 유익하도록 율법을 고쳐 가며 지켰고, 말로는 잘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통치 세계에 명함을 드려 놓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의가 유대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은 (a) 교리적으로 보아, 행함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칭의를 받을 수 없으니, 유대인의 의는 소망이 없는 의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칭의만이 참된 소망을 준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 주시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허락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로 말한다면 justification에 해당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justification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justification을 가진다는 것이다. (b) 올바름 righteousness 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인간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나의 영적인 품격 quality 으로 그것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내적인 품격을 가진 자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정의 justice 를 행하게 된다. 품격으로서의 의로움 righteousness 이나 대인관계에서의 정의 justice 구현에 있어 유대인의 그것들보다 그리스도인이 나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δικαιοσύνη를 justification(칭의), righteousness(올바름), justice(공의)등으로 번역해 볼 때 그 어느 면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월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justification(칭의)의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 p. 71-72).
III. 사 역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어떻게 짠맛이 되살아나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므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의 있는 동네는 숨겨질 수가 없다.
15 또한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다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놓는다. 그래야 그 등불이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리하여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17 너희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없이하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그것들을 없이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
18 내가 너희에게 참 말을 하겠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다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가장 작은 계명 중의 하나를 범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면, 그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로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것을 행하고 가르치면, 이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자로 취급을 받을 것이다.
20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가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IV. 메 시 지
1.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나는 나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갑자기 내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는 것이 아니며, 갑자기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세상에 있어야 하고 옛날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과거에는 내가 소금이 아니고 빛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소금이요 빛이 됐다는 것이다. 소금과 빛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소금도 아니고 빛도 아니던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나 힘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전능자, 창조자, 하나님의 영의 창조적 역사를 통해서만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다. 우리를 소금이나 빛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소금과 빛이 됐다는 사실을 기뻐하거나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 구실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2. 소금과 빛이 된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삼으신 것은 세상(땅 earth과 세계 world)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썩고 맛이 없고 어두워서 멸망으로 치닫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취하신 조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본분과 기능을 십분 발휘해야 할 것이다.
3. 우리가 소금과 빛의 기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들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비닐 한 장이라도 음식과 소금 사이를 막는다면 효력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빛을 무엇으로든지 막으면 아무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 세상에 수많은 소금과 빛이 있건만 아직도 세상이 썩어 가고 어두움이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소금이 진짜 소금이 아니고 이름만 소금이든지, 빛이 정말 빛이 아니고 이름만 빛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무엇인가 장벽을 쌓아 세상과 통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4.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선한 일”(마5:16)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 믿고 구원 얻어 내가 복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은 소금이나 빛이라는 이름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건설적 사업을 해야 한다.
* * *
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는 신념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에 대한 태도가 같지 않아 많은 마찰과 분쟁이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예수 시대에도 있었고 사도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신약 성경 안에도 크게 두 가지 조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약의 율례를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등 긴 전통에 젖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대부분의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며 거기에 어떤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복잡한 전통이나 율법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태 공동체는 이 두 가지 조류가 소용돌이치는 교회로서 그 상황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대개의 바울 서신들은 이방인 크리스천을 대변하고 있으며,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유대인 크리스천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히1:1) 긴 세월 동안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결국 성경은 역사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기록은 매우 중요하며, 그 어느 한 부분도 결코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2)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사람은 불완전하기에 단번에 완전한 말씀을 인간에게 주실 수는 없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발전적인 계시의 기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발전하고 변하는 계시 속에서도 일관된 그리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해야 한다.
3) 성경과 예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1)성경은 예수를 예언하고 있으며 예수에게서 그 예언은 성취되었다. (2) 성경의 긴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교훈은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 참 뜻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담은 구약 성경의 모든 기록을 하나의 그릇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그 그릇 속에 있는 불변하는 보화가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가르쳤다고 말할 수 있다.
4) 예수 자신은 물론이고 유대인 일반의 중대한 관심사는 의(義)의 문제이다. 세례 베풀기를 마다하는 요한을 향하여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라고 하셨고,“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말씀하신 의(義)가 justification 이든, righteousness이든, justice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왕국과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진 것이다. 형식적이고 피상적이고 공허한 바리새적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단호한 말씀이다. 참된 의를 추구하자.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에게 그 의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의를 우리의 의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의와 바리새인의 의”
첫째주일 |
□ 마5:13-20 □
박창환 (본원장・신약학)
I. 본문의 역사적 배경
어떤 글을 막론하고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썼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근자의 대부분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마태복음 저자가 유대인이었고 그 첫 독자들은 시리아 안디옥 지방에서 A.D 80 중반에 살고 있던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였을 것이라고 한다. 유다 전쟁(Jewish War, A.D 66-70) 때 북쪽으로 피난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유대인이 많이 사는 큰 도시 안디옥에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동족인 불신(不信) 유대인들의 동족애에서 우러나오는 보살핌과 구호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그 두 그룹은 한 회당에서 같이 지낼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을 가지게 됐다. 마침내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떨어져 나와서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본국에 있을 때에도 불신 유대인들에 의해서 믿는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여러 가지로 공격과 비난을 받았었는데, 여기 피난지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 토라(율법)와 장로들의 유전을 문자대로 지키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율법도 유전도 마구 범하고 있으니 불의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2) 유대인들은 예언된 메시아를 꾸준히 기다리고 있으며 아직 메시아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자기들(불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사람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밖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동시에 내적으로는 (1)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이론을 오해하여,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극단적 생각을 하면서 무법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던 것이고 (2) 마가복음이 이미 읽혀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신앙인의 윤리 생활에 대한 가르침이 별로 없고, 구전으로 예수의 교훈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신도들의 삶을 실제로 교도(敎導)할만큼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풀러 Reginald H. Fuller 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 서설에서 마태복음 저자의 저술 목적을 간단히 아래와 같이 말한다. “마태는 그의 공동체에게 랍비적 교훈(토라=rabbinic instruction)을 대치할 만한 것을 공급하려고 글을 썼다. 즉 참 이스라엘의 창건자이시며(16:17- 19), 새롭고 보다 나은 의(義)의 메시아적 해설자로서의(5:17-20)의 예수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Harper's Bible Commentary, 1988, p. 951)
그리고 그는 마태복음을 다음과 같이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Harper's p.951).
1. 1:1-4:16 메시아 예수의 사람됨
2. 4:17-11:1 말씀과 행위의 메시아 예수
3. 11:2-16:20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제자들의 초기적 신앙
4: 16:21-20:34 예루살렘에로의 여행
5: 21:1-25:46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6: 26:1-28:20 수난과 부활
위에서 말한 것을 토대로 해서 볼 때, 오늘의 본문은 동족에게 박해와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에게,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고, 불신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와 기독교의 의를 비교하여, 참된 의가 무엇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진 그들의 의가 얼마나 우월하다는 것을 깨우치려는 것이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유혹을 받고 있는 공동체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인다.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번에 걸쳐 가르치신 교훈이 요약되어 격언(格言)조로 구전으로 혹은 단편적 문서로 전해지던 것이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서 수집되어 5장, 6장, 7장에 배열된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그 나름의 맥락이 있고, 어떤 특정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원래의 배경은 언급되지 않고, 여러 상황에서 말하여진 것들이 구슬들처럼 꿰어져 하나의 어록이 되어 있는 것이다.
II. 주 해
< 13절 >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 어전에서 쫓겨나 실낙원의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 세계의 특성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 아닌 사탄의 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되는 세상을 건설하시려는 것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본 생활 법칙, 즉 십계명을 받아서 선포하였다. 5:1-12에서는 사탄 왕국의 질서나, 낡은 이스라엘의 질서와 법 대신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법을 개진한 것이다. 세상 나라에서는 돈 있는 자, 권세 있는 자, 난폭한 자, 무자비한 자 등이 잘 살고,그런 방법으로 출세한 자들을 행복한 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8 복의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11-12절에서는 박해적 상황을 말하면서, 그런 처지를 당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야말로 행복하다고 언명하셨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13절이 나온다. 즉 마태 공동체는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동족에게서와 많은 반대자들에게서 부당한 욕을 먹고 억울하게 박해를 당하는 역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은 종말까지 악마가 적의를 가지고 해코지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어둡고 악한 세상을 포기하시거나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원하시려고 적극적인 배려를 하시고 행동으로 옮기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 사건이며 성령 사건이다. 그것을 내다보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 된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현 세상은 소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썩었고 또 썩어 가고 있다. 행복해야 할 세상에서 행복이 사라졌다. 즉 살 맛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세상을 고치고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도가 있어서 그 세상 한복판에 그리스도 공동체를 두신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냥 소금이 아니라 세상 (‘땅’ γή)의 소금이다. 즉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말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소금이라고만 생각한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조금도 세상과 격리됨이 없이 염화나트륨 NaCl 의 효능을 발휘해야 할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선 상식적으로 말해서 소금은 생선이나 육류나 부패하기 쉬운 식물에다 쳐서 부패를 방지하는 preserving 역할을 한다. 그뿐 아니라 소독하고 깨끗하게 하는 cleansing 역할도 한다. 또한 음식 맛을 나게 하는 seasoning 중요한 작용도 가지고 있다. 막 9:50에서는 소금을 치면 뻣뻣하던 것이 절여져서 누그러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배추를 소금으로 저려서 김치를 담그듯이 말이다. 자기 주장만 하고 고집스러운 인간이 소금에 저려진 배추처럼 나긋나긋한 사람이 되어, 대인관계가 부드러워져서 화평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한복판에 보내어지는 목적도 그럴 것이다.
문제는 소금이 … 그 맛을 잃게 되는 경우다. 나트륨과 염소가 합성체가 되어 NaCl이라는 물체로 있는 한 그것은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물질과 만나서 화학 반응을 일으켜 나트륨과 염소가 분해되면, 더 이상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염분을 함축한 어떤 물질을 가리키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금 같지만 사실은 순수한 소금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많이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염분이 화학 작용에 의하여 사라지면 남는 것은 소금 같지만 짠맛은 없는 물질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면서 동시에 소금과 같은 능력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소금 맛을 가지고 있어야 할 그리스도인이 맛은 없는 보통 사람이 된다면 아무리 썩은 세상, 맛없는 세상, 더러운 세상에 들어간다 해도 하등의 작용도 하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소금은 무엇에 대한 은유(隱喩 metaphor)일까? 그리고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본래 죄인이었던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했으니, 소금 아니던 자가 어떻게 갑자기 소금으로 둔갑하느냐 말이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욕심과 갖은 불의로 가득하던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사랑하는 마음,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 기쁨과 평안으로 찬 마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등을 가진 인간으로 변한다. 사랑과 진실 등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 나라의 성품이 바로 소금이라는 은유가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라는 어마어마한 작용을 통해서(엡 1:19 참조) 소금과 같은 성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맛을 잃는다”(⌈모란데⌋ μωρανθῇ)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역행이어서 이를테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해당할 것이며(막3:29), 회복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결국은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는 절망적 결론을 내렸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세상 속에서 소금과 같은 천래(天來)의 성품과 요소를 가지고 작용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역할을 하라는 것인데, 그 소중한 소금의 요소를 잃어버린다면, 존재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다. 매우 무섭고 심각한 이야기이다. 마태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는 역경 속에서도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 14절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12절의 세상은 땅(게 γή)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기의 세상은 코스모스 κόσμος 즉 세계(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금은 어떤 물건에다 치는 것이지만 빛은 공간 속에서 작용을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치 빛이 어떤 공간 속에 있음으로 인해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광명을 주는 것처럼 암흑한 세상 속에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의 죄악과 그것으로 인한 고통, 슬픔, 불안 등을 몰아내고,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어두움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본래는 어둡기만 하던 사람이 성령을 통한 재창조로 인해서 빛이라는 정 반대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냥 빛이라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상을 위한 빛이라는 사명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그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것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이어서 제자들을 작은 빛으로 만들어 그 속에 투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빛으로 재창조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다. 동네가 산 위에 있을 때 사방에서 다 잘 보이는 것처럼, 빛이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빛에다 비유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과, 그렇게 되기를 의도하셨다는 말도 된다.
< 15절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번에는 또 다른 유비(類比)를 가지고 보충 설명을 한다. 즉 등(燈) 이야기이다.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려는 것이 목적이어서 가능한 한 그 효능을 다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밝히기를 목적으로 하는 등불을 켜 가지고 말이나 됫박 따위 그릇 밑에다 놓는 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일 것이다. 정상적으로는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서 모든 것을 비쳐 보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 16절 >
여기서 빛이라는 은유(隱喩)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말해 준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 죄인인 인간이, 즉 어두움이, 자기를 자기 힘으로 빛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은총을 입은 인간이 성령의 재창조의 능력으로 빛이 되는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빛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랑하기만 하고 골방에 처 밖아 둔다던가 무엇인가로 가려 둔다면 빛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그 혜택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촛불이 타서 자기는 없어지면서도 빛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희생하면서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빛을 반영하는 사명을 다 해야 한다.
여기서 빛이라는 은유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에서는 착한 행실(타 칼라 에르가 τὰ καλὰ ἔργα�)라는 것으로 나타냈다. 그리스도인이 어두운 세상 속에 빛처럼 작용할 구체적인 것은, 속사람의 변화, 올바른 사상과 정신 습득 , 참된 도리와 원칙의 인식 등도 꼽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그 당시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나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구두선(口頭禪)으로 듣고 또 들어 식상(食傷)할 지경이었다. 선한 말이 선한 행실로 나타나야만 그 선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한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말없이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연히 그 사람을 보면서 놀라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와 꼭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저렇게 나하고 다를까. 그 사람이 나하고 다른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구나. 예수가 그렇게 만들었구나”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발전시키려고 하신 것이고, 마태 공동체가 처하여 있던 제1세기 4/4분기의 상황에서도 이런 방법이 그 시대를 사는 가장 현명한 길이었을 것이다.
< 17절 >
5:17-20은 5:21-48에 나오는 여섯 개의 대구 antithesis 들에 대한 서론 격인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나 마태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서 유대인 일반이 가진 성경관(聖經觀)과 그리스도와 그의 사후(死後) 교회(특히 마태 공동체)가 가진 성경관은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파괴 또는 폐지(⌈카타뤼사이⌋ καταλύσα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당신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파괴하려고 혹은 폐지해 버리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성취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물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키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가장 존중하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교훈 instructions 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쓴 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전선지서(前先知書 former prophets) 4권 즉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후선지서(後先知書 latter prophets) 4 권 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12 소선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지칭(指稱)하는 방법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들” (토라 우느비임 םיאיבנו הרות)이었다. 구약 성경의 셋째 부분 즉 성문서(聖文書 크투빔 םיבותכ)가 예수님 나시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늘처럼 그 세 부분을 다 부르지 않고 “율법과 선지자들” םיאיבנו הרות이라고만 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히브리어 성경을 율법, 선지자들, 성문서 『토라 느비임 우크쿠빔⌋
םיבותכו םיאיבנ הרות라고 부른다. 그 첫 글자들을 따 가지고 “타낰” tanak ךנת라고도 한다). 눅24:44에서 구약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개는 예수께서 구약 성경을 두 부분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마 7:12; 11:13; 22:40; 눅16:16; 요1:45; 참조:행13:15; 24:14; 28:23). 바울 사도 역시 그런 식을 따르고 있다(름 3:21).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이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대로는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예수는 성경 말씀을 파괴하는 자라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 당연하였다. 시리아 지방의 유대인들이 볼 때 거기에 사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성경 말씀을 파괴하는 자라고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거나 무용지물이라고 해서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πληρώσαι .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이 될 수 있고, 또는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것이 예수 자신에게서 성취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눅 24:44에 따르면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πληρώσαι 하리라 한 말”처럼,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부분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예수는 그 말씀들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며,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함축한 말씀을 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1) 유대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고 율법주의로 흐르지만, 예수님은 그 문자들을 그대로 두시면서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을 밝혀 주시러 오셨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완성품이며 그 글자 하나 하나의 액면대로 알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성경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글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제약성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도록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당신은 사람의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초적 의미를 밝혀서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둘째로(2) 예수의 인격에 대한 문제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단적 존재로 보고 유대인의 전통을 깨는 무법자라고 판단하여 죽여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하나의 괴이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예고되어 있는 메시아로서, 예수에게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에 대한 도전이요 시정(是正)이다.
< 18절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ἀμὴν γὰρ λέγω ὑμίν). 이런 식의 표현은 예수밖에는 쓰지 않은 것으로서 랍비들의 문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아멘” ןמא 이라는 말은 원래 “확실히” certainly , “참으로” truly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누가 말을 하면 그것을 다 들은 후에 거기에 동의한다는 뜻에서 “아멘” 즉 “옳소” 하고 말하는 것이다. 들어보고 생각해 보고 나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통상적 태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려는 중대한 말씀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특이성을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것이 예수의 신성을 암시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예수는 중대한 발언을 하실 때마다 “아멘”이라는 말로 시작하셨고, 요한복음에는 “아멘 아멘”이라는 형식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아멘이 마태복음에는 30회, 마가복음에는 13회, 누가복음에는 6 회 나온다. 요한복음에는 아멘 아멘이 25회 나온다). 마태복음 저자는 5:18에서 처음으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의 형식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적대적 유대인들은 예수가 성경을 파괴하고 폐지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하고 있었고, 마태 공동체가 듣는 비난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안디옥 지방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바울의 교훈을 오해해 가지고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흘렀을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중대한 발언을 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선 여기서 율법이라고 한 것은 성경 전체를 함축한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후대의 많은 사본들이 [Θ ƒ13 565 등] “선지자들” καὶ τών προφητών 을 삽입하여 17절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었다) 율법만을 존중하고 다른 부분은 차별하시는 뜻에서 하신 말씀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글로 전해 주신 것은 그의 뜻이 인간에게 전달되어 인간에게 인식될 뿐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의 뜻을 다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글은 생각의 표현으로서 그것을 표현한 문자가 바뀌면 뜻도 자연히 바뀌게 마련이다. 고로 하나님의 뜻을 담은 글의 글자가 바뀐다던가 빠진다던가 더하여진다던가 하면 자연히 뜻도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다 성취되기 전에는 그 어느 작은 한 부분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늘과 땅이 존재하고 인간이 그 속에 살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가지신 뜻은 불변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을 기록한 성경도 결코 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나 성경이 변하지 않지만,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에 의해서 보다 충실하게 깨달아져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고, 아울러 성경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성경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경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예수는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 19절 >
18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충하고 강조하는 설명이 19절에 뒤따른다. 18절에서는 일점 일획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이란 말로 나온다. 613 조항이나 되는 많은 법조문들 중에는 안식일 법이라든가 할례에 대한 법 등 매우 중대하다고 보는 조항들이 있는 가 하면,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조항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사람마다, 지방마다 거기에 대한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보잘 것 없는 조항 하나라도 어기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법을 범하도록 가르친다면, 그가 누구인가를 불문하고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로 취급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하늘이라는 공간에 있는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피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고유명사인 ⌈야훼⌋ ה 는 물론이고 보통명사인 ⌈엘로힘⌋ םי΄ 마저도 가급적 입에 담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단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를 가리킨 것으로 알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고 이미 그 왕국에 들어 가 있는 자들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취급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반면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조항의 법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행하고 또 남을 가르쳐 그대로 지키게 하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큰 자로 취급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특히 마태 공동체를 의식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재래적인 전통을 무시하고 율법 없는 자들처럼 삶으로써 불신 유대인들의 비난을 사고 있었고, 더 나아가 방종하고 무법한 생활을 함으로 세인의 빈축을 사는 일이 있었다고 볼 때, 이 말은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들어 간 자들 중에서 누가 크고 누가 작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거나 남에게까지 잘못 가르칠 때 오는 결과를 말씀한 것이다.
< 20절 >
19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간 자들을 두고 말씀하셨지만, 이제 20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임금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세계는 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 의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것과 같아서는 안되고 그 것보다 훨씬 나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따져야 할 것은 우선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왕국과 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며, 셋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고 그보다 나은 의는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1) 6:1에 의하면 의란 구제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구제가 바로 옳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라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구제를 남이 보도록 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어 대며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보아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유대인에게 있어서 옳음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문률, 비성문률을 다 꼬박 꼬박 지켜서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판정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요 법의 하나님이셔서 모든 것이 법대로 되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사람들에게도 그 법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사람도 그 법도를 지킴으로써 의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의 왕국은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법과 뜻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의로운 자에게만 입국 허가를 주신다.
(3)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율법 조문을 지키면 의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막 10:17-22 참조). 5:21-48에 나오는 여섯 가지 대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조항들이 가지고 있는 배후의 정신을 알아서 그 정신에 맞도록 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 정신을 밝혀 주셨다. 즉 사랑의 정신이다. 풀러 Fuller 는 “사랑으로 재해석된 모세 율법 혹은 하나님의 원(原) 의도에 따라 사랑으로 해석된 모세 율법” the better righteousness is the Mosaic law reinterpreted as love or rather interpreted according to God's original intention as love 을 보다 나은 의라고 지적했다 (Reginald H. Fuller, Matthew, Harper' s Bible Commentary, p.956).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법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는 일이 필수적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켰고, 자기에게 유익하도록 율법을 고쳐 가며 지켰고, 말로는 잘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통치 세계에 명함을 드려 놓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의가 유대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은 (a) 교리적으로 보아, 행함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칭의를 받을 수 없으니, 유대인의 의는 소망이 없는 의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칭의만이 참된 소망을 준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 주시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허락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로 말한다면 justification에 해당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justification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justification을 가진다는 것이다. (b) 올바름 righteousness 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인간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나의 영적인 품격 quality 으로 그것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내적인 품격을 가진 자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정의 justice 를 행하게 된다. 품격으로서의 의로움 righteousness 이나 대인관계에서의 정의 justice 구현에 있어 유대인의 그것들보다 그리스도인이 나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δικαιοσύνη를 justification(칭의), righteousness(올바름), justice(공의)등으로 번역해 볼 때 그 어느 면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월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justification(칭의)의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 p. 71-72).
III. 사 역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어떻게 짠맛이 되살아나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므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의 있는 동네는 숨겨질 수가 없다.
15 또한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다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놓는다. 그래야 그 등불이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리하여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17 너희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없이하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그것들을 없이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
18 내가 너희에게 참 말을 하겠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다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가장 작은 계명 중의 하나를 범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면, 그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로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것을 행하고 가르치면, 이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자로 취급을 받을 것이다.
20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가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IV. 메 시 지
1.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나는 나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갑자기 내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는 것이 아니며, 갑자기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세상에 있어야 하고 옛날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과거에는 내가 소금이 아니고 빛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소금이요 빛이 됐다는 것이다. 소금과 빛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소금도 아니고 빛도 아니던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나 힘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전능자, 창조자, 하나님의 영의 창조적 역사를 통해서만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다. 우리를 소금이나 빛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소금과 빛이 됐다는 사실을 기뻐하거나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 구실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2. 소금과 빛이 된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삼으신 것은 세상(땅 earth과 세계 world)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썩고 맛이 없고 어두워서 멸망으로 치닫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취하신 조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본분과 기능을 십분 발휘해야 할 것이다.
3. 우리가 소금과 빛의 기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들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비닐 한 장이라도 음식과 소금 사이를 막는다면 효력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빛을 무엇으로든지 막으면 아무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 세상에 수많은 소금과 빛이 있건만 아직도 세상이 썩어 가고 어두움이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소금이 진짜 소금이 아니고 이름만 소금이든지, 빛이 정말 빛이 아니고 이름만 빛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무엇인가 장벽을 쌓아 세상과 통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4.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선한 일”(마5:16)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 믿고 구원 얻어 내가 복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은 소금이나 빛이라는 이름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건설적 사업을 해야 한다.
* * *
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는 신념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에 대한 태도가 같지 않아 많은 마찰과 분쟁이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예수 시대에도 있었고 사도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신약 성경 안에도 크게 두 가지 조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약의 율례를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등 긴 전통에 젖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대부분의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며 거기에 어떤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복잡한 전통이나 율법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태 공동체는 이 두 가지 조류가 소용돌이치는 교회로서 그 상황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대개의 바울 서신들은 이방인 크리스천을 대변하고 있으며,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유대인 크리스천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히1:1) 긴 세월 동안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결국 성경은 역사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기록은 매우 중요하며, 그 어느 한 부분도 결코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2)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사람은 불완전하기에 단번에 완전한 말씀을 인간에게 주실 수는 없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발전적인 계시의 기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발전하고 변하는 계시 속에서도 일관된 그리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해야 한다.
3) 성경과 예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1)성경은 예수를 예언하고 있으며 예수에게서 그 예언은 성취되었다. (2) 성경의 긴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교훈은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 참 뜻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담은 구약 성경의 모든 기록을 하나의 그릇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그 그릇 속에 있는 불변하는 보화가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가르쳤다고 말할 수 있다.
4) 예수 자신은 물론이고 유대인 일반의 중대한 관심사는 의(義)의 문제이다. 세례 베풀기를 마다하는 요한을 향하여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라고 하셨고,“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말씀하신 의(義)가 justification 이든, righteousness이든, justice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왕국과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진 것이다. 형식적이고 피상적이고 공허한 바리새적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단호한 말씀이다. 참된 의를 추구하자.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에게 그 의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의를 우리의 의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의와 바리새인의 의”
첫째주일 |
□ 마5:13-20 □
박창환 (본원장・신약학)
I. 본문의 역사적 배경
어떤 글을 막론하고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썼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근자의 대부분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마태복음 저자가 유대인이었고 그 첫 독자들은 시리아 안디옥 지방에서 A.D 80 중반에 살고 있던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였을 것이라고 한다. 유다 전쟁(Jewish War, A.D 66-70) 때 북쪽으로 피난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유대인이 많이 사는 큰 도시 안디옥에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동족인 불신(不信) 유대인들의 동족애에서 우러나오는 보살핌과 구호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그 두 그룹은 한 회당에서 같이 지낼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을 가지게 됐다. 마침내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떨어져 나와서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본국에 있을 때에도 불신 유대인들에 의해서 믿는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여러 가지로 공격과 비난을 받았었는데, 여기 피난지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 토라(율법)와 장로들의 유전을 문자대로 지키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율법도 유전도 마구 범하고 있으니 불의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2) 유대인들은 예언된 메시아를 꾸준히 기다리고 있으며 아직 메시아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자기들(불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사람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밖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동시에 내적으로는 (1)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이론을 오해하여,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극단적 생각을 하면서 무법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던 것이고 (2) 마가복음이 이미 읽혀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신앙인의 윤리 생활에 대한 가르침이 별로 없고, 구전으로 예수의 교훈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신도들의 삶을 실제로 교도(敎導)할만큼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풀러 Reginald H. Fuller 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 서설에서 마태복음 저자의 저술 목적을 간단히 아래와 같이 말한다. “마태는 그의 공동체에게 랍비적 교훈(토라=rabbinic instruction)을 대치할 만한 것을 공급하려고 글을 썼다. 즉 참 이스라엘의 창건자이시며(16:17- 19), 새롭고 보다 나은 의(義)의 메시아적 해설자로서의(5:17-20)의 예수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Harper's Bible Commentary, 1988, p. 951)
그리고 그는 마태복음을 다음과 같이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Harper's p.951).
1. 1:1-4:16 메시아 예수의 사람됨
2. 4:17-11:1 말씀과 행위의 메시아 예수
3. 11:2-16:20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제자들의 초기적 신앙
4: 16:21-20:34 예루살렘에로의 여행
5: 21:1-25:46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6: 26:1-28:20 수난과 부활
위에서 말한 것을 토대로 해서 볼 때, 오늘의 본문은 동족에게 박해와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에게,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고, 불신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와 기독교의 의를 비교하여, 참된 의가 무엇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진 그들의 의가 얼마나 우월하다는 것을 깨우치려는 것이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유혹을 받고 있는 공동체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인다.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번에 걸쳐 가르치신 교훈이 요약되어 격언(格言)조로 구전으로 혹은 단편적 문서로 전해지던 것이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서 수집되어 5장, 6장, 7장에 배열된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그 나름의 맥락이 있고, 어떤 특정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원래의 배경은 언급되지 않고, 여러 상황에서 말하여진 것들이 구슬들처럼 꿰어져 하나의 어록이 되어 있는 것이다.
II. 주 해
< 13절 >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 어전에서 쫓겨나 실낙원의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 세계의 특성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 아닌 사탄의 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되는 세상을 건설하시려는 것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본 생활 법칙, 즉 십계명을 받아서 선포하였다. 5:1-12에서는 사탄 왕국의 질서나, 낡은 이스라엘의 질서와 법 대신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법을 개진한 것이다. 세상 나라에서는 돈 있는 자, 권세 있는 자, 난폭한 자, 무자비한 자 등이 잘 살고,그런 방법으로 출세한 자들을 행복한 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8 복의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11-12절에서는 박해적 상황을 말하면서, 그런 처지를 당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야말로 행복하다고 언명하셨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13절이 나온다. 즉 마태 공동체는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동족에게서와 많은 반대자들에게서 부당한 욕을 먹고 억울하게 박해를 당하는 역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은 종말까지 악마가 적의를 가지고 해코지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어둡고 악한 세상을 포기하시거나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원하시려고 적극적인 배려를 하시고 행동으로 옮기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 사건이며 성령 사건이다. 그것을 내다보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 된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현 세상은 소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썩었고 또 썩어 가고 있다. 행복해야 할 세상에서 행복이 사라졌다. 즉 살 맛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세상을 고치고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도가 있어서 그 세상 한복판에 그리스도 공동체를 두신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냥 소금이 아니라 세상 (‘땅’ γή)의 소금이다. 즉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말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소금이라고만 생각한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조금도 세상과 격리됨이 없이 염화나트륨 NaCl 의 효능을 발휘해야 할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선 상식적으로 말해서 소금은 생선이나 육류나 부패하기 쉬운 식물에다 쳐서 부패를 방지하는 preserving 역할을 한다. 그뿐 아니라 소독하고 깨끗하게 하는 cleansing 역할도 한다. 또한 음식 맛을 나게 하는 seasoning 중요한 작용도 가지고 있다. 막 9:50에서는 소금을 치면 뻣뻣하던 것이 절여져서 누그러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배추를 소금으로 저려서 김치를 담그듯이 말이다. 자기 주장만 하고 고집스러운 인간이 소금에 저려진 배추처럼 나긋나긋한 사람이 되어, 대인관계가 부드러워져서 화평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한복판에 보내어지는 목적도 그럴 것이다.
문제는 소금이 … 그 맛을 잃게 되는 경우다. 나트륨과 염소가 합성체가 되어 NaCl이라는 물체로 있는 한 그것은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물질과 만나서 화학 반응을 일으켜 나트륨과 염소가 분해되면, 더 이상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염분을 함축한 어떤 물질을 가리키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금 같지만 사실은 순수한 소금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많이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염분이 화학 작용에 의하여 사라지면 남는 것은 소금 같지만 짠맛은 없는 물질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면서 동시에 소금과 같은 능력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소금 맛을 가지고 있어야 할 그리스도인이 맛은 없는 보통 사람이 된다면 아무리 썩은 세상, 맛없는 세상, 더러운 세상에 들어간다 해도 하등의 작용도 하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소금은 무엇에 대한 은유(隱喩 metaphor)일까? 그리고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본래 죄인이었던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했으니, 소금 아니던 자가 어떻게 갑자기 소금으로 둔갑하느냐 말이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욕심과 갖은 불의로 가득하던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사랑하는 마음,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 기쁨과 평안으로 찬 마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등을 가진 인간으로 변한다. 사랑과 진실 등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 나라의 성품이 바로 소금이라는 은유가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라는 어마어마한 작용을 통해서(엡 1:19 참조) 소금과 같은 성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맛을 잃는다”(⌈모란데⌋ μωρανθῇ)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역행이어서 이를테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해당할 것이며(막3:29), 회복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결국은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는 절망적 결론을 내렸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세상 속에서 소금과 같은 천래(天來)의 성품과 요소를 가지고 작용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역할을 하라는 것인데, 그 소중한 소금의 요소를 잃어버린다면, 존재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다. 매우 무섭고 심각한 이야기이다. 마태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는 역경 속에서도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 14절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12절의 세상은 땅(게 γή)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기의 세상은 코스모스 κόσμος 즉 세계(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금은 어떤 물건에다 치는 것이지만 빛은 공간 속에서 작용을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치 빛이 어떤 공간 속에 있음으로 인해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광명을 주는 것처럼 암흑한 세상 속에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의 죄악과 그것으로 인한 고통, 슬픔, 불안 등을 몰아내고,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어두움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본래는 어둡기만 하던 사람이 성령을 통한 재창조로 인해서 빛이라는 정 반대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냥 빛이라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상을 위한 빛이라는 사명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그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것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이어서 제자들을 작은 빛으로 만들어 그 속에 투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빛으로 재창조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다. 동네가 산 위에 있을 때 사방에서 다 잘 보이는 것처럼, 빛이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빛에다 비유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과, 그렇게 되기를 의도하셨다는 말도 된다.
< 15절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번에는 또 다른 유비(類比)를 가지고 보충 설명을 한다. 즉 등(燈) 이야기이다.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려는 것이 목적이어서 가능한 한 그 효능을 다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밝히기를 목적으로 하는 등불을 켜 가지고 말이나 됫박 따위 그릇 밑에다 놓는 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일 것이다. 정상적으로는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서 모든 것을 비쳐 보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 16절 >
여기서 빛이라는 은유(隱喩)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말해 준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 죄인인 인간이, 즉 어두움이, 자기를 자기 힘으로 빛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은총을 입은 인간이 성령의 재창조의 능력으로 빛이 되는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빛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랑하기만 하고 골방에 처 밖아 둔다던가 무엇인가로 가려 둔다면 빛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그 혜택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촛불이 타서 자기는 없어지면서도 빛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희생하면서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빛을 반영하는 사명을 다 해야 한다.
여기서 빛이라는 은유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에서는 착한 행실(타 칼라 에르가 τὰ καλὰ ἔργα�)라는 것으로 나타냈다. 그리스도인이 어두운 세상 속에 빛처럼 작용할 구체적인 것은, 속사람의 변화, 올바른 사상과 정신 습득 , 참된 도리와 원칙의 인식 등도 꼽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그 당시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나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구두선(口頭禪)으로 듣고 또 들어 식상(食傷)할 지경이었다. 선한 말이 선한 행실로 나타나야만 그 선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한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말없이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연히 그 사람을 보면서 놀라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와 꼭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저렇게 나하고 다를까. 그 사람이 나하고 다른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구나. 예수가 그렇게 만들었구나”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발전시키려고 하신 것이고, 마태 공동체가 처하여 있던 제1세기 4/4분기의 상황에서도 이런 방법이 그 시대를 사는 가장 현명한 길이었을 것이다.
< 17절 >
5:17-20은 5:21-48에 나오는 여섯 개의 대구 antithesis 들에 대한 서론 격인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나 마태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서 유대인 일반이 가진 성경관(聖經觀)과 그리스도와 그의 사후(死後) 교회(특히 마태 공동체)가 가진 성경관은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파괴 또는 폐지(⌈카타뤼사이⌋ καταλύσα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당신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파괴하려고 혹은 폐지해 버리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성취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물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키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가장 존중하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교훈 instructions 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쓴 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전선지서(前先知書 former prophets) 4권 즉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후선지서(後先知書 latter prophets) 4 권 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12 소선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지칭(指稱)하는 방법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들” (토라 우느비임 םיאיבנו הרות)이었다. 구약 성경의 셋째 부분 즉 성문서(聖文書 크투빔 םיבותכ)가 예수님 나시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늘처럼 그 세 부분을 다 부르지 않고 “율법과 선지자들” םיאיבנו הרות이라고만 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히브리어 성경을 율법, 선지자들, 성문서 『토라 느비임 우크쿠빔⌋
םיבותכו םיאיבנ הרות라고 부른다. 그 첫 글자들을 따 가지고 “타낰” tanak ךנת라고도 한다). 눅24:44에서 구약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개는 예수께서 구약 성경을 두 부분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마 7:12; 11:13; 22:40; 눅16:16; 요1:45; 참조:행13:15; 24:14; 28:23). 바울 사도 역시 그런 식을 따르고 있다(름 3:21).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이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대로는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예수는 성경 말씀을 파괴하는 자라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 당연하였다. 시리아 지방의 유대인들이 볼 때 거기에 사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성경 말씀을 파괴하는 자라고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거나 무용지물이라고 해서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πληρώσαι .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이 될 수 있고, 또는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것이 예수 자신에게서 성취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눅 24:44에 따르면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πληρώσαι 하리라 한 말”처럼,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부분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예수는 그 말씀들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며,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함축한 말씀을 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1) 유대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고 율법주의로 흐르지만, 예수님은 그 문자들을 그대로 두시면서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을 밝혀 주시러 오셨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완성품이며 그 글자 하나 하나의 액면대로 알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성경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글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제약성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도록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당신은 사람의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초적 의미를 밝혀서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둘째로(2) 예수의 인격에 대한 문제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단적 존재로 보고 유대인의 전통을 깨는 무법자라고 판단하여 죽여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하나의 괴이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예고되어 있는 메시아로서, 예수에게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에 대한 도전이요 시정(是正)이다.
< 18절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ἀμὴν γὰρ λέγω ὑμίν). 이런 식의 표현은 예수밖에는 쓰지 않은 것으로서 랍비들의 문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아멘” ןמא 이라는 말은 원래 “확실히” certainly , “참으로” truly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누가 말을 하면 그것을 다 들은 후에 거기에 동의한다는 뜻에서 “아멘” 즉 “옳소” 하고 말하는 것이다. 들어보고 생각해 보고 나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통상적 태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려는 중대한 말씀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특이성을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것이 예수의 신성을 암시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예수는 중대한 발언을 하실 때마다 “아멘”이라는 말로 시작하셨고, 요한복음에는 “아멘 아멘”이라는 형식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아멘이 마태복음에는 30회, 마가복음에는 13회, 누가복음에는 6 회 나온다. 요한복음에는 아멘 아멘이 25회 나온다). 마태복음 저자는 5:18에서 처음으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의 형식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적대적 유대인들은 예수가 성경을 파괴하고 폐지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하고 있었고, 마태 공동체가 듣는 비난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안디옥 지방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바울의 교훈을 오해해 가지고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흘렀을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중대한 발언을 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선 여기서 율법이라고 한 것은 성경 전체를 함축한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후대의 많은 사본들이 [Θ ƒ13 565 등] “선지자들” καὶ τών προφητών 을 삽입하여 17절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었다) 율법만을 존중하고 다른 부분은 차별하시는 뜻에서 하신 말씀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글로 전해 주신 것은 그의 뜻이 인간에게 전달되어 인간에게 인식될 뿐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의 뜻을 다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글은 생각의 표현으로서 그것을 표현한 문자가 바뀌면 뜻도 자연히 바뀌게 마련이다. 고로 하나님의 뜻을 담은 글의 글자가 바뀐다던가 빠진다던가 더하여진다던가 하면 자연히 뜻도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다 성취되기 전에는 그 어느 작은 한 부분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늘과 땅이 존재하고 인간이 그 속에 살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가지신 뜻은 불변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을 기록한 성경도 결코 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나 성경이 변하지 않지만,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에 의해서 보다 충실하게 깨달아져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고, 아울러 성경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성경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경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예수는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 19절 >
18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충하고 강조하는 설명이 19절에 뒤따른다. 18절에서는 일점 일획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이란 말로 나온다. 613 조항이나 되는 많은 법조문들 중에는 안식일 법이라든가 할례에 대한 법 등 매우 중대하다고 보는 조항들이 있는 가 하면,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조항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사람마다, 지방마다 거기에 대한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보잘 것 없는 조항 하나라도 어기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법을 범하도록 가르친다면, 그가 누구인가를 불문하고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로 취급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하늘이라는 공간에 있는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피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고유명사인 ⌈야훼⌋ ה 는 물론이고 보통명사인 ⌈엘로힘⌋ םי΄ 마저도 가급적 입에 담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단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를 가리킨 것으로 알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고 이미 그 왕국에 들어 가 있는 자들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취급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반면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조항의 법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행하고 또 남을 가르쳐 그대로 지키게 하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큰 자로 취급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특히 마태 공동체를 의식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재래적인 전통을 무시하고 율법 없는 자들처럼 삶으로써 불신 유대인들의 비난을 사고 있었고, 더 나아가 방종하고 무법한 생활을 함으로 세인의 빈축을 사는 일이 있었다고 볼 때, 이 말은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들어 간 자들 중에서 누가 크고 누가 작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거나 남에게까지 잘못 가르칠 때 오는 결과를 말씀한 것이다.
< 20절 >
19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간 자들을 두고 말씀하셨지만, 이제 20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임금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세계는 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 의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것과 같아서는 안되고 그 것보다 훨씬 나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따져야 할 것은 우선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왕국과 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며, 셋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고 그보다 나은 의는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1) 6:1에 의하면 의란 구제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구제가 바로 옳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라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구제를 남이 보도록 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어 대며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보아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유대인에게 있어서 옳음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문률, 비성문률을 다 꼬박 꼬박 지켜서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판정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요 법의 하나님이셔서 모든 것이 법대로 되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사람들에게도 그 법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사람도 그 법도를 지킴으로써 의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의 왕국은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법과 뜻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의로운 자에게만 입국 허가를 주신다.
(3)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율법 조문을 지키면 의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막 10:17-22 참조). 5:21-48에 나오는 여섯 가지 대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조항들이 가지고 있는 배후의 정신을 알아서 그 정신에 맞도록 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 정신을 밝혀 주셨다. 즉 사랑의 정신이다. 풀러 Fuller 는 “사랑으로 재해석된 모세 율법 혹은 하나님의 원(原) 의도에 따라 사랑으로 해석된 모세 율법” the better righteousness is the Mosaic law reinterpreted as love or rather interpreted according to God's original intention as love 을 보다 나은 의라고 지적했다 (Reginald H. Fuller, Matthew, Harper' s Bible Commentary, p.956).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법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는 일이 필수적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켰고, 자기에게 유익하도록 율법을 고쳐 가며 지켰고, 말로는 잘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통치 세계에 명함을 드려 놓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의가 유대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은 (a) 교리적으로 보아, 행함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칭의를 받을 수 없으니, 유대인의 의는 소망이 없는 의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칭의만이 참된 소망을 준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 주시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허락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로 말한다면 justification에 해당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justification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justification을 가진다는 것이다. (b) 올바름 righteousness 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인간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나의 영적인 품격 quality 으로 그것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내적인 품격을 가진 자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정의 justice 를 행하게 된다. 품격으로서의 의로움 righteousness 이나 대인관계에서의 정의 justice 구현에 있어 유대인의 그것들보다 그리스도인이 나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δικαιοσύνη를 justification(칭의), righteousness(올바름), justice(공의)등으로 번역해 볼 때 그 어느 면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월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justification(칭의)의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 p. 71-72).
III. 사 역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어떻게 짠맛이 되살아나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므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의 있는 동네는 숨겨질 수가 없다.
15 또한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다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놓는다. 그래야 그 등불이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리하여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17 너희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없이하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그것들을 없이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
18 내가 너희에게 참 말을 하겠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다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가장 작은 계명 중의 하나를 범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면, 그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로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것을 행하고 가르치면, 이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자로 취급을 받을 것이다.
20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가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IV. 메 시 지
1.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나는 나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갑자기 내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는 것이 아니며, 갑자기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세상에 있어야 하고 옛날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과거에는 내가 소금이 아니고 빛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소금이요 빛이 됐다는 것이다. 소금과 빛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소금도 아니고 빛도 아니던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나 힘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전능자, 창조자, 하나님의 영의 창조적 역사를 통해서만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다. 우리를 소금이나 빛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소금과 빛이 됐다는 사실을 기뻐하거나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 구실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2. 소금과 빛이 된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삼으신 것은 세상(땅 earth과 세계 world)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썩고 맛이 없고 어두워서 멸망으로 치닫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취하신 조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본분과 기능을 십분 발휘해야 할 것이다.
3. 우리가 소금과 빛의 기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들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비닐 한 장이라도 음식과 소금 사이를 막는다면 효력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빛을 무엇으로든지 막으면 아무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 세상에 수많은 소금과 빛이 있건만 아직도 세상이 썩어 가고 어두움이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소금이 진짜 소금이 아니고 이름만 소금이든지, 빛이 정말 빛이 아니고 이름만 빛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무엇인가 장벽을 쌓아 세상과 통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4.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선한 일”(마5:16)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 믿고 구원 얻어 내가 복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은 소금이나 빛이라는 이름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건설적 사업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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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는 신념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에 대한 태도가 같지 않아 많은 마찰과 분쟁이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예수 시대에도 있었고 사도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신약 성경 안에도 크게 두 가지 조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약의 율례를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등 긴 전통에 젖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대부분의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며 거기에 어떤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복잡한 전통이나 율법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태 공동체는 이 두 가지 조류가 소용돌이치는 교회로서 그 상황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대개의 바울 서신들은 이방인 크리스천을 대변하고 있으며,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유대인 크리스천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히1:1) 긴 세월 동안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결국 성경은 역사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기록은 매우 중요하며, 그 어느 한 부분도 결코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2)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사람은 불완전하기에 단번에 완전한 말씀을 인간에게 주실 수는 없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발전적인 계시의 기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발전하고 변하는 계시 속에서도 일관된 그리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해야 한다.
3) 성경과 예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1)성경은 예수를 예언하고 있으며 예수에게서 그 예언은 성취되었다. (2) 성경의 긴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교훈은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 참 뜻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담은 구약 성경의 모든 기록을 하나의 그릇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그 그릇 속에 있는 불변하는 보화가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가르쳤다고 말할 수 있다.
4) 예수 자신은 물론이고 유대인 일반의 중대한 관심사는 의(義)의 문제이다. 세례 베풀기를 마다하는 요한을 향하여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라고 하셨고,“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말씀하신 의(義)가 justification 이든, righteousness이든, justice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왕국과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진 것이다. 형식적이고 피상적이고 공허한 바리새적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단호한 말씀이다. 참된 의를 추구하자.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에게 그 의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의를 우리의 의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