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2> 음식인가? 유흥인가? '부산의 요리점' 이야기
일제강점기 음식+유흥 접대공간 '요리옥(料理屋)' 번창…미도파, 日까지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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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옥 '요시하나' - 여주인 오규 요시오(오른쪽)와 내부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 |
- 용두산 일대 日人 거주지서
- 처음 생기며 일본 문화 전파
- 개항장 맡은 조선의 관리들
- 외국인과 교섭 장소로 이용
- 한일 병탄 이후 호기 맞으며
- '카모가와' '요시하나' 등
- 남포동서 유흥 영업 시작
- 많은 풍류아 파산 시키기도
- 이종팔, 동구에 '해신관' 개점
- 140여명 동시 회식 건물에서
- 순수 조선요리로 인기 끌며
- '日人 독점 경영' 고정관념 깨
■ 일본의 전관거류지, 요리옥의 탄생
개항 이후 부산 용두산 일대에는 일본인의 전관거류지가 설치되었다.
일본인 집단 거주지이자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이곳은 조선을 침탈하기 위한 교두보였다.
전관거류지는 정치적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일본인의 생활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중 하나가 '요리옥(料理屋)'이다.
요리옥은 '요리점', '요릿집' 등으로 불렸다.
산업화 시기 부패와 향락의 요새가 된 한국판 요정도 요리옥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요리점이 처음 생긴 곳이 바로 부산의 일본인 전관거류지였다.
개항 시기 일본 요리점을 처음으로 드나들었던 조선인은 다름 아닌 부산항 감리서에서 근무했던 관리들이었다.
■ 동경루에 간 민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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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옥 '카모가와' - 여주인 카사이 누이(오른쪽)와 외부 모습. |
개항이 되자 조선 정부는 부산과 인천 등 개항장에 감리서를 세웠다.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다대진 첨사를 지냈던 민건호(閔建鎬)도 한때 부산항 감리서에서 일했다.
민건호가 주로 하는 일은 해관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거나 일본 영사관의 일본인을 만나 교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교섭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는
음식과 유흥이었다.
이를 충족한 장소가 요리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민건호가 자신의 호를 붙여 지은 '해은일록(海隱日錄)'은 1883년부터 1914년까지의 일기다.
이 일기의 곳곳에서 민건호가 다닌 일본 요리점이 등장한다.
낭화루, 초월정, 동경루, 제일루, 팔판루, 경판정 등 많기도 많다.
이 중에서 민건호의 첫 번째 단골집을 꼽으라면 동경루(東京樓)다.
동경루는 일본 요리뿐만 아니라 서양 요리도 제공했고 일본 기생까지 출현하였다.
외국인을 폭넓게 만나는 민건호에게는 안성맞춤의 접대 공간이었다.
1892년 7월 19일 일기를 살펴보자.
"동경루에 가서 일본 기생 8명을 부르고 일본 요리를 차려서 함께 즐기었다. 이 음식상은 곧 나의 봉급이 15원
더 올랐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한턱내지 않을 수 없어서 차린 것이다. 이날 함께 지내는 데 소요된 비용이
10여 원이다."
■ 요리옥의 수완 좋은 일본인 여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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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옥 '미도파' - 미도파의 객실 모습들. |
강제적 한일 병탄이 이뤄지자 부산의 요리점은 호기를 맞는다.
요리점 숫자가 급증했고, 돈푼 꽤나 있는 사람들로 법석거렸다.
요리점에서 유흥을 맘껏 즐기다가 파산하는 풍류아도 적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부산의 요리점은 현 남포동 일대에 몰려 있었다.
미도파(美都巴), 카모가와(加茂川), 요시하나 등이 대표적 요리점이다.
이 가운데 미도파가 제일 유명한 요리점이다.
미도파는 부산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100개의 다다미가 깔릴 정도의 큰 방이 있었으므로 관청, 은행, 회사의
주요 연회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미도파를 경영한 여주인은 '쯔다 미쯔'였다.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산에 와서 '화월(花月)'이란
요정을 경영하였다.
돈을 번 미쯔는 미도파를 차렸는데, 불이 나서 망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요리점 방천각(芳千閣)의 경영권을 인수받은 이후로
점차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고, 최고의 요리점 경영주로 이름을 날렸다.
카모가와와 요시하나의 경영주도 모두 여자이다.
카모가와의 여주인 카사이 누이는 원래 나루토 요정에서 더부살이하던 일본인이었다.
천성이 싹싹하고 재치가 있는 그녀는 손님에게 금세 인기를 끌어 지배인으로 커 나갔다.
재산을 상당히 모으게 된 카사이 누이는 나루토의 경영권을 인수받아 카모카와로 이름을 바꾸어 개업하였다.
요시하나를 운영한 오규 요시오는 요염하고 화술이 뛰어난 여장부였다.
그녀는 5년간 카모가와에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나카이(仲居)였다.
하지만 카사이 누이에 버금가는 사업 수완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당당히 돈을 벌어 요시하나를 차리게 되었다.
■ 조선 맛 보이는 요리점, 해신관
일제 강점기 부산의 요리점은 대개 일본인이 경영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본의 '료리아(料理屋)'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부산에서 요리점을 운영하였다.
일본 료리아는 에도시대 말기에 탄생하였다.
이것은 술과 안주를 주로 팔았던 료리차야(料理茶屋)에서 진화했다는 설이 있다.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부터 서울에서도 일본 료리아가 성업했다.
풍류 통감으로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가 료리아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풍문이 있다.
서울과 비교하면 부산은 일본인의 영향이 훨씬 컸다.
부산에서는 일본 요리점이나 카페가 번성하였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청요리점도 장사가 잘됐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곳은 값싼 색주가나 음식점이었다.
이 와중에 조선인 이종팔이 운영하는 해신관(海信館)이 등장해 화제가 되었다.
현재 동구 좌천동에 있었던 해신관은 양옥 건물로 140명이 회식을 할 수 있는 큰 요리점이었다.
경성에서 초빙한 요리사는 순전히 조선 요리를 만들어 내놓았다.
해신관은 일본, 서양, 중국 요리가 판을 치는 다른 요리점과 차별화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해신관을 '조선 맛 보이는 우리 요리점'이라 추켜세우며
연회와 외교 접대에 이용하자고 홍보했다.
이종팔은 부산에서 영업하다가 이후 울산에서 대동원(大同圓)이란 요리점을 차렸다.
# 기생들, 가무 공연대신 몸 팔기도
- 중구 '안락정' 등 사실상 유곽…1938년 조사서 80% 성병 앓아
- 해방 이후에는 '요정' 불리며 6·25 전쟁 중에도 호황 누려
1925년 요리점의 유흥 통계를 보면, 경남에서 모두 1억 원이 넘는 유흥비가 탕진되었다.
경남의 주요 도시 가운데 부산이 최고였다.
7만6693명의 유흥객이 요리점에서 즐겼으며, 62만8362원의 유흥비를 썼다.
요리점 등에서 일하는 창기도 438명으로 부산이 제일 많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그 이유를 '부산은 육지와 바다의 교통이 편리한 것은 물론, 어부가 많은 까닭에 불경기의 시기를 극복하고 유흥으로만 소비한 것이 놀랄 만하다'고 하였다.
부산에 화류병이 만연한 까닭도 창랑 속에서 고생한 뱃사람의 정욕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당시에는 성병을 화류병(花柳病)이라 불렀다.
1938년 부산경찰서가 관내 요리점, 카페 등에서 여급과 작부로 일하는 여성 3048명에 대해 화류병 검사를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성병 보균자가 자그마치 2400명으로 80%에 달했다.
요리점은 기생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기생이 없는 요리점은 그야말로 팥소 없는 찐빵에 불과하다.
구한말 관기 제도가 해체되면서 수많은 기생이 관청 밖으로 나왔다.
일제는 그들을 기생조합, 즉 권번에 편입시켜 통제했다.
요리점은 권번의 기생이 돈을 벌 수 있는, 최고의 영업 현장이었다.
요리점에서는 부와 지위를 가진 귀빈의 연회가 펼쳐졌다.
비싼 음식뿐만 아니라 기생의 가무까지 곁들여진 유흥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요리점에도 등급이 있었다.
기생의 가무 공연이 연행되었던 일반 요리점(1종)도 있지만, 매춘이 벌어지는 특별 요리점(2종)도 있었다.
특별요리점은 유곽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일제는 유곽을 통해 성을 노골적으로 상품화하였다.
1902년 중구 부평동에서 문을 연 안락정(安樂亭)이 특별요리점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창기들은 예인(藝人)이 아니라 성을 파는 윤락녀였다.
일제는 전관거류지에 요리점, 기생집뿐만 아니라 매독병원까지 설립했다.
매독은 성병 대다수를 차지하는 골칫덩어리였다.
1925년 부산의 창기 483명 중 매독에 걸린 여성이 199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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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요리점은 '요정'으로 불렀다.
부산의 요정문화가 화제가 된 것은 6·25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이 임시수도가 된 시절이었다.
코앞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임시수도 부산의 유흥가는 환락 전쟁 중이었다.
총리를 지낸 장택상은 공무원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낮에는 다방에 다니고, 밤에는 고급 요정에 드나들었다고 회고했다.
공무원과 장병에게 요정 출입 금지령을 내렸건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이렇게 부산의 요정은 전쟁 중에도 호황을 누렸으며, 산업화 시기까지도 밤 문화를 주도하였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