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의 마지막 일정으로 마산의 양덕성당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김수근 님의 작품으로 꼭 한 번 보고싶었지요.
김수근 님이 설계하신 대표적인 작품은 88 올림픽 주경기장, 경동교회, 공간사옥 그리고 국립 청주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다음은 공간그룹에서 양덕성당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마산의 주교좌성당으로 쓰이게 된 이 성당은 한국의 문화와 풍속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한 오스트리아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단, 벽체, 지붕의 고전적 형태 요소를 가지나 그 형식은 불규칙하다. 적절한 크기로 분화된 평면도 부정형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나. 제대를 중심으로 관통하는 축에 의하여 강력한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완만한 경사로를 타면서 시작되는 동선은 세속과 경건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때로는 종교적 긴장과, 때로는 종교적 축제를 경험하게 한다.
바위산에 우뚝 솟은 '붉은 수정꽃'
경남 마산시 양덕2동에 있는 마산교구 양덕동 주교좌성당은 현대 건축의 거목 고(故) 김수근(바오로, 1931~1986)씨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모양과 느낌부터 여느 성당과 달리 예사롭지 않다. 연면적 1695㎡(513평)의 건물 아래 부분은 깨진 벽돌을 쌓아 거칠고 강한 느낌 속에 안정감을 주고, 윗부분은 붉은 벽돌로 처리해 솟은 느낌을 준다. 특히 6각 모양의 지붕과 그 주변 부정형의 보조지붕들은 마치 한 송이 꽃을 연상시킨다. 김수근씨의 말처럼 ‘바위산에 핀 수정꽃’ 같다.
성당 입구 정문을 들어서면 우뚝 솟은 붉은 성전건물과 마주치게 되지만 본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보이지 않는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나 있는 나선형의 돌담길을 따라가야 한다. 성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돌담길을 걸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건축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알루미늄 십자가가 솟아 있고 길은 왼쪽으로 꺾어지면서 본성전 정문으로 연결된다. 원래는 알루미늄 십자가 대신에 나무 십자가가 서 있었으나 비바람과 태풍에 썩어 쓰러지자 1990년 이 알루미늄 십자가로 교체했다.
성당 안은 약간 어둡고 침침한 듯 하지만 6각 지붕과 보조지붕 사이의 가늘고 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빛으로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낮 시간에도 성당을 찾아 성체조배를 하거나 기도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은 이유가 이처럼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 때문인 듯.
신자석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노출공법의 시멘트 천장과 기둥들이 이채로움을 더한다. 제대를 향해 둘러싸듯 배치된 1, 2층 신자석은 가족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단 위에 서면 신자석이 한눈에 들어오고, 신자석에서는 어디에서나 거의 사각없이 제단을 가깝게 바라볼 수 있다. 신자석은 400석 정도. 주교좌성당임을 감안한다면 좌석 수가 약간 적은 듯했다. 개방형의 2층 신자석으로 올라가면 신자석 뒷벽에 요한 묵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인과 용’을 그린 성화가 눈길을 끈다. 유리화가 최영심(빅토리아)씨 작품이다.
마산교구가 설정된 것은 1966년이지만 양덕동 주교좌성당의 역사는 이보다 더 짧다. 본당 설정일은 1975년 12월8일.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박기홍(조제프 플라츠, 현 몬시뇰) 신부는 가톨릭여성회관의 일부를 빌려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성전건립 준비에 들어갔다. 자매교구인 오스트리아 그라츠교구 소속으로 마산교구에 파견돼 나와 있던 박 신부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성전을 짓겠다는 일념에서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 주교)에게 훌륭한 건축가를 추천해줄 것을 요청했고, 마침내 건축가 김수근씨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김씨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박 신부의 설명을 듣고 성당 건축을 맡기로 했다. 박 신부는 건축 설계를 위해서 29차례나 서울과 마산을 기차로 오가면서 김수근씨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양덕성당 25년사」에서 회고하고 있다.
성당 신축을 위해 2300㎡(696평)의 성당 부지와 설계도는 마련됐지만 더 큰 문제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1억6500만원의 건축기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박 신부는 출신 교구인 그라츠 교구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했다.
본당 설립 때부터 사무장으로 재직하고 강남도(로베르토, 55)씨는 “당시 그 비용이면 보통 성당 3개를 건립할 수 있었다”면서 “그리츠교구와 교구청, 독일교회기관, 오스트리아 부인회 등의 도움 속에 신자들이 성전건립 비용을 마련했다”고 회고했다.
양덕동본당은 착공 1년 만에 성당을 완공, 1978년 11월25일 당시 교구장이었던 장병화 주교 주례로 새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성당 주변은 바위산투성이의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성당이 완공된 후 김수근씨는 ‘바위산에 핀 수정꽃’ 이라는 말로 감회를 표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건립되자 교구는 주교좌를 남성동성당에서 양덕동으로 옮기기로 하고 이듬해인 1979년 4월 양덕동성당은 주교좌성당이 됐다. 여기에는 양덕동성당 일대가 개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도 고려됐다.
양덕동성당은 이후 주교좌성당으로서 뿐 아니라 공장지대가 많았던 관할지역의 특성상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80년대 당시 주일미사 참례자가 1000여명을 훨씬 웃돌 정도로 활기찬 본당이었다. 하지만 창원시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신자들이 빠져나가고 석전·구암본당을 분리한 후에는 교세가 많이 줄어들어 현재는 미사 참례자 수가 7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최영철 주임신부는 “양덕동본당은 설립 당시에는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항상 도움을 주는 본당이었다”면서 “이 본당에서 활동하고 성장한 신자들이 새 본당으로 가서 사목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이 본당은 평신도 인재를 양성하는 본당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양덕동성당은 교회 밖에서 더욱 유명하다. 조선일보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건축 20선을 선정했는데 양덕동성당이 9번째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 유명세 덕분에 1년 내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건축과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일본 등 외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성당이 건립될 당시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양덕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상가가 밀집되면서 성당을 찾기도 어려운 지경입니다. 어디에서든 사진을 찍어도 아파트가 보입니다. 성당 내부는 녹지가 전혀 없고 잠시 쉬어갈 곳도 없어 무척 아쉬웠답니다. 하지만 성당의 형상과 구조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복잡 미묘한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감상해보시지요.
첫댓글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