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Whitefield,1714년∼1770년)또는 조지 휘트필드 신부는 영국 성공회사제이자 설교자이다. 18세기 영국 칼뱅주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애
1714년영국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존 웨슬리의 홀리 클럽 운동에 참여하였다.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1736년6월 27일 자신이 세례를 받은 글로스터 교회에서 3년간 사목을 하였다. 1739년부터 옥외 설교를 시작했는데, 당시 휫필드 신부는 감성적인 설교로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는 미국에서도 활동하였는데, 1740년 2차 미국 방문 시 조지아에 보육원을 설립하고, 순회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다. 특히 그의 노스햄프턴 교회(장로교 목사인 조너선 에드워즈 목사가 사목한 개신교회이다.)설교는 미국 개신교 부흥 운동 중 하나인 1차 대각성 운동에 영향을 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존 웨슬리 신부와 동역 관계였는데, 웨슬리 신부를 '앞으로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가면 주님 곁에 가까이 있을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하였다. 하지만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달라서 존 웨슬리 신부는 노예해방 문제에, 조지 휫필드 신부는 아동복지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존 웨슬리 신부는 성공회 신자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해방 운동을 격려하였고, 조지 휫필드 신부는 미국에서의 순회 설교 시 보육원 기금 마련을 위한 설교를 하였다.
탁월한 옥외 설교가 조지 휫필드
1. 생애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는 1714년 12월 16일 글로스터에 있는 벨이라는 여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자신은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거의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그는 행복하지 못하였고 예민한 양심은 죄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결국 그가 일하던 술집을 나와 옥스퍼드로 향하였다. 그는 18세에 옥스퍼드의 팸브록 칼리지에 근로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함으로서 그의 일생이 변화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두명의 웨슬리, 요한과 그의 동생 찰스를 알게 되었고 엄격한 생활 방식(method) 때문에 처음으로 Methodists로 불렸던 경건한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에는 신앙적으로 열심이 있는 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 벌레들', '성경꾼들', '성찬 증시자들', '형식주의자들', '홀리 클럽' 등으로 불렸다.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긴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을 실천했다. 그 모임 회원의 한 사람인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역사적인 우정을 맺게 되는 발단이 되었다. 홀리 클럽의 영향 아래서 휫필드는 그의 사고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책 한 권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사람 헨리 스쿠걸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때까지 휫필드는 '중생'의 기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선행으로서 천국의 도상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735년에 회심하여 1736년부터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1736년은 그의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해로서 6월 20일 그의 나이 21세에 글로스터의 감독 벤슨으로부터 안수를 받고 일주일 후 6월 27일에 성마리아 크립트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하였다.
8월에는 런던의 비셥스게이트에서 큰 군중을 모아 놓고 설교집회를 열었고 런던타워 예배당의 대리목사로 봉직하였다. 두 달 후 햄프셔에서 교구목사로 일하기 시작하였고 죤 웨슬리의 영향을 받아 죠지아 선교에 대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1731년 1월 브리스톨에서 첫설교를 하고 1737년 5월까지 이곳에서의 설교활동은 계속되었다. 휫필드는 광부 등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해 킹스우드 스쿨을 설립했으며, 웨일즈 장로교회로 불리는 웰쉬 칼빈적 메도디스트 교회의 지도자가되었다.
그는 1743년에 이 교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의 영향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확대되었다. 1740년 이후 휫필드가 미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1735년 제1차 대각성운동을 능가하는 제2차 대각성운동이었다. 그는 미국을 일곱차례 방문하였으며 대서양을 일곱 번이나 건너는 선교의 열정은 그가 34년간 18,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2. 휫필드 부흥운동의 특징 -위대한 설교가
휫필드의 설교의 주된 내용은 원죄와 중생이었으며,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내적인 영향을 믿었다. 그의 설교의 또다른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설교는 중생치 못한 자연인의 마음의 부패성과 신생의 필연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차이를 느끼고 결별하였는데, 웨슬리는 알미니안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하여 휫필드는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다같이 평생 영국성공회 성직자로 남아 있었다. 영국성공회는 오랫동안 청교도와 투쟁하는 동안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배격하게 되었고,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브리스톨을 떠나면서 휫필드는 웨슬리가 "예정(predestination)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논쟁을 하지말기를" 기원했다.
웨슬리는 휫필드가 바로 칼빈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예정론에 관해 "논쟁하지 말라"는 휫필드의 권고는 웨슬리로서는 따르기 힘든 권고였다. 결별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복음적 알미니우스주의와 예정론의 결별이 이뤄진 것이다. 휫필드는 1737년 런던에서 중생에 관한 일곱편으로 이뤄진 설교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중생은 외적인 고백뿐 아니라 내적인 변화요, 마음의 정결이요, 성령의 내주이고, 그러므로 신비적으로 참되고 생동감 있는 신앙에 의하여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덕목을 받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칭의와 중생을 구별하는데, 그러나 이것을 구별하려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못 박는다. 휫필드에 의하면 물세례는 결코 참된 신자의 표징이 될 수 없다. 참된 신자의 표시는 외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데에 있다. 그 내면적인 것이란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말한다. 휫필드는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가 참된 신자의 표징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란 곧 중생을 말한다.
3. 공헌
죠지 휫필드는 옥스퍼드의 "거룩한 모임"의 회원이었으며, 그의 업적은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약간 상이했다고 인정할 수 있으나 웨슬리와 병행했다. 휫필드가 기독교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가 모든 면에서 감리교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 그의 신학은-자신은 칼빈을 읽은 일이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지만-알미니우스주의자라기보다는 견실한 칼빈주의였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대 사람들은 그가 웨슬리보다도 더 설득력 있는 설교가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활동은 급기야 웰쉬-칼빈주의-감리교-교회(Welsh Calvinistic Methodist Church)를 탄생시켰다. 휫필드의 18세기의 위대한 설교가로서의 면모는 당시의 잡지였던 "신사의 잡지(The Gentleman's Magazine)" 기사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엿볼 수 있다. 기사에 의하면,
"한 사회 내에서 열등한 사람의 근면은 그 부요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휫필드 목사와 같은 사람이 5,6천 명의 대중으로부터 매일의 노동을 그의 설교로 앗아간다면 적은 시간이지만 그 사회에 가져오는 손해는 얼마나 큰 것인가! 내 견해로는 만일 이 신사가 킹스우드의 광부들에게 자진해서 설교를 시작한 것처럼 여기서도 계속 설교를 해 나간다면 브리스톨 시 근방에서 얼마만큼의 석탄 가 폭등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은 그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평일이나 주일이나 그가 전도하는 곳의 교회는 청중이 빽빽이 들어 찼고 굉장한 평판을 낳곤 하였다. 명백한 사실은 참으로 웅변을 잘하고 즉석에서 아무 준비 없이 설교를 하는 전도자가 순수한 복음을 보기 드문 목소리와 훌륭한 몸짓으로 전하는 것인데, 그 때 런던에서는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의 청중들은 놀라고 황홀해진 나머지 넋을 잃었다. 1739년부터 1770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31년 동안 그는 오직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었으며, 항상 주 예수의 일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휘필드는 웨슬리의 정확한 논리성과 비상한 행정력, 그리고 깊고도 강인한 성품이 결여되었으며, 웨슬리는 그보다 좀 느리기는 하지만 더욱 확고한 편이었다.
휫필드는 보다 신속하고 열렬하였으며 충동적이지만 그러나 웨슬리와 같은 종교적인 심원함을 소유하였으며, 더욱이 그는 웨슬리가 알지 못할 정력적인 영역에서 살았다. 거기에 첨가하여 그는 웨슬리로서는 당할 수 없는 웅변가였다. 그는 그의 일생에 걸친 설교사역에서 엡 2장 8절의 말씀을 주제로 삼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개혁자의 신앙을 이어받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에 진력한 휫필드의 삶은 굳어진 18세기 교회의 문을 부수고 무뎌진 명목상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감격하였고, 내면적 부흥운동의 큰 줄기로서 그들을 중생의 길로 인도하였다.
2)조지 휘트필드의 무덤
성공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는조지윗필드신부가 아니었을까생각한다. 후에감리교의 창시까지
이르게되는18세기부흥운동의 지도자는 존웨슬리신부였지만, 부흥운동을 먼저일으킨 사람은 윗필드였고
역사가들은 설교가로서는 윗필드가 더 인정받았다고 말한다.
윗필드는 옥스포드대학시절 웨슬리가 만든신성클럽(Holy Club)에 들어감으로 후에 웨슬리형제와 같이
부흥운동의 주역이 된다. 존웨슬리신부가 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윗필드는 서품을 받고 (1736)
바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는데 설교를 할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말씀을 듣게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흥 운동의 시작이었다. 존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교회에서 회심을 하고 능력으로 설교를
시작하기 2년전의 일이었다. 노방 설교를 먼저 시작한 것도 윗필드였다. 그는 여러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했는데 이러한 그의 방법을 싫어하거나 그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 성직자들이 그에게 교회를
개방하지 않자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있는 다른 장소를 찾아 설교를 하기 시작한것이다.
지금은 이런일이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고 전환이었다. 웨슬리는 그의일기에서 윗필드가
이렇게 설교하는 모습을 보았을때 얼만큼 놀랐는지를 묘사하고있다. 그러나, 웨슬리도 윗필드의 방법을
따라하기 시작했고 뒤에 신성클럽의 많은 설교가들이 계속 순회설교를 하면서 영국과 미국에
대부흥이일어난것이다.
윗필드는 웨슬리를 좋아했지만 결국 신성 클럽을 떠나게된다. 예정론에 있어서 웨슬리가 캘빈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해서 신성클럽회원들이 캘빈주의를 따르지 못하게했기때문이다. 윗필드는 캘빈주의를
믿었기때문에 웨슬리와 길은 달리할수 밖에없었다.
윗필드는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배로 몇달씩 항해해서만 대서양을 건널수 있던시절에
미국(당시에는영국의식민지)을 일곱번이나 방문한것만을 봐도 그의 열정을 짐작할수있다.
그는 결국 미국에서 5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는데 그의 무덤은 매사추세츠주의 뉴베리포트제일장로교회의
지하실에 있다. 신학교 시절 나와 친한 친구였던 랍존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이다.
그의 죽음과 무덤은 그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고있다.
첫째, 그의 무덤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 사람인 그가 죽음의 순간까지 미국에서 선교를 했다는
사실은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둘째, 그의 무덤이 장로교회에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주의할만한것은 그 교회가 윗필드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라는점이다. 그는 분명히 성공회 사제였고 성공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교단과도 같이 일했던것이다.
셋째, 그는 자신의 장례예배에서 존웨슬리가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죽었다는점이다.
윗필드는 웨슬리의 완고한 태도때문에 신성 클럽을 떠났지만 웨슬리를 원망하지않고 죽을때까지 그를
존경했던것이다. 그것은 웨슬리도 마찬가지였다. 윗필드가 죽었을때 웨슬리는 영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영국에서 그의 장례 설교를 하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우리에게는 그의 사역을 이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유용하게
쓰일사람은없습니다.”
교단과신학의차이를넘어서선교의열정으로주님의말씀을전포하는모습. 그것이윗필드의무덤에서
우리가배워야할것이아닐까?
3) 죠지 휘트필드의 구원간증
죠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죤 웨슬리(John Wesley) 등과 함께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말씀의 불꽃으로 한 시대를 불태운 당대 최고의 설교자였습니다. 휘트필드의 사역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대각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중부지방에 위치한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불행한 편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 결과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잘 받지 못하다가 12살이 되어서야 교회 부설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5살 때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를 돕기 위해 약 1년 반 정도 학업을 중단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여인숙 급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 4살 때에 홍역을 앓다가 간호사의 실수로 인해 생긴 흉 때문에 사팔뜨기처럼 보여서 별명이 “사팔뜨기”가 되기도 한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8세에는 식비와 수업료를 면제받는 대신에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1732년). 당시 근로 장학생은 부유층 자제들의 방청소와 심부름 등 시중을 들면서 공부하는 조건이었으므로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이 옥스퍼드 시절이야말로 바로 그가 거듭남을 경험한 소중한 때였습니다. 그는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여인숙에서 일을 마친 후에는 늘 성경을 읽었습니다”고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은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영적인 부분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성경 외에도 “켄의 윈체스터 학자들에 대한 안내서(Ken's Manual for Wincester Scholars)"라는 책과 윌리엄 로(William Law)가 쓴 ”경건한 삶에로의 진지한 부르심(Serious Call to Devout Life)"이었습니다. 그 외에 그는 많은 청교도들의 책을 포함해서 고전들과 전기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그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휘트필드는 청소년기에 죄에 대해 심각한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때 종종 어머니의 돈을 훔치면서도 그것을 하찮게 여겼고, 거짓말이나 욕설, 저주의 말, 어리석은 농담 등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휘트필드는 “어린 시절의 범죄와 죄악들은 셀 수 없어서 그것들은 내 머리털보다 더 많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나는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고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내 마음 속에 없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강했지만 동시에 죄를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죄에 대한 심각한 갈등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기도와 금식으로 수많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그가 옥스퍼드로 진학한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그가 거듭남을 경험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 가운데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고민 없이 죄사함의 경험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면서 온갖 굴욕적인 상황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는 근면한 자세를 가지고 성실하게 대학시절을 보냈고 글로스터에서처럼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죤 웨슬리, 챨스 웨슬리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던 “홀리 클럽(Holy Club)"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철저한 자기훈련으로 경건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선행과 경건생활이 자신들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휘트필드 자신도 이러한 경건의 훈련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는 수단이 될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거듭남”이라고 되어 있는 바로 그 경험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죄 문제와 갈등하면서 참 자유를 추구해 온 그에게 마침내 진리의 빛이 임한 것입니다. 어느 날 챨스 웨슬리가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이란 책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책은 휘트필드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허물고 거듭남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는 책을 접하고 난 뒤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듭나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나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성찬에 참여할지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이 책을 태워버릴까? 던져 버릴까? 아니면 그것을 한번 추구해 볼까? 나는 그 책을 계속 읽었고, 그 책을 손에 들고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제가 마지막에 멸망당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제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소서!.....나는 금식을 해왔고 철야도 했으며, 기도와 성례참여 등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친구를 통해서 그토록 귀한 책을 나에게 보내 주시기 전까지 나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몇 줄 더 읽어나가는 동안에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거룩한 광선이 내 영혼 위에 비쳤고, 그때야 비로소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종교적인 경건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깨뜨리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로 하여금 기독교 내에서의 종교생활과 경건, 선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며 이러한 삶을 철저히 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거듭남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휘트필드는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은 자기 부인과 불타는 경건을 통해 오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자 그는 홀리 클럽과의 관계를 끊고 간단한 빵과 차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간절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의 쇠잔함과 정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정으로 계속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휘트필드는 1735년 어느 날 로마서 8:15-16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휘트필드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양자의 영(롬8:15)"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날 비추어주시는 은혜의 빛을 통해 휘트필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이렇게 간증합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면서(은혜를 갈망하면서) 침대에 몸을 던졌습니다. 잠시 후에 곧바로 나는 나를 매우 심하게 억압하고 있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탄식하는 영께서 나를 취하셨고 나는 내 구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가는 곳마다 시편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내 기쁨은 점점 나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따라서 나의 탄식하던 날이 종결되었습니다.
휘트필드의 거듭남의 체험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체험한 거듭남은 그의 영적생활과 사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평생 동안 그의 수많은 설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잊을 수 없는 이 거듭남의 체험에 대하여 평생 동안 증거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던 그 날을 회고하면서 휘트필드는 "그 기쁨은 마치 강둑에서 범람하는 홍수와 같아서 말로 형언할 수 없었으며, 그 날은 영원히 기억될 날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휘트필드는 거듭남을 체험하고 그 놀라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나는 내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사실을 알렸고 내 방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도 그 일을 말했습니다”고 했습니다(윗 글의 대부분의 자료는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휘트필드(송삼용 저, 생명의 말씀사, 1998)”에서 발췌한 것임).
위에서 보았듯이 휘트필드는 어느 누구보다 경건한 삶을 훈련하며 살았지만, 이러한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거듭남을 경험해야한다는 도전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영혼의 괴로움 가운데 기도하며 간절히 거듭남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셨고, 그가 모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로마서 8:15-16 말씀을 통해 거듭남의 선물을 은혜로 베푸셨습니다.
이 거듭남은 휘트필드처럼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입니다. 즉,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가 아무리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경건하다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자신의 경건함이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하고 연약한 죄인인지 올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휘트필드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시고, 자신을 구원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분명한 거듭남을 경험했습니까?
4)무릎으로 산 위대한 그리스도인 조지 휘트필드
조지 휘트필드는 18세기 영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고, 칼뱅주의 부흥을 이끌었던 주인공이며, 바울 사도 이후 가장 위대한 전도자, 설교자로 불리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할 당시 홀리 클럽 활동을 통해 웨슬리 형제와 친목을 다졌고 보다 진지하게 거룩한 신앙의 삶을 꿈꾸게 되었다. 1735년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그는 졸업 후 고향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1736년 그가 외쳤던 첫 설교는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적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로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복음에 대한 변하지 않는 열정을 안고 하루에 서너 번씩 설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포함하여 영국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설교를 하였고, 7차례나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뜨거운 영성에 기초한 그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얼마나 잘 들추어냈던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영혼의 고뇌를 느끼지 않는 이는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거듭나야 한다."는 그의 피맺힌 외침은 수많은 심령들을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돌이켰고 결국 미국 대각성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도 했다.
조지 휘트필드는 자신의 삶에서도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는데, 하루를 식사와 수면 8시간, 기도, 방문, 교리 공부를 위한 8시간, 연구와 묵상을 위한 8시간으로 세 등분해서 사용할 정도로 철저하였다. 그가 매일 밤 점검했던 목록을 보면 얼마나 빈큼없이 자기를 관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