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 동생, 배다른 자매 <4>
민정이의 언니 강선희, 애인의 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
나로서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뜬금없이 동생의 남자친구인 나를 만나고 싶어 하다니 대체 무슨 영문일까. 그렇다고 전화상으로 이유를 따져 묻기는 어려웠기에 일단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논현동의 특급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로 향하며 나는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어쨌든 사귀고 있는 애인의 가족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셈이었다. 민정이네 집에서 본, 거실에 걸려 있던 그녀의 가족사진이 기억났다 - 그 사진 속 민정이의 언니는 연예인 뺨칠 만한 미모의 소유자였었다.
그래서 나는 호텔 커피숍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아예 입구로 들어서기도 전에 누가 그녀인지 알아챘을 정도였다. 단순히 그녀가 예쁘게 생긴 아가씨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글쎄다. 가령 사람들 중에는 수십 미터 밖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타입이 있다. 이를테면 길거리에서 흘끗 지나쳤을 뿐인데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되는 식의. 그녀는 바로 그런 여자였다.
내 이름도 전화번호도 이미 알고 있었다지만, 얼굴만은 몰라서인지 그녀는 내가 다가가는 동안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시, 실례합니다. 강선희 씨인가요?”
나를 쳐다본 그녀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제가 한창희입니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은 나는 어쩐지 주눅이 들 것만 같았다. 언젠가 민정이는 자기보다 언니가 훨씬 예쁘다고 했었는데,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옅은 화장에 감색 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인데도 명품을 걸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만 사진 속의 그녀는 긴 생머리였으나, 지금은 어깨에도 닿지 않게 짤막한 머리채를 한쪽으로 가지런히 늘어뜨렸다는 점만이 달랐다. 아무튼 그녀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과 단둘이 마주하고 있자니 당장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여야만 했다.
“처음 얼굴을 뵙는 거라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제가 민정이 언니인 걸 알아보기 힘들지 않으셨나요?”
그녀가 다시금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자신과 민정이가 배다른 자매라는 걸 염두에 둔 말인 듯했다.
“아, 아니요. 실은 전에 사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사진이요?”
아차차. 그녀의 사진을 본 것은 그녀의 집에서였고, 민정이가 나를 집으로 몰래 끌어들인 적이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비밀이었다. 다행히 웨이트리스가 때마침 주문을 받으러 왔다. 커피를 시킨 나는 서둘러 말꼬리를 돌렸다.
“그나저나 죄송하지만, 갑자기 어째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
솔직하게 말하자.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지금껏 민정이의 불평을 들은 게 전부다. 사사건건 간섭이다, 날마다 잔소리다…. 그러니 나로서는 일종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배다른 자매이긴 해도 민정이 또한 한 까탈 하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동생과 달리 그다지 도도하거나 쌀쌀맞은 인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인지 그녀는 꽤 지적이고 차분한 외모였다. 한데 웬일인지 그녀는 한참이나 물끄러미 내 얼굴만 응시하고 있었다.
“글쎄요. 그냥 한 번쯤 뵙고 싶어서요.”
“네…?”
“민정이가 사귀는 남자라고 하길래, 어떤 분인지 궁금했거든요.”
나는 떨떠름히 눈을 껌벅였다. 나를 불러낸 이유가 고작 어떤 놈인지 보고 싶어서였다? 그녀가 되물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민정이 대학교 선배시고,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서 혼자 자취를 하신다죠?”
나는 점점 더 의아해졌다. 무슨 인적사항 조사를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민정이의 학교 선배냐는 말은, 마치 내가 일류대학을 나오지 못했다고 일부러 지적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그때였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까닥이며 양해를 구하더니 핸드백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눈썹을 찡그린 채 전화기 화면을 들여다본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응. 나야.”
상대방의 음성이 제법 컸기에 왕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왜 그래? 내가 그러겠다고 얘기했잖아.”
그녀가 넌지시 나를 흘끔거렸다. 그녀의 전화기 너머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가 어디냐고?”
나를 만나고 나서 다른 약속이라도 있는 걸까. 호텔 이름을 댄 그녀가 전화를 끊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물었다.
“방금 전 그 얘기는 무슨 뜻입니까?”
“어떤 것 말씀이시죠?”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 말입니다. 선희 씨의 그 말씀은, 마치 제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작게 움찔거렸다.
“제 얘기가 기분 나쁘셨나요?”
“솔직히 조금 그렇군요.”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동갑의 나이였다. 그녀의 동생과 교제 중이라고 딱히 당당하지 못할 까닭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창희 씨께서는….”
그녀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창희 씨는, 저희 집이 어떤 집안인지 알고 계신가요?”
제기랄. 그녀의 집안은 부잣집이고, 나는 별 볼일 없는 집안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
“네, 압니다.”
“그럼 제가 하나만 더 여쭤 봐도 될까요?”
내가 뭐라 대꾸하지 않자 그녀가 말했다.
“얼마 전에 민정이가 집을 나갔을 때, 창희 씨가 걔랑 함께 있으셨나요?”
순간 나는 흠칫 당황하고 말았다. 민정이가 사흘간 우리 집에서 나와 동거했던 사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머릿속으로 가물가물해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언 반년 전이 돼 버린, 신입사원 환영 회식이 끝나고 난생처음 민정이를 집에 바래다줬을 때 - 나는 그녀의 지갑에서 콘돔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기겁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민정이는 그게 선희 언니가 마지막 에티켓이라며 준 물건이라고 했다.
맙소사. 나는 형밖에 없는 놈이다. 설마 자매끼리는 그런 얘기까지 서슴없이 나눈다는 걸까.
나는 아니라고 잡아떼지조차 못했다. 그녀는 의외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민정이랑 둘이서 무슨 짓을 하셨죠? 제 동생과 섹스도 했나요? 그렇게 추궁당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민정이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네요. 무엇 때문에 한창희 씨와 사귀게 됐는지.”
그녀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내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덩달아 어깨 너머를 돌아본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가 커피숍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서고 있었다.
민정이였다.
*******
그제야 나는 선희 씨가 조금 전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민정이가 씩씩대는 얼굴로 우리를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벌써 왔니?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꽤 빠르네?”
선희 씨가 동생을 보며 말했다.
“나쁜 기지배! 너 정말 이럴 거야?”
민정이의 첫마디는 욕에 가까운 반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는 아랑곳없이 빙글거리는 표정이었다.
“진정하고 앉기나 해, 강민정.”
“웃기지 마.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나랑 약속까지 해 놓구선!”
“마음이 바뀌었어. 내가 뭘 하건 너한테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는 건 아니잖니.”
나는 두 자매 사이에 낀 채 어안이 벙벙해졌다. 뭘 약속하고 뭘 허락받는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오가고 있었다. 민정이의 새된 목소리에 커피숍 안의 손님들이 우리를 흘끔거렸다. 모두들 멱살잡이라도 할 것 같은 예쁘장한 그녀들에게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그, 그래. 일단 앉아. 민정아.”
내가 말리는데도 민정이는 연달아 언니에게 쏘아붙였다.
“말해! 오빠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아무것도 말 안 했어.”
“정말이야? 진짜 아무 얘기도 안 했어?”
그래, 라고 선희 씨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말하기도 전에 니가 왔는데 뭘. 그냥 나 먼저 일어날게.”
두 아가씨가 마주 선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덕분에 그녀들의 겉모습이 묘하게 대비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치렁치렁한 웨이브 머리채에 베이지색 정장치마를 입고 있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짧게 커트한 머릿결에 감색 바지정장 차림이었다. 민정이가 미니스커트 아래로 각선미를 훤히 드러낸 덕분인지, 선희 씨 쪽이 동생에 비해 약간 작아 보이는 키였다. 그래도 민정이가 워낙 후리후리한 몸매였으니 언니인 그녀 역시 상당히 늘씬한 편이었다.
민정이의 가족사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녀와 선희 씨가 전혀 다르게 생겼다고 여겼었다. 물론 각자 따로따로 재혼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맺어진 자매였으니 그녀들은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관계다. 그럼에도 웬일인지 두 여자가 묘하게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민정이가 내 팔뚝을 와락 붙들며 말했다.
“아니, 관둬. 우리가 갈 거야.”
“미, 민정아….”
“아이 참. 안 들려요, 오빠? 여기 있지 말고 나가자구요!”
결국 나는 민정이에게 억지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희 씨는 그런 우리를 무덤덤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민정이는 호텔을 빠져나오자마자 내 팔을 놓은 채 혼자서 무작정 걷고 있었다. 그녀의 하이힐이 보도블록을 부술 것처럼 또각또각거렸다. 나는 수십 미터를 뛰다시피 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녀를 따라잡았다.
“왜 이래, 강민정? 잠깐 좀 기다려 봐!”
민정이가 홱 몸을 돌린 채 소리쳤다.
“저 빨랑 들어가야 해요.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오빠! 저희 언니가 뭐라고 했건 절대로 듣지도, 믿지도 마세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튼 오빠는 무조건 제 말대로 하셔야 돼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셨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에게 되물었다.
“설마 민정이 너….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거야?”
“사고라뇨?”
“그렇잖아. 아무리 그래도 선희 씨는 니 언니야. 언니한테 그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너 제정신이야?”
민정이가 어이없다는 양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나는 뭔가가 잘못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오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째서 나한테만….”
그녀가 울먹였다. 그녀의 뺨으로 주르륵,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뜻밖의 상황에 멍하니 넋을 잃어야 했다.
“좋아요. 다 필요 없어요. 저도 이제부턴 제 맘대로 할 거예요!”
울음을 참는 듯 손으로 입을 막은 민정이가 다짜고짜 차도로 뛰어들었다. 민정아, 허둥지둥 불러 세웠지만 그녀는 어느새 빈 택시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렸다
덧글 달고가 앙~
첫댓글 점점 기대됩니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