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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05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천주교에서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던 중,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당에서 판매하는 면죄부를 구입하면, 연옥에 있는 조상들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간다고 광고했고, 성도들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판매는, 엄연하게 성경에 위배되는 사항입니다. 그래서, 성직자이며,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마틴 루터가 이러한 천주교의 행위에 대해, 95개 사항을 들어 반박함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했기에, 이러한 천주교의 행위를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로 인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5개의 구호를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종교개혁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며, 더욱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다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외치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삶의 증거가 됩니다. 본문인 시 102편은 “고난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되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 도움의 대상은 가족일 수도 있고, 주변의 지인이나 환경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우리의 바램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자리에 놓이기도 합니다. 이때, 모든 것을 멈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찬 373장 “고요한 바다로”의 가사 2절을 보시면,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라고 합니다. 또, 시 119: 71을 보시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시 102편은,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에서 자신의 근심을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모두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시인은, 오늘을 사는 우리보다 더 어렵고 극한 삶을 살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했습니다. 그랬기에, 이방에 끌려가서 영원히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며,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므로, 시 102편의 기도는, 기록될 당시의 이스라엘만의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도 이와 같이, 삶 속에서 역경을 만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은, 눈물이 마르지 않기도 하고,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을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문 속의 이스라엘과 시인을 지키고,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신 것처럼,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된 우리의 믿음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합니다. 성도는 삶의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시인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자신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하여 주시길 간곡히 간청합니다. 그래서, 본문 앞의 1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라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아픔을 본문 뒤의 5절에서는,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라며, 더욱 강하고, 느낌있게 부르짖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몸과 마음이 장작불의 뜨거움에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의 삶이 밤하늘에 퍼지며,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와도 같음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은 이러한 애끓는 듯한 외침 속에서 식음도 폐했기에, 뜨거운 태양 아래서 쇠잔한 마른 풀과도 같이,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을 다시 보시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한 그의 간절한 소망 속에서 간청하는 것을 “괴로운 날”과 “부르짖는 날”로 나누어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괴로움의 정도에 정비례하여 그의 부르짖음의 강도를 달리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그의 신앙이 매우 성숙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겪는 고난의 날도, 시인과 같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본문의 시인처럼 고난의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사 58: 9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합니다. 이 언약을 붙잡고, 앞서 간 믿음의 선조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들을 보면,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도 그랬고, 욥이나 히스기야,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또, 시작에서 말씀드린 마틴 루터가 그랬습니다. 그들 모두 이렇게, 자신이 겪는 삶의 어려움과 고통을 해결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된 우리의 믿음생활입니다. 코로나 19가 시작할 때, 대부분의 성도들은 코로나 19로부터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시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길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성도들은 주변의 흐름을 앞세워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회피했고, 교회의 예배참여에 강하게 반박했고, 불만을 토로하며,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아픔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일을 잊지 말고, 우리 자신의 믿음에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가 계속 녹는 가운데, 일부 학자들은, 빙하 속에 있던 세균들이 다시 번식함으로, 앞으로는 코로나 19보다 더한 일들이 지구를 뒤덮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교회에 모여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됨으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능력이며, 성도의 힘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시인처럼 하나님께,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라며, 더욱 뜨겁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삶의 괴로움 속에서 그것을 피할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라면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기도무용론을 말하며, 과학만을 의존하고, 논리만을 의지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마쳐야 하며, 예배당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인처럼,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면, 결코,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심을 미루어, 예배당을 떠나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심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보시고, 듣고 계신다는 것을 성도된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완전히 해결됨을 믿고, 우리는 간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약 400년간 종살이 할 때도, 또, 바벨론의 포로로 70년을 지낼 때도, 그들이 겪는 고통은 도무지 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결국,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심으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받고, 치유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라고 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자는 외로움 가운데 있기에, 하나님의 얼굴을 더욱 구해야 합니다.
본문 앞의 6절을 보시면,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라고 합니다. 시인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을 광야의 올빼미와 같다고 합니다. 또, 본문에서는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와 같다고 합니다. 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말합니다. 삶 속에서 고통 속에 있어보셨습니까? 그 때, 곁에 누가 있던가요? 또, 무엇이 위로가 되던가요?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 고통이 심할수록 위로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고통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수록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본문 아래의 8절과도 같습니다. 보시면,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과학적 논리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면, 일부의 성도들이나 비 기독교인들은 이구동성으로 8절과도 같이 우리 곁에 있게 됩니다. 이때,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으시구나”라는,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내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비관적 사고만 굳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하는 가운데, 많은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후 12: 7절을 보시면, 그에게는 치료되지 않는 안질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 안질의 치료에 대해서만 집중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비관만 있었을 겁니다. 또, 욥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친구들이 그를 공격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료하지 않으셨기에, 그도 비관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나 욥이나 그들 모두는,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마 28: 20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주변의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음과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확신한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붙잡아야 합니다. 또, 마 1: 23을 보시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의지하여 본문의 시인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더욱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를 지키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모든 인생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우리 각 개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절에서 깨어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까? 이 모든 것은, 과학이 증명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 확신합니까?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시인의 믿음이 이러하기에,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고백하며, 본 시편의 끝절인 26 - 28을 보시면,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고, 내가 애써서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서 믿음에 대해 비관만 든다면, 이 때, 더욱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무궁하신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여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복과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