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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기독교 신자였다가 회의를 느끼고 불교의 무아,무상, 사성제, 팔정도에 감명을 받았고 앞으로는 불교를 나침반으로 삼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걸림돌이 절문화가 익숙치 않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습니다. (화려한 불상, 염불, 소원성취 기도문 작성, 제사문화 등) 1. 절을 다니지 않고도 신행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2. 그리고 어떤 스님들 유투브 법문을 들으면 불교가 아니더라도, 서양 영성가들이 불교와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거기에도 불성과 진리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것이 맞는 말인가요?
스님들 법문이 다 다르게 들려서 헷갈리고, 어떻게 앞으로 불교를 믿고 생활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초보 불자로서 앞으로의 신앙 생활을 하면 좋을지 조언 부탁드려요. 혹시 교수님 앞으로 불교입문 등 강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꼭 공지로 알려주셔요 (.)
답변입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그 소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진리 그대로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현생에 고려대학에 다니면서 교칙을 잘 지키면 내생에 어느 하늘에 태어나고, 서울대학 다니면서 잘 순응하면 내생에 다른 어느 하늘에 태어나고, 연세대학 다니면서 제 때에 졸업하면 내생에 제3의 어느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치 않는 일이듯이 개신교 교회를 다니거나 가톨릭 성당에 다니거나 불교의 절에 다닌다고 해서 내생이 서로 달라질 리가 없습니다. 종교생활 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종교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를 통해 변화하는 나의 마음과 통찰력 그리고 나의 행동입니다.
소속은 개신교나 가톨릭 등 기독교 교단이지만, 그 생각과 행동은 반-기독교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소속은 불교이고 자신이 불자라고 자부하지만 그 생각과 지향점, 행동은 반-불교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교가 독특한 점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그 수행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세상과 마음의 작동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죽음 이후 내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상상실험을 통해 누구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생명의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입니다.
질문에서 "불교의 무아,무상, 사성제, 팔정도에 감명을 받았"다고 쓰셨는데, 세상이든 마음이든 모든 것이 무상하고 무아이기에 세속 생활에서든 종교생활에서든 '꼭 부여잡고 있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아무리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상태가 지속되면 고통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잠자리에서 그 어떤 자세로 누워도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자는 이유는 '안락함 그대로 고통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숨을 쉴 때에도 '들이쉰 상쾌함'이 조금 지나면 그대로 고통으로 변하기에 내쉬게 되고, '내쉰 개운함'이 조금 지나면 그대로 고통으로 변하기에 다시 들이쉬게 됩니다. 시시각각 안락이 고통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고통은 그대로 고통이지만, 안락과 쾌락도 궁극적으로 고통입니다. 사성제에서 가르치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고성제(苦聖諦)의 진리입니다.
내가 죽은 후 내생에 하늘나라에 태어나든,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든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상상실험을 통해 하늘나라의 무상함을 자각하면, 하늘나라를 포함한 생명의 세계에서 그 어떤 곳도 영원한 행복의 장소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진심으로 열반을 지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불교는 '발견된 진리'입니다. 질문의 제목을 "불교 외에도 진리가 있나요?"라고 쓰셨는데, 생명과 세상의 작동 방식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발견된 진리가 불교이기에, 그 종교적 소속이 어디든, 인종이나 성별이나 나이와 무관하게 누구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경우 불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절을 다니지 않고도 신행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셨는데,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절을 다니는데도 그 마음과 행동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은 분도 적지 않습니다. 또 절에서 법문이나 강의를 듣는 경우도 혹시 법문이나 강의를 하는 분이, 불교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잘못 가르치거나 지도할 경우 혼란만 심해질 수 있습니다.
탐욕(탐), 분노(진), 교만(만), 종교적 어리석음(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 신행의 목표이기에 절에 다니든 다니지 않든 내 마음에서 이런 번뇌가 점차 사라지고, 내 행동이 좋게 달라지면 됩니다.
그러나 절에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있기에 내가 부처님 전에서 참회기도를 하여 악업을 정화함으로써 앞으로 올 불행을 예방할 수 있고, 지계청정하고 불교를 잘 아시는 스님께서 운영하시는 사찰에 다닐 경우 많은 가피를 받고 나의 삶이 더욱 밝아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참회기도든 법문 공부든 수행이든 집에서 홀로 할 수도 있습니다.
또 "2. 그리고 어떤 스님들 유투브 법문을 들으면 불교가 아니더라도, 서양 영성가들이 불교와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거기에도 불성과 진리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것이 맞는 말인가요?"라고 물으셨는데, 서양이든 동양이든 아무 전제 없이 마음과 세상에 대해 깊이 있게 통찰한 분은 불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전에서는 부처님 제자로 "성문, 연각, 보살"의 세 종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문(聲聞)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로 들어서 깨달음을 얻는 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근 500년 간은 부처님 가르침이 암송과 구전으로 전승되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면 불전을 암송하는 '소리(聲)를 들어야(聞)' 합니다. 그래서 불교 교단 내에서 불전을 들으면서 수행하는 분들을 성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문자와 종이로 된 책을 읽으면서 불교를 배우는 현대에는 , 불교 제도권 내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분들을 '성문'이 아니라 '독경(讀經)'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성문'이라는 명칭이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 알려드리기 위해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보살(菩薩)은, 부처님 전생 이야기 모음인 <본생담(자따까)>에 실린 부처님 전생을 닮고자 하는 수행자들입니다. <본생담>에서는 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의 이름을 통칭하는 고유명사였는데, 대승의 시대가 열리면서 보살 개념의 외연(外延)이 확장되어 보통명사가 됩니다. 그래서 성불을 향해 끝없이 윤회하면서 무한정진의 이타행을 실천하는 모든 분들을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연각(緣覺)은 독각(獨覺) 또는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불리는데, 벽지불은 산스끄리뜨어 쁘라띠에까붓다(pratyekabuddha)의 음사어이고, 쁘라띠에까(pratyeka)에서 쁘라띠는 연(緣)이라는 의미이고, 에까는 독(獨, 또는 하나)이라는 의미이기에 연각 또는 독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독각은 문자 그대로 홀로(독) 깨달은(각)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불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에서 부처님이 계셨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지만, 세상의 이치에 대해 아무 전제 없이 곰곰이 관찰하여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달은 분을 독각이라고 부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깨달음의 핵심인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연각'이라고 부르고, 홀로(獨) 불교를 발견하였는 점에서는 '독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질문에서 "불교가 아니더라도, 서양 영성가들이 불교와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고 쓰셨는데,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스님들 유투브 법문'에서 거론하신 '서양 영성가'가, 연기법의 이치를 깨달은 '독각' 또는 '연각'인지에 대해, 제3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서양 영성가'뿐만 아니라, 불교 내에서도 어떤 분이 오래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 그분이 아라한인지 아닌지 여부는 본인만 알지 제3자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즉, 자기 마음속에 탐욕, 분노, 교만, 종교적 어리석음 같은 번뇌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본인만이 압니다.)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라한도 다른 수행자가 아라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 열반하신 후 제1차 결집 때, 아라한이 된 아난 존자를 알아보지 못한 가섭 존자, 난장이 밧디야가 아라한인 줄 모르고 훈계하던 사리불 등의 예에서 보듯이 아라한의 경지에 올라도 남이 아라한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깨달음 여부'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이 가운데 난장이 밧디야(Bhaddiya) 스님의 일화에 대해 <속담으로 보는 불교 가르침>이라는 제목의 불교신문 칼럼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데,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84
그리고 누군가가 '깨달음'을 거론하든지, 어디에 '깨달은 사람'이 계시다고 할 경우 많이 조심해야 합니다. 출가하여 스님이 될 때 비구스님의 구족계로 250가지 계목이 있습니다. (구족계는 현대법에서 '형법'에 해당하는데, 어길 경우 승단에서 처벌을 받거나 스스로 참회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스님의 자격을 잃고 추방당하는 4가지 계목이 있는데 "음행, 투도, 살인, 대망어"의 네 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대망어는 "깨닫지 못했는데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분율>을 보면 부처님께서 대망어의 죄를 지은 스님들을 꾸짖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실이 있더라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사실이 없으면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 (汝等愚人,有實尚不應向人說,況復無實而向人說)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에서 밑줄 친 "사실이 있더라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 되는데"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체험을 남에게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할 때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분이 깨달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가르침이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나의 인지와 통찰력을 얼마나 향상시켜 주는지, 나의 심성을 얼마나 편안하게 해 주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분이 깨달았든 아니든 ...
불교는 발견된 진리이기 때문에 동서양의 종교인, 철학자, 과학자들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과 유사한 얘기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가르침을 분석해 보면 그분들 가운데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연기법의 깨달음, 즉 무상정등정각을 얻은 분은 없습니다. 그래도 깨달음을 지향하면서 치열하게 살았다는 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그분들의 가르침이 불교를 공부하고 신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서양의 사상가들을 "독각행자"라고 부릅니다. 독각불은 아직 되지 못했지만, '독각불을 지향하는 수행자'라는 의미에서 "독각행자"라고 명명해 보았습니다.
성문, 연각, 보살이 모두 부처님 제자이기에, 동서양의 사상가, 종교인, 철학자, 과학자 모두 독각(연각)의 길을 가는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이런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위적 탱화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아래에 소개합니다. 탱화의 제목은 <익명의 불교도 - 독각행자 영산회상도>(유지원 제작)입니다. 해인사 영산회상도의 인물 몇 분을 동서양의 사상가, 과학자로 대체한 탱화입니다. 아래에 소개합니다.
이 전위적 탱화를 영상화 하였는데 아래에 링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CXXPERtpz0
이상의 답변이 '묘림'님의 신행에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첫댓글 교수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