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국민 애도 기간이다. 벌써 열흘째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인재(人災)의 비보가 날아온 순간부터 방송과 신문과 가상공간은 일사불란하게 24시간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갔고, 유난히 정 많고 눈물 많은 대한민국 전 국민도 약속이나 한 듯 먹는 둥 마는 둥 자는 둥 마는 둥 섭씨 11도와 시속 8km 조류의 바닷물에, 시계 20cm의 탁한 바닷물에 갇힌 수백 명 승객과 승무원이 전원, 아니 절반, 아니 열 명, 아니 단 한 명이라도 구조되길 5천만 심장에 1억의 손을 포개어 얹고 애타게 기원하고 있다. 그 사이 뱃길에서도 뭍길에서도 관광객의 숫자가 뚝 떨어지고, 영화관도 공연장도 운동장도 관중의 발길이 뚝 끊어진다. TV에서도 오락 프로는 싹 사라진다. 무슨 프로에서건 방송 출연자는 웃지 않는다. 태평양 건너에서조차 모름지기 한국인이라면, 1호 홈런을 쳐도 경이적인 무실점 기록의 행진을 이어가도 웃지 않는다.
국민의 분노는 생존율의 극심한 차이에 슬픔의 먹구름을 종잇장처럼 뚫고 하늘 높이 치솟는다. 전체 생존율 36.5%, 승무원 생존율 68.9%(‘갑’ 승무원 100%, ‘을’ 승무원 35.7%), 고등학생 생존율 22.4%! 생존율도 생존율이지만, 희생 학생들의 절대 숫자에도 억장이 무너진다.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중 사망 또는 실종자가 무려 252명! 174명의 목숨을 구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한 학생의 천사 목소리도 끝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없음이 밝혀진다.
사실상 전 국민이 만성 설마병을 병인 줄도 모르고 앓고 있거나 병인 줄 알면서도 고칠 생각은 아예 않지만, 이런 비극이 발생할 때마다 그 일에 직간접적으로 관계있는 수백 명 많아야 수천 명 외에는 99.9999%가 설마병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인 척하거나 너도 나도 설마병 전문의를 자처한다. 구조자의 구조자가 되고, 경찰의 경찰이 되고, 검사의 검사가 되고, 판사의 판사가 된다. 여기저기서 겸손하게 예언가임을 뒤늦게 밝히고, 머피의 법칙에 통달한 천재로서, 현재와 미래의 구세주로서 즉흥적으로 자신만만하게 백년대계를 세운다. 동시에 오늘의 박문수로서, 한국의 포청천으로서, 마패를 꺼내 들거나 작두를 대령시켜 놓고 대뜸 대통령 이하 장관과 고급 관료를 향해 석고대죄하라며 서슬 퍼렇게 호통 친다. 후진국형 참사의 원흉들에게도 사형 또는 무기징역 2014년형 또는 4347년형으로 위협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성을 차린 듯 객관을 가장하고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다며 바지 사장은 알고 보면 피해자라며 슬슬 변호해 주기 시작한다. 갈수록 티격태격 소모적인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한편으로는 재난에서 꽃 핀 영웅적 희생의 미담이 콧날을 시큰하게 하고 저명인사들의 억대 성금 쾌척에 뒤이어 크고 작은 성금답지가 분노로 가득 찬 마음 한 구석에 촉촉한 이슬방울이 맺히게 한다.
한 달, 두 달, 길어야 세 달이 지나면, 그 사이 다른 사건사고가 터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새로운 특종으로 방송과 신문과 포털은 확 쏠린다. 북한의 도발 또는 각종 선거나 월드컵, 올림픽 등 스포츠 제전은 새로이 관심을 끌기에 너끈하다. 그런 식으로 아나운서마저 눈물을 흘리며 개탄해 마지않던 설마병을 진단하고 처방하고 치료하는 시스템 구축은 흐지부지된다. 다시 20년이 흘러 대형사고가 나기 전까지 설마병은 위풍당당 대한민국의 절대군주로 군림한다.
온통 비관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한국의 설마병이 많이 고쳐졌으니까! 교통사고가 대표적이다. 이제는 앞자리에 앉은 사람치고 안전띠 안 매는 사람이 거의 없다. 뒷자리에서도 안전띠를 매는 현상도 점점 늘어난다. 곳곳에 과속 단속기가 있어서 벌금 안 내려고 과속을 자제하는 것도 상당히 보편화되었다. 이번 참사에서도 보듯이 초기 대처가 결정적인데, 교통사고 응급 처치는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다. 그래서 10여년 전에 비해서 차량은 2배 가량 늘었지만, 교통사고 사망자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1996년 연간 12,000여명에 달하던 교통사고 사망자가 2011년 5,000여명으로 줄었다.
제일 괄목한 분야는 산업재해다.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은 산업재해 감소 측면에서도 이제는 거의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섰다. 장기간에 걸친 산업재해는 책임소재를 입증하기 어렵지만, 이런 경우는 대체로 노동자의 손을 들어준다. 자연히 잘 나가는 대기업일수록 자체적으로 산업재해에 대비한 시스템을 완비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심각한 곳은 열악한 중소기업과, 책임자가 뚜렷하지 않은 공기업과, 퇴직 관료나 마당발 정치인을 로비스트로 모셔가는 기업들이다. 세월호가 바로 마지막 범주에 든다. 이런 기업들은 혁신이나 연구개발 없이 인맥으로 얼렁뚱땅 법망을 피함으로써, 비용은 최소화하고 수익은 최대화하는 전근대적인 기업들이다. 공기업을 제외하고는 이들 기업들은 산업재해와 안전사고와 사원복지에 법대로 대비하면 곧바로 한계상황에 처하여 대량 실업을 야기할 수 있다. 이들 기업들을 윽박지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제1선에서 완장 차고 호루라기 불며 개탄하는 이들은 언론 종사자와 정치인과, 전문 시위꾼인데, 사실 이들이야말로 설마병의 중환자들이다. 그들은 사건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미리 경고음을 울려야 할 위치에 있지만, 온통 설마에 맡기고 태평세월을 누린다. 자연히 이들은 정치적 이해관계만 따질 뿐 시스템의 제1보인 법 제정은 아예 관심 밖이다. 아무리 좋은 법안도 1년 2년 묵혀 두었다가 그냥 폐기하는 게 다반사다. 여야가 합의한 것도 국회선진법을 악용하여 소수가 다수를, 결국 전 국민을 물 먹여 버린다. 박근혜 정부은 출범하자마자 안전을 중시하여 정부와 여당이 바로 여러 법안을 내놓았지만, 1년간 통과된 게 하나도 없다.
북한인권법은 2천만 노예동포를 구하는 제2의 노예해방법이다. 그러나 UN이 아무리 개탄해도 반미주의자와 반일주의자들의 위선을 비웃듯 미국과 일본은 10년 전에 북한인권법을 제정했지만, 한국에서는 북한인권법안이 10년째 잠자다가 폐기되었다가 다시 계류 중이다. 국제적 여론에 떠밀려 약간의 움직임이 있지만, 개정안은 북한의 노예주를 최대한 배려한 악법이다. 세월호의 비극에 흘린 아나운서의 눈물은 참 감동적이지만, 그것이 연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이유는 그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보다 더한 북한인권에 대해서는 악어의 눈물조차 흘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진 가장 큰 설마병은 안보불감증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도합 500년 평화, 곧 임진왜란 전 200년 평화, 병자호란 이후 300년 평화는 한국인의 무의식에 안보는 공짜, 안보는 남의 일, 고비 사막의 홍수처럼 남의 나라 일이라는 DNA를 심어 주었다. 일제 식민지 35년, 6.25동란을 겪고도 여전히 안보의 핵심은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맡기고 2천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그들을 사노비로 삼은 노예주를 꼭 집어 민족의 큰 울타리에 모셔놓고 인류 역사상 최대최악 노예주의 선한 의지에 평화의 백지수표를 위임하고 있다. 설마의 설마에 평화를 맡기고 있다. 핵무기와 미사일과 방사포와 무인기와 땅굴과 5만 명 간첩으로 수시로 위협하고 실지로 좌우 정권에 무관하게 걸핏하면 도발해도 도리어 북풍 음모설을 퍼뜨리고 간첩조작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한편으로는 평화와 복지를 내세워 집요하게 군비축소를 밀어붙이고 줄기찬 친중반미(親中反美) 선동으로 선한 사마리아에게는 빅 엿을 먹이고 양의 탈을 쓴 이리에게는, 동북4성을 외교적 수사가 아닌 일관성 있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리에게는 밸런타인 초콜릿을 흔들어댄다.
300만을 굶겨 죽인 노예주에게는 구조된 174명의 만 배가 아니라 희생된 302명의 만 배를 적화통일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파리모기 떼 박멸하는 것처럼 통쾌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김일성 3세의 눈에는 휴전선 이남의 5천만 중 70% 이상이 반동분자로 보일 것이니까, 그중에 고작(?) 302만을 통일 김가왕조의 희생번제로 삼는 것은 크나큰 자비와 아량과 용서로 여겨질 것이다.
설마병을 고치지 않고 호들갑증을 버리지 않고 건망증과 이별하지 않는 한, 생명 경시와 안전 무시와 안보 태평은 상하좌우 시스템 구축으로 이어지지 않고 또 다시 책상 위의 산더미 서류란 용두사미로 끝날 것이다. 생명 중시와 안전 우선과 안보 주인의식의 일상화, 습관화, 무의식화는 설마병과 호들갑증과 건망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2014.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