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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외상과 회복탄력성
탱탱볼이 높이 튀어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장소가 경사지고 바닥이 딱딱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탱탱볼의 탄성력이 높다 한들 물렁한 곳에 던지면 높이 튀어오를 수 없는 법이다. 회복탄력성도 마찬가지다. 개인과 주변 사람의 노력은 심리적 외상을 극복하는 데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회복탄력성이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환경을 가다듬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자.
» 다양한 색깔과 크기의 탱탱볼. 출처/Wikimedia Commons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나서면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학교 앞 문방구에 들르곤 했다. 눈을 휘둥그레 만들던 여러 군것질거리와 오락거리 중 한때 푹 빠졌던 것이 ‘탱탱볼(일부 동네에서는 얌체공)’이었다. 캡슐 뽑기 기계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뒤 100원을 넣고 손잡이를 시계 방향으로 돌렸을 때, 일반 캡슐이 아닌 탱탱볼이 나오면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길바닥에 대고 세게 던지면 하늘 높이 솟아 오르고, 회전을 주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던 탱탱볼만 있으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었다.
탱탱볼의 기원은 1965년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 고무 회사에서 근무하던 노먼 스팅리(Norman Stingley)라는 화학자가 여가 시간에 끈적끈적한 물질을 1제곱 센티미터 당 약 250킬로그램의 무게로 강하게 압축해 탄성력이 매우 높은 고무를 합성했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 자신의 발명을 보고했지만, 회사 측은 이 물질이 쉽게 부서져 상업성이 낮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스팅리는 훌라 후프, 프리스비로 유명한 장난감 회사 ‘왬-오(Wham-O)’의 문을 두드렸다. 이 고무에서 성공 가능성을 엿본 왬-오의 경영진은 그에게 상품화를 위해 내구성을 강화하도록 주문했다. 스팅리는 추가 연구를 통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이는 ‘수퍼볼(Super Ball)’이라는 지름 약 5센티미터의 탱탱한 공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퍼볼은 출시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6개월 만에 무려 600만 개가 팔려나갔다. 이후에도 인기는 식지 않아 경쟁 제품이 등장하기 시작한 1970년까지 약 2000만 개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수퍼볼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엄청난 탄성력에 있다. 왬-오에 따르면 수퍼볼은 92퍼센트의 탄성력을 지녔는데, 이는 테니스 공의 세 배에 해당한다. 일반 성인이 수퍼볼을 바닥에 던졌을 때 적어도 8미터 이상 튀어 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수퍼볼은 마찰력이 매우 강해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진행 방향으로 가는 힘이 상쇄되며 진행 방향에 반대되는 회전력이 발생한다.[2] 이 때문에 수퍼볼에 회전을 주면서 던지면 천방지축 아이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게 된다. 탁자 아래로 떨어진 수퍼볼이 다시 탁자 위로 올라오는 수퍼볼 광고의 한 장면에서 두 특성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반의 수퍼볼 광고]
심리적인 탱탱볼, 회복탄력성
정신의학에도 탱탱볼과 유사한 개념이 있는데, 바로 ‘리질리언스(resilience)’이다. 어원(re(again) + sil(spring) +ence)에서 알 수 있듯이 리질리언스는 다시 튀어나오는 힘, 즉 ‘탄성력’을 의미한다. 물리학에서 탄성력은 외부 힘에 변형된 물체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힘을 뜻하지만, 정신의학에서는 “역경을 극복하고 스트레스 이전의 적응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으로 정의된다.[3] 리질리언스는 극복력, 회복력, 적응 유연성, 심리적 탄력성, 복원력 등 여러 용어로 정신의학 외에 심리학, 사회과학 등의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회복탄력성’으로 소개하려 한다.[4]
회복탄력성은 심리적 외상(trauma)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된다. 사실 늘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삶에서 나쁜 일은 종종 발생하지 않던가? 하지만 좋지 않은 일을 동일하게 경험해도 이에 반응하는 양상은 사람마다 천양지차이다. 미국의 보나노(Bonano) 교수에 따르면, 이런 반응은 크게 네 유형, 즉 만성, 지연, 회복, 회복탄력성으로 나뉜다.[5]
» 심리적 외상을 겪은 사람의 반응은 기능이 변화하는 정도에 따라 만성(chronic), 지연(delayed), 회복(delayed), 회복탄력성(resilience)으로 나뉠 수 있음. 출처/각주[5]
만성 집단은 전형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반응을 보이는 집단으로 심리적 외상 직후 증상이 나타나 지속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지연 집단은 심리적 외상을 처음 경험했을 때에는 증상을 보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난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전개되는 경우이다.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심리적 외상 직후부터 일부 증상을 보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복 집단과 회복탄력성 집단은 종종 혼용되거나, 혹은 포괄적으로 회복탄력성 집단으로 분류되곤 하는데, 두 집단의 결정적 차이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의 경험 유무이다. 즉 회복 집단은 처음에 증상을 겪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복되는 집단이다. 반면에 회복탄력성 집단은 심리적 외상 직후이든 몇 달 뒤든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는 집단을 일컫는다. 물론 회복탄력성 집단도 간간히 사건을 떠올리거나 잠을 설치며 짧게나마 불편감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강한 심리 상태를 유지하면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지 않는 것이다.
이들 네 유형의 빈도는 어떻게 될까? 보나노 교수가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세계무역센터(WTC) 테러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6] 연구진은 약 1년의 기간에 걸쳐 9·11 테러 당시 타인의 죽음이나 부상을 목격한 52명을 대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 여부를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만성 집단이 15명으로 29퍼센트, 지연 집단이 7명으로 13퍼센트, 회복 집단이 12명으로 23퍼센트, 회복탄력성 집단이 18명으로 35퍼센트인 것으로 나타났다. 약 3분의 1정도의 사람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 9.11 테러 피해자의 약 3분의 1정도의 사람들은 안정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함. 출처/[6]
보나노 교수의 다른 연구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심리적 외상을 겪은 뒤 회복탄력성, 즉 부정적 사건의 충격을 극복하고 스트레스 이전의 적응 수준으로 회복하는 힘을 보여줬다. 한 예로 배우자와 사별한 노인 205명 중 45.9퍼센트에 해당하는 94명이 사별 후 18개월 동안 우울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7] 또 다른 예로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을 겪은 생존자 997명 중 35퍼센트에 해당하는 349명이 이후 18개월 동안 심리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8] 회복탄력성을 지닌 사람들은 인생에서 부정적인 사건을 겪은 뒤 심리적 고통의 늪에 빠져도 이내 탱탱볼처럼 튀어 올라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회복탄력성 = 개인적 특징 + 환경적 요소
1980년대에 <개구리 왕눈이>라는 만화가 방영된 적이 있다. 주인공 왕눈이 가족은 포식자를 피해 정든 냇가를 떠나 무지개 연못에 정착하지만 그곳의 삶도 녹록하지 않다. 자신의 딸 ‘아로미’가 왕눈이와 사귀는 것을 싫어한 마을의 권력자 ‘투투’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왕눈이를 못살게 군다. 이에 호응해 ‘가재’는 강력한 집게로 폭력을 행사하고, ‘심술이’와 ‘얌술이’는 끊임없이 왕눈이를 놀리고 괴롭힌다. 투투를 무서워하는 연못 주민들 역시 잘못인 줄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워 왕눈이 가족을 상대하지 않고 따돌린다. 하지만 왕눈이는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구리 왕눈이' 주제가]
왕눈이처럼 역경에 쉽사리 굴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존재할까? 하와이의 작은 섬 카우아이(Kauai)에서 태어난 아이들 698명을 40년간 추적 관찰한 미국 워너(Warner) 교수의 논문 제목[9]을 빌려 바꿔 질문해보면, “상처받기 쉽지만 굴하지 않는(vulnerable but invincible)”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셀리그만(Seligman)의 영향으로 회복탄력성을 광범위하게 연구해 온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진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
이들에 따르면 회복탄력성은 감정통제력, 충동통제력, 원인분석력, 낙관성, 자기효능감, 공감능력, 적극적 도전성, 이렇게 7가지 요소로 구성된다.[10] 다시 말해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부정적 상황에서 침착하게 자신의 감정과 충동을 잘 다스린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평가한 뒤 모든 것이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를 품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한다. 아울러 주변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잘 이해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해 움츠러드는 대신 적극적으로 역경에 도전한다.
하지만 개인의 심리적 특성만이 회복탄력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카우아이 종단 연구에서 가난, 부모의 불화와 같은 위험 요소에 노출된 아이들 210명 중 3분의 1은 역경을 극복하고,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했는데, 이들의 주변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다.[9] 가정에서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가족 구성원이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안정적인 양육을 제공했다.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는 또래 친구들이 어려운 순간마다 힘이 되어 주었고, 선생님들이 긍정적인 역할 모델을 담당했다. 이런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의 심리적 후유증을 조사한 연구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11] 즉 가족과 동료 군인에게서 사회적 지지를 더 많이 받을수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더 적게 경험한 것이다. 요컨대 회복탄력성에는 개인적인 요소 외에 환경적인 요소도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어려움을 겪을 때 주변 사람들이 보여주는 정서적 지지 효과는 미국 코안(Coan) 교수의 2006년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12] 연구진은 부부 16쌍을 모집한 뒤, 먼저 부인들을 자기공명영상 기계에 눕히고 발목에 전극을 부착했다. 그리고 부인들에게 화면에 빨간색 X가 나타나면 4-10초 뒤에 20퍼센트의 가능성으로 전기 자극이 가해지고, 파란색 O가 나타나면 가해지지 않음을 알렸다. 전기 자극은 짧은 시간(20 밀리초) 동안 약한 세기(20 밀리암페어)로 가해지는 것이었지만 차가운 기계에 홀로 누워 있는 부인들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 위협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 잡을 손이 없거나 낯선 남자의 손을 잡을 때와 비교해 남편의 손을 잡고 있을 때 부인들이 덜 불쾌해하고(위쪽) 덜 긴장하는(아래쪽) 모습을 보임. 출처/[12] 실험은 세 가지 상황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한 번은 남편이, 또 한 번은 남성 연구자가 아내들의 손을 잡아주었고, 마지막 한 번은 아무도 아내들의 옆에 없었다. 부인들은 화면의 신호를 본 뒤 전기 자극을 경험 혹은 비경험하는 일련의 과정이 끝날 때마다 얼마나 불쾌한 감정을 느꼈는지와 긴장했는지를 평가했다. 그 결과 부인들이 잡을 손이 없거나 낯선 사람의 손을 잡을 때에 비해 남편들의 손을 잡을 때에 불쾌감을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적 유의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긴장하는 정도도 역시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다시 말해 부인들은 당면한 위협 앞에서 무서워하고 떨었지만, 남편의 손을 잡고 있을 때에는 불편한 감정을 덜 느낀 것이었다.
다가올 위협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부인들의 뇌 반응은 어땠을까? 곧 전기 자극이 올 지 모른다는 신호는 이들의 뇌에서 공포와 불안과 연관된 뇌 영역의 반응을 활성화시켰다. 하지만 이들이 남편들의 손을 잡았을 때에는 이들 영역의 활성도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이러한 경향은 평소 부부간에 결혼 생활 만족도가 높을수록 더 두드러졌다.
비록 실험이었지만 남편이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부인은 자신의 앞에 닥친 장애물을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주변 사람들이 심리적 외상으로 힘들어할 때 필요한 것은 많은 말과 큰 행동이 아니다. 단지 옆에서 손을 꼭 잡아주는 것 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설령 가족이 아니어도 괜찮다. 코안 교수의 최근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친구도 얼마든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13] 무지개 연못을 뒤에서 조종하던 악당 ‘메기’ 마저 물리친 왕눈이 옆에는 변함없는 지지와 위로를 보여준 부모와 아로미가 있었음을 기억하자.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의 뇌
정신의학의 많은 분야가 그렇듯 최근에는 회복탄력성의 생물학적 요소를 찾으려는 노력이 활발하다.[14] 유전학, 신경내분비학, 신경생물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를 일일이 다 소개하면 회복탄력성에 관한 글을 쓰는 도중에 정작 회복탄력성이 필요한 역설적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미국 파니(Fani) 교수의 2013년 뇌영상 연구를 통해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의 생물학적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15]
연구진은 실험에 참여한 흑인 여성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떤 종류의 심리적 외상을 언제 그리고 얼마나 자주 경험했는지와 함께 현재 재경험, 회피 및 무감각, 과각성과 같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갖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참가자는 증상이 없는 집단 26명과 증상이 있는 집단 25명으로 나뉘었지만, 심리적 외상에 노출된 정도에서는 두 집단 간에 차이가 없었다. 이어서 연구진은 확산텐서영상(Diffuse tensor image; DTI) 촬영을 통해 두 집단의 뇌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증상이 있는 집단의 뇌에서 후측 대상(posterior cingulate)의 분할 비등방도(fractional ansotropy; FA)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이 없는 집단에 비해 있는 집단에서 분할 비등방도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 후측 대상. 출처/각주[15], 변형
확산텐서영상은 물 분자가 생체 내에서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확산하지 않고 특정 방향으로 확산하는 ‘비등방성’을 이용해 뇌 백질의 구조적인 방향성과 연결도를 측정하는 뇌영상 방법이다. 이 때 분할 비등방도가 감소한 것은 세포와 세포 사이를 연결하는 백질이 통로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후측 대상의 백질에서 분할 비등방도가 감소한 것은 인접 영역인 전측 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ACC)과 해마(hippocampus) 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발생한 것을 뜻하다.
심리적 외상을 겪은 뒤의 뇌의 반응을 살펴보면 기억이 뇌에 저장되고 인출되는 것에 해마가 관여하고 전측 대상피질은 해마와 상호 작용을 통해 불현듯 떠오르는 불편한 기억을 억제하고 사라지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16] 후측 대상의 백질에 발생한 구조적 이상 때문에 전측 대상피질과 해마 사이의 연결에 문제가 생기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집단이 시시때때로 떠 오르는 부정적 기억 때문에 고통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이 있는 집단이나 없는 집단이나 심리적 외상에 노출된 시기나 빈도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을 떠올려보자. 이는 증상이 없는 집단 역시 거센 인생의 풍파를 만났지만, 이를 잘 극복했기에 현재 심리적 불편을 겪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논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 집단을 회복탄력성 집단으로 명명해도 무리 없어 보인다. 뇌과학적 입장에서는 전측대상피질과 해마가 잘 연결되어 있어 원활하게 소통이 이뤄지는 사람이 바로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인 것이다.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는 없을까?
지난달 21일 강원도 고성 일반전초(GOP)에서 한 병사가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정확한 경위는 아직 조사 중이지만 군대 특유의 수직적 문화와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특수 환경(GP, GOP)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7] 과거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러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군대의 존재 목적이나 임무 수행의 특성으로 인해 부적응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군복무는 개인의 회복탄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의무적인 시험장이 되는 셈이다.
2000년대 이후 군부대에서 여러 사고가 발생하면서 군대에서는 장병들의 신체뿐만 아니라 심리 건강까지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신병들이 입대하는 훈련소에서도 여러 심리적 부적응을 이유로 귀가하는 장병들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후반 병무청에서 징병전담의사로 군복무를 하던 나의 주된 업무가 귀가 장병들을 다시 입대시킬 것인지 아니면 이를 연기하거나 취소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되었다. 덕분에(?) 병원을 떠나면 여유로울 것이라 기대했던 나의 삶은 매우 바쁘고 분주해졌다.
» 최근 10여 년간 부적응으로 훈련소에서 귀가한 현역병(징집병)의 수는 감소하고 있지만 이 중 정신과 문제로 귀가한 수는 증가하고 있음. 출처/[18]
나름 군인성검사(Korean Military Personality Test), 의무기록지 및 면담 결과에 바탕을 두고 병무청을 방문한 젊은이들의 현역, 공익근무, 면제 여부를 결정한 것인데, 이 중 상당수가 훈련소에서 채 1주일도 못 버티고 귀가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연세대 의대 석정호 교수님과 함께 군부대 적응과 관련된 여러 심리적 요소를 찾는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물론 연구 결과를 통해 내 일의 양을 조금은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바람도 있었다.
이 연구 결과에서는 회복탄력성의 여러 요소 중 감정통제력, 충동통제력, 낙관성이 입대 장병의 부적응을 크게 줄일 수 있는 심리적 보호 요소로 확인되었다.[19] 다시 말해 엄격한 규율과 통제로 인해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군대라는 환경에서 자신의 감정과 충동을 잘 조절하고, 주어진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을수록 우울이나 불안 같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래 스트레스에 약해요.” “어렸을 때부터 단체 생활은 잘 못했어요.” 귀가 병사의 상당수는 면담할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 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며 훈련소 귀가를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내게 이들의 푸념은 “나는 회복탄력성이 늘 낮다”처럼 들렸다. 하지만 회복탄력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1975년부터 18년 동안 시행된 한 종단적 연구에서 회복탄력성은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0]
앞서 소개한 펜실베니아대학교 연구진은 회복탄력성의 동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이를 학습하고 교육할 수 있는 펜실베니아 회복탄력성 프로그램(Penn Resiliency Program; PRP)을 개발했다. 일선 학교에 이를 적용해보니 청소년의 회복탄력성이 높아지면서 우울 증상 예방에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21] 이에 군인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프로그램(Master Resilience Training; MRT)이 개발되었고, 2009년부터 부대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을 이수한 참가자 대부분은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며 크게 만족감을 표시했다.[22] 이처럼 회복탄력성에 대한 관심과 실제 적용을 통해 군대처럼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환경에서 부적응 문제가 조금이나마 줄어들기를 기대해볼 수 있겠다.
회복탄력성을 위한 사회적 노력
2006년 칸 국제광고제에서 금상은 가전업체 소니(SONY)의 브라비아(Bravia) ‘공(Balls)’에게 돌아갔다. 이 광고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거리를 배경으로 25만 개의 알록달록한 탱탱볼이 잔잔한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내려오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한 번씩 바닥에 튀길 때마다 높이 튀어 오르는 탱탱볼 하나하나의 움직임과 화려하고 선명한 색이 한데 어우러져 광고가 맞나 싶을 정도로 큰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정신과 의사인 내게 회복탄력성을 떠 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영상이기도 하다.
[탱탱볼을 이용한 소니 브라비아의 광고]
흔히 사람들은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바라지만 사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때때로 어려움과 고통이 우리를 찾아와 낙담하고 좌절하게 만든다. 특히 누구나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은 잔인하거나 혹은 삶이 위협받는 사고를 경험한다.[23] 이런 심리적 외상을 겪으면 심할 경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닥쳐오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요동치는 마음을 빨리 가라앉히며,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 회복탄력성이 있다.
사람에 따라 회복탄력성은 다를 수 있지만 적절한 노력을 통해 이를 높일 수 있고 주변에 지속적인 도움과 지지를 제공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으면 회복탄력성은 더욱 고양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소니의 광고 장면을 떠올려보자. 탱탱볼이 높이 튀어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장소가 경사진 곳이었고, 바닥이 딱딱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탱탱볼의 탄성력이 높다 한들 물렁한 곳에 던지면 높이 튀어 오를 수 없는 법이다.
회복탄력성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과 주변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심리적 외상을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회복탄력성이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 환경을 가다듬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특수 환경 부대를 예로 들면, 병사들이 지루하고 변화 없는 업무로 인한 환기와 자극을 원할 때 개인 시간을 보장하면서 여가, 휴식, 휴가 등을 적절하게 제공하는 것일 수 있겠다.[24] 사건과 사고를 모두 막을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이 회복탄력성을 갖고 있고, 이를 잘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면 심리적 피해를 최소화하고 나아가 빠른 회복에 이를 수 있다. 혹 지금 인생의 역경을 만나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탱탱볼을 떠올려 보자. 바닥을 친 뒤 하늘로 솟아오르는.◑
[주]
[1] Wulffson, D. and L. Keller, Toys!: Amazing Stories Behind Some Great Inventions. 2000: Henry Holt and Company (BYR).
[2]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319210.html
[3] Jung, Y.E. and J.H. Chae, A Review of Resilience Assessment Tools.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10. 49(1): p. 50-7.
[4] Shin, W.Y., M.G. Kim, and J.H. Kim, Developing Measures of Resilience for Korean Adolescents and Testing Cross, Convergent, and Discriminant Validity. Studies on Korean Youth, 2009. 20(4): p. 105-31.
[5] Bonanno, G.A., Loss, trauma, and human resilience: have we underestimated the human capacity to thrive after extremely aversive events? Am Psychol, 2004. 59(1): p. 20-8.
[6] Bonanno, G.A., C. Rennicke, and S. Dekel, Self-enhancement among high-exposure survivors of the September 11th terrorist attack: resilience or social maladjustment? J Pers Soc Psychol, 2005. 88(6): p. 984-98.
[7] Bonanno, G.A., et al., Resilience to loss and chronic grief: a prospective study from preloss to 18-months postloss. J Pers Soc Psychol, 2002. 83(5): p. 1150-64.
[8] Bonanno, G.A., et al., Psychological resilience and dysfunction among hospitalized survivors of the SARS epidemic in Hong Kong: a latent class approach. Health Psychol, 2008. 27(5): p. 659-67.
[9] Werner, E.E., Vulnerable but invincible: high-risk children from birth to adulthood. Acta Paediatr Suppl, 1997. 422: p. 103-5.
[10] Reivich, K. and A. Shatte, The Resilience Factor: Seven Essential Skills For Overcoming Life‘s Inevitable Obstacles. 2003: Crown Publishing Group.
[11] Lee, K.A., et al., A 50-year prospective study of the psychological sequelae of World War II combat. Am J Psychiatry, 1995. 152(4): p. 5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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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강 의사,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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