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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회로서의 노화와 전부로서의 가족
―배영운의 시 세계
권온
1.
필자는 배영운 시인을 규정할 수 있는 어휘로 ‘성실성’, ‘지속성’ 등을 꼽고 싶다. 그는 그동안 시집 야산을 보며(2014), 초봄의 수양버들에서(2016), 차를 마시며(2016), 황홀한 우화(2020) 등을 꾸준하게 간행한 바 있다.
시인이 이번에 출간하는 새 시집 이명(耳鳴)은 그동안의 문학적 역량을 집약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이가 발견한 소중한 가치를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배영운이 발견한 소중한 가치의 이름은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는 늙음의 상태에 도달한 노인의 입장에서 ‘부모’, ‘자식’, ‘부부’ 등을 자신의 시에 껴안는다. 사회의 핵심 단위이자 형태로서의 가족을 다양한 방식의 언어로 점검하는 시인의 시도가 아름답다.
우리가 이번 시집에서 각별히 주목하는 11편의 시들은 다음과 같다. 「이명(耳鳴)」, 「건망증」, 「외로운 갱년기」, 「노인」, 「늙음」, 「부모 자식 간」, 「늙음이란」, 「쉴 수 없이 바쁜 그들을 보며」, 「어미 맘」, 「자식이란」, 「부부(夫婦)」 등의 시편에서 펼쳐지는 배영운의 시 세계를 벅찬 마음으로 살펴보자.
2.
배영운의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어휘에는 ‘나이’, ‘노화’, ‘늙음’, ‘노인’ 등이 있다. 인간이 ‘나이’를 먹어서 ‘늙음’의 단계에 돌입하게 되면, 곧 사람이 ‘노화’에 다다르게 되면 ‘노인’이 된다.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에 의하면 “노화는 잃어버린 젊음이 아니라 기회와 힘의 새로운 단계이다.(Aging is not lost youth but a new stage of opportunity and strength.)” 우리가 ‘노화’를 바라보는 베티 프리단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다면, 나이를 먹어서 노인이 되는 일은 가능성의 무대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과 같다. 시인의 시에서 이를 확인해 보자.
귀속에 귀뚜라미가 운다
크게 가늘게 시끄럽게 조용하게 끝없이 운다
늦가을을 알리는 몸이 짓는 소리
긴 동면(冬眠) 속으로 빠지는
차가운 겨울이 멀지 않음을 알린다
들렸다 멈추었다 관심의 소리
유쾌하면 멈추고 우울하면 운다
몸에 걸친 푸른 잎을 벗는 헐벗는 소리
쓸쓸하고 서글픈 생명이 잦아드는 나이의 소리
―「이명(耳鳴)」 전문
이 시의 제목인 “이명(耳鳴)”은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소리의 근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잡음이 들리는 병적인 상태를 뜻한다. 배영운은 들리지 않아야 할 소리가 들리는 ‘이명’의 상황을 “귀속에 귀뚜라미가 운다”라는 신박한 문장으로 제시한다. 시인에 의하면 ‘이명’은 ‘귀뚜라미의 울음’이다. 그가 주목하는 귀뚜라미의 울음은 계절의 측면에서 “늦가을”, “동면(冬眠)”, “겨울” 등과 관련된다.
배영운은 귀뚜라미가 귀속에서 “크게 가늘게 시끄럽게 조용하게 끝없이 운다”라고 진술한다. 시인에 따르면 귀뚜라미의 소리는 “몸에 걸친 푸른 잎을 벗는 헐벗는 소리”이자 “쓸쓸하고 서글픈 생명이 잦아드는 나이의 소리”이다. 귀뚜라미의 소리는 육체의 푸른 기운이 축소되고 생명의 불꽃이 약해지는 나이에 발생한다. 또한 그 소리는 “유쾌하면 멈추고 우울하면” 발생한다. 귀뚜라미의 소리는 쓸쓸하고 서글프며 우울한 순간에 우리들 곁에 찾아오기 쉽다. 우리는 앞으로 이명 또는 죽음의 전조로서의 소리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자꾸 깜빡깜빡한다
언젠가 자신까지 아주 잃어버리는 먼 망각으로 가는 출발점
민망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놓으면 모른다 그건 나이를 알리는 몸시계의 시간표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정말 편리하고 난처하다
돌아서면 잊고 만다
고단한 삶을 아주 잊어버리려는 지우고 싶은 무의식의 의지?
아니면, 치열하게 다투는 생존에서 벗어나고 싶은 안간힘일까?
자꾸 기억을 놓치는 낭패스럽고 쓰라린 상실의 안타까움
거스르려 하고 거부해도 지나가는 세월을 어쩔 수 없다
흥하고 쇠하는 게 자연의 섭리라지만
다 살았다는 슬픈 자괴감이 서럽게 가슴을 훓는다
―「건망증」 전문
배영운은 앞의 시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상태로서의 ‘이명’을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이번 시에서 “건망증”을 다룬다. ‘건망증’은 ‘잊음증’이라고도 하는데, 기억에 문제가 발생하여 어떤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드문드문 기억하는 기억 장애를 가리킨다.
시인은 ‘건망증’을 내세우는 이 시에서 ‘민망함’, ‘슬픔’, “상실”, “안타까움”, “자괴감”, ‘서러움’ 등의 감정을 제시한다. 그가 이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열거하는 것은 “거스르려 하고 거부해도 지나가는 세월을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영운은 이제 “다 살았다는 슬픈” 느낌에 빠져있고, “언젠가 자신까지 아주 잃어버리는 먼 망각으로 가는 출발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의 언급처럼 “나이를 알리는 몸시계의 시간표”는 냉정하게 흘러간다. 우리는 어떻게 ‘세월’, ‘나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텅 빈 허전한 마음 메꿀 수 없다
쓸쓸한 인생의 늦가을을 맞는 갱년기의 우수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기복을 겪는다
아이들이 떠나버리고
자식을 보내고 허전했을 엄마 마음
외로이 혼자 계셨을 것을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솟는다
서럽고 쓰라린 빈 둥지의 증후군!
그냥 그러려니 했던 어리석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외로운 갱년기」 전문
이번 시에서 주목하는 시적 대상은 “갱년기”이다. 일반적으로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를 ‘갱년기’로 부른다. 배영운이 앞의 시편에서 다룬 ‘이명’이나 ‘건망증’ 등도 노화에 따른 신체 기능 저하의 사례로 이해된다.
시인이 이 시에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어구로는 “텅 빈 허전한 마음”, “쓸쓸한 인생의 늦가을”, “갱년기의 우수”,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기복”, “눈물”, “빈 둥지의 증후군”, ‘어리석음’, ‘부끄러움’ 등이 있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배영운이 “엄마 마음”에 동감하는 대목이다. ‘허전함’, ‘외로움’, ‘눈물’ 등으로 연결되는 ‘엄마 마음’을 엄마의 나이가 되고, 엄마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뒤늦게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이 장면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겪어야 할, 겪지 말아야 할 일
다 겪은 그 이름은 노인
건망증처럼 금방 잊히면 좋으련만,
삶은 미련과 후회
못다 한 인연과 이루지 못한 꿈
어쩔 수 없는 아쉬움 속에 산다
―「노인」 전문
배영운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그 이름”을 “겪어야” 한다. ‘그 이름’은 “노인”이다. 시인이 ‘그 이름’을 “겪지 말아야 할 일”로 규정한다는 것은 ‘노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인으로서의 “삶”을 수용한다. 배영운에 따르면 “삶은 미련과 후회”의 연속이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건망증처럼 금방 잊히면 좋”았을 순간도 많지만 ‘~을 했어야 했는데’, ‘~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등의 ‘미련’과 ‘후회’를 피하기는 힘들다. 노인은 “못다 한 인연과 이루지 못한 꿈”을 되새기는 시기에 있다. 시인의 언급처럼 노인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 속에” 살아간다. ‘미련’, ‘후회’, ‘아쉬움’ 등은 노인의 인생에서 마이너스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그 또는 그녀에게는 ‘인연’과 ‘꿈’ 등이 플러스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연결된 인연과 성취한 꿈을 생각하는 지혜로운 노인이 필요할 것이다.
늙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계단(階段)
거부할수록 집착하고 예고하지만
문득 다다라 깨닫는 어리석은 자각이다
내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돌아보며 후회하는 슬픈 착각
늙음은 치르고 싶지 않은 서러운 쓴 잔
생(生)의 서글픈 한 과정이다
안 아픈 데 없고 옹이마다 삐걱거리고
구질구질하고
늙음은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생명의 끝자리
피할 수 없는 질병이여
생략하고픈 산 자의 간절한 거역이다
―「늙음」 전문
앞에서 살핀 시 「노인」과 관련된 시 「늙음」이 여기에 있다. 배영운에 의하면 “늙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계단(階段)”이다. 시적 화자 ‘나’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거부”하려던 대상, “치르고 싶지 않은” 대상으로서 ‘늙음’을 이해한다.
시인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늙음’ 관련 표현들에 주목해야겠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각”, “슬픈 착각”, “서러운 쓴 잔”, “생(生)의 서글픈 한 과정”, “생명의 끝자리”, “피할 수 없는 질병” 등의 어구를 읽으며 ‘어리석음’, ‘슬픔’, ‘서러움’, ‘서글픔’ 등의 개념을 환기하고 ‘질병’, ‘끝’으로서 ‘삶’ 또는 ‘인생’의 페이지를 확인한다. 이 시에 형상화된 ‘늙음’의 본질을 숙고하면서 웰 에이징(well-aging)을 위한 슬기로운 해법을 모색해봐야겠다.
자식은 품 안의 자식
머리가 굵어지면
제 고집대로 하려 들고
자식 농사는
욕심같이 안 된다
자식 일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고
자식을 낳아야
부모의 마음 알게 된다
부모는 기다리지 않고
그 자식이 부모가 된다
―「부모 자식 간」 전문
필자가 보기에 배영운의 시집을 이끄는 핵심 주제는 ‘나이’, ‘세월’, ‘노인’, ‘늙음’ 등의 어휘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시간의 흐름 또는 시간의 경과와 연결된 ‘노화’가 이번 시집의 주조를 이루는 셈이다.
인용한 시는 노화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성적이다. 이번 시가 주목한 시적 대상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양자(兩者)의 관계이다. 시인에 의하면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다. 자식은 어렸을 때는 부모 말을 듣지만 “머리가 굵어지면/ 제 고집대로 하려” 드는 것이다. 배영운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 농사” 또는 “자식 일”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일이 힘든 이유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자식은 기본적으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는 시기는 자식 스스로가 또 다른 부모가 되었을 때이다. 그러나 자식이 또 다른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의 부모는 노인이 되어서 늙게 된다. 자식의 바람과는 달리 “부모는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은 뒤늦게 부모의 은혜를 깨닫고,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하지만, 늙은 부모에게는 자식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배영운의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때로는 자식의 입장에서, 때로는 부모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걸을 때 자기도 모르게 뒷짐을 지게 되고 그게 편하다
여전히 꽃은 아름답고 향기에 취한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이팔청춘 그대로다
지열(地熱)처럼 끓어오르는 뜨거웠던 가슴
이제, 겉으로보다 안으로 시선을 숨긴 것뿐이다
작년 다르고 올해 달라
비켜 가지 않는 늙음이 야속하고 서럽지만
늙음은 받은 삶의 경험을 나누는 것
결코 나쁜 것만 아니다
힘겨웠던 삶의 무게에서 놓여나 단출한 둘만의 여유
옛 신혼(新婚)을 다시 맞듯 오붓하다
젊을 때의 각지고 투쟁적이던 시각도
늙어 순한 얼굴이 되듯
지혜로워 차분히 삶을 관조(觀照)하게 된다
―「늙음이란」 전문
이번 시 「늙음이란」은 앞에서 살핀 시 「늙음」과 비슷한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판단된다. 두 작품의 제목은 거의 동일하지만 품고 있는 내용은 사뭇 다르다. 「늙음」이 노화의 부정적인 측면에 주목하였다면 「늙음이란」은 노화의 긍정적인 측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시 「늙음이란」은 “야속하고 서”러운 대상으로서의 “늙음”을 인정하면서도, ‘늙음’을 “받은 삶의 경험을 나누는 것”으로서 고양한다. 「늙음」에서의 ‘늙음’이 나쁜 것으로서의 늙음이라면, 「늙음이란」에서의 ‘늙음’은 “결코 나쁜 것만”이 아닌 좋은 것으로서의 늙음인 것이다. “힘겨웠던 삶의 무게” 때문에 힘들었던 ‘젊음’의 시기를 벗어나서 “단출한 둘만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기가 ‘늙음’이다. “각지고 투쟁적이던 시각”을 앞세우던 “젊을 때”와는 달리, 늙음의 시기에 사람은 “지혜로워 차분히 삶을 관조(觀照)하게” 된다. 배영운에 의하면 “몸은 늙어도 마음은 이팔청춘 그대로다”, 늙음에 위치한 사람에게도 “여전히 꽃은 아름답고 향기에 취”할 수 있는 마음은 생생한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번화한 거리를 나온다
차도 사람도 모두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다
쉴 수 없이 분주한 현실이
내게는 이제 먼 옛날이 되어버린 과거지만,
그들에게는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간절하고 절실한 현재다
옆을 돌아볼 수 없는 그 많던 일들이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제, 비켜서서 구경할 수밖에 없는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없다
그들의 치열하고 맹렬한 모습이 낯설고 낯익고 가엾고
부럽다
모든 걸 놓아버린 지금 외롭고 서글프고 그립고 억울하고
그러나 속절없이 캄캄하게 서 있다
―「쉴 수 없이 바쁜 그들을 보며」 전문
시적 화자 ‘나’는 누군가를 바라본다. ‘나’가 바라보는 누군가의 이름은 “그들”이다. “그들”은 “번화한 거리”에서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는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쉴 수 없이 분주한 현실”을 보내는 이들이다.
‘그들’과는 달리 ‘나’에게는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없다” ‘나’는 “그들의 치열하고 맹렬한 모습”을 “이제, 비켜서서 구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들’을 향한 ‘나’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낯설고 낯익고 가엾고/ 부럽다”라는 5연의 진술에 주목하자. 노년에 접어든 ‘나’의 입장에서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젊은 ‘그들’은 낯설고 가엾다. 동시에 ‘나’는 바쁘게 이동하고 분주하게 일하는 ‘그들’을 보면서 젊은 시절의 ‘나’를 생각한다. ‘그들’의 낯익은 바쁨을 보면서 자신의 청춘을 생각한 ‘나’는 ‘그들’을 부러워한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나’의 입장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까?
눈에 차는 자식 하나 없다
하나같이 속을 썩이고
딸년들은 오면 가져갈 궁리만 한다
다른 집들은 안 그러지 싶다
지지리 복도 없지
내같이 복 없는 년은
세상천지에 없을 거다!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속으로 더 못 줘 또 마음 아프다
―「어미 맘」 전문
이 시는 앞에서 살핀 시 「부모 자식 간」과 비슷한 계열에 해당한다. 시 「부모 자식 간」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부모의 입장과 자식의 입장에서 각각 천착한다면, 시 「어미 맘」은 “어미” 또는 ‘엄마’의 입장에서 “자식” 또는 “딸년들”을 생각한다.
이번 시는 ‘딸들’을 향한 ‘엄마’의 “푸념” 또는 ‘원망’을 담는다. “하나같이 속을 썩이고/ 딸년들은 오면 가져갈 궁리만 한다”라는 2연의 진술은 시적 화자 ‘나’ 또는 ‘엄마’의 ‘푸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친정에 온 딸들이 돈도 가져가고 음식도 가져가는 등 뭐든 가져가기만 한다면, 엄마로서는 “눈에 차는 자식 하나 없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놀랍게도 딸들을 향한 ‘엄마’의 마음은 ‘푸념’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엄마는 성에 차지 않는 ‘자식’을 “다른 집들”의 ‘자식’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세상천지에 없을”, “복 없는 년”으로 규정하지만, 그녀의 ‘본심’은 달랐기 때문이다. 4연 2행의 “속으로 더 못 줘 또 마음 아프다”라는 문장에 담긴 엄마의 본심을 읽으며 많은 독자들은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무자식이 상팔자라 했던가
자식은 있어도 없어도 걱정
어릴 때 잠시도 손 놓을 수 없고
자라면 염려 속에 잔소리만 는다
자식은 애물단지
안쓰러워하고 속상해하고 후회하고……
그리고, 저절로 큰 줄 알고 시집 장가가면
제 새끼가 제일이고 부모는 뒷전이다
잘된 자식, 못된 자식
잘되면 제 탓, 못 되면 부모 탓
힘든 자식일수록 더 아프고 아리고 안타깝다
아픈 손가락이다
속 썩이는 자식을 두고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해!” 하던,
어느 노인의 한숨이 슬프고 우울하게 한다
―「자식이란」 전문
「부모 자식 간」, 「어미 맘」 등의 시와 유사한 계열을 형성하는 시가 「자식이란」이다. 배영운은 이번 시집에서 ‘자식’ 관련 시를 다수 제시하고 있는데 「자식이란」 역시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시는 ‘자식’ 또는 ‘자녀’에 관한 본질을 통찰하고 있는 수작이다.
시인에 의하면 부모에게 자식은 기본적으로 “걱정”, “염려”, “잔소리”의 대상이자 “애물단지”이다. 결혼을 해도 후회하고, 결혼을 안 해도 후회한다, 라는 진술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결혼에는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다는 이야기일 테다. 배영운에 따르면 자식에게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곧 “자식은 있어도 없어도 걱정”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있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아픈 손가락”이라 칭하는 “못 된 자식”, “힘든 자식”, “속 썩이는 자식”은 부모에게 “한숨”, ‘슬픔’, ‘우울’ 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젊어서 사랑으로 살고
중년에 자식으로 살고
노년에 정으로 산다
젊어선 서로를 알뜰하게 아끼고
중년은 자식 사랑으로 인내하고
노년은 미운 정 고운 정 이끌려 산다
그림자처럼 붙어 떨어질 수 없고
서로 닮아 육신의 한 부분처럼
불편함이 없다
젊었을 땐 연인(戀人)
중년은 조언자(助言者)
노년은 친구(親舊)
말없이 교감(交感)하고
습관같이 약속하며
내 몸같이 한 몸으로 산다
―「부부(夫婦)」 전문
배영운은 이번 시집에서 ‘노인’ 또는 ‘늙음’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에 집중하거나, 나이든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시들을 생산하였다. 이 시는 “부부”에 주목한다. 시인이 여기에서 주목하는 ‘부부’는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보낸 “노년”의 부부일 테다.
배영운에 의하면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노년’의 부부에 도달하려면 ‘청년’과 “중년” 등 이전 단계를 거쳐야 한다. 다섯 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번 시에서 1연, 2연, 4연 등은 각각 3행으로 이루어지는데 공통적으로 1행에서는 젊은 시절을 다루고, 2행에서는 중년 시기를 언급하며, 3행에서는 노년 시기를 다룬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시인에 따르면 청년 부부는 “사랑”을 내세우는 “연인(戀人)”이고, 중년 부부는 “자식”으로 연결되는 “조언자(助言者)”이며, 노년 부부는 “정”으로 함께 사는 “친구(親舊)”이다. 시(詩)로 쓴 부부론(夫婦論)으로 평가할만한 이번 작품에 공감할 독자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3.
배영운의 시집 이명(耳鳴)을 함께 점검하였다. 필자는 시인의 이번 시집이 지향하는 주제가 사람 또는 삶과 긴밀하게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배영운이 표현하는 삶 또는 그것의 주체로서의 사람은 노인으로서의 자신이거나 자신을 포함한 가족이 된다. 그가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가족은 부모, 자식, 부부 등의 관계를 포괄한다. 요컨대 필자는 시인의 시 세계를 자신, 부모, 자식, 부부 등 4개의 영역으로 구획할 수 있었다.
노인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낸 시로는 「이명(耳鳴)」, 「건망증」, 「외로운 갱년기」, 「노인」, 「늙음」, 「늙음이란」, 「쉴 수 없이 바쁜 그들을 보며」 등이 대표적이다. 가족을 다룬 시들 중 부모에 집중한 시로는 「부모 자식 간」, 「어미 맘」 등이 눈에 띈다. 또한 가족을 다룬 시들 중 자식에 주목한 시로는 「부모 자식 간」, 「자식이란」 등이 대표적이다. 끝으로 가족을 다룬 시들 중 부부를 다룬 시로는 「부부(夫婦)」가 눈에 들어온다.
독자들은 배영운이 이번 시집에서 형상화한 시 세계의 핵심에 ‘가족’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이클 J. 폭스(Michael J. Fox)에 의하면 “가족은 중요한 게 아니다. 가족은 전부이다.(Family is not an important thing. It's everything.)” ‘가족’에 대한 마이클 J. 폭스의 언급은 ‘가족’의 중요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런 이유에서 필자는 ‘전부’로서의 ‘가족’을 예술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배영운의 시를 높게 평가하고 싶다. 시인에게 남아있는 삶과 시가 앞으로 더욱 빛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