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출 29:38-46)
사람들은 세상 살아가는 재미를 여러 자기를 통해서 얻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는 재미, 사업이 잘되는 재미, 자식이 공부 잘하는 재미, 좋은 집을 장만하는 재미, 하다못해 낡은 가구를 새로 들여놓거나 가전제품을 구입하는 데서까지 재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재미들만 있으면 세상 살맛 난다고 말합니다. 사실 지금 여러분들이나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무두 이런 재미를 인생의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인생의 행복이 아니더라 조금 있으니까 다 사라지더라’는 말을 한다면 그 분은 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것이 있어야 행복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데도 우리는 가끔 이웃을 통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세상 것을 잊고 살려고 하는데 좋은 것을 장만한 이웃이 찾아와서 온갖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고 갈 때 자신이 뭔가 잘못 살고 있는 느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남들같이 공부를 못해도 ‘이것도 하나니의 뜻이겠지’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려고 하는데 이웃에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어머니가 자식을 자랑할 때, 순간 그 마음들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는 것이 미련하게 보여지고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복으로 느껴지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에게 행복이 되는 것이라면 기어코 그것을 얻고 싶은 욕망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들이 대학을 진학합니다. 그럴 때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학과를 선택하려고 하는데, 부무는 부무대로 좋아하는 학과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서로 마찰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자기 좋은 쪽으로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아들이 부모가 원하는 학과를 선택함으로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학과를 선택함으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쪽으로 움직에게 되어 었습니다. 만약 타인의 기쁨 때문에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억지로 포기했을 때 그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자기가 선택한 학과에서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이라도 될라치면 그 동안의 모든 상처 입은 마음들이 눈녹듯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해 줄 또 다른 큰 기쁨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또 착한 일을 함으로써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이 자기에게 보람이 되고 행복을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착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남보다 더 많은 착한 일을 하겠다는 욕심이 행복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자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수많은 구제단체들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더 많은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되었던 때와 그 기쁨을 잃어버렸을 때 등을 곰곰히 생각해 보시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평생을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지만 결국 세상은 그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나이를 많이 드신 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나이가 젊을수록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능성을 가집니다. 특히 청년들이 예수를 믿기가 힘든 이유는 자신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실패를 아직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의지한다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살면서 실패 속에서 뭔가를 하나 하나 발견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의 때에 그것을 미리 맛본 자는 참으로 복된 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토록 원했던 것, 그것만 있으면 아주 행복해질 것 같이 생각되어졌던 것들이 막상 주어졌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도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적이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또 다른 행복이 되는 것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얻으면 또 행복이 아니고, 또 다시 다른 것을 찾아다니고 그러다가 평생을 행복이 뭔가를 모른채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얼마전 T.V에서 죽음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영한 것을 봤습니다. 조금 보다가 채널을 돌려 버렸지만 그들은 죽음을 실제로 체험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관에 넣어 실제 땅에 묻고 몇 시간이 지난 후 꺼내놓고는 그 느낌을 묻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에게 단지 땅속에 묻혔다가 나왔다고 해서 죽음의 느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너무나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죽음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죽는 자는 말이 없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가장 큰 행복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행복을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을 초월하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복된 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문제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본문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주어지 규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드릴 제사가 광야에서 미리 주어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성막의 규례와 제사의 규례가 주어집니까?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한 자는 들어갈 수 없고, 존재할 수 없는 땅이 되는 것은 성소가 있고 그 성소에서 제사가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드려짐으로 희생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에 그것이 곧 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고 합니다. 제물이 피를 흘리는 곳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 되셔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은혜요 복임을 아십니까? 결국 행복이란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신다는 그 자체가 행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피흘리셨다는 그것으로 기뻐하며 삽니까? 그것으로 기뻐하신다면 그 기쁨에는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신다면 그것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뻐하는 신앙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부족을 채워주시니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만족하고 기뻐하니까 더 이상 다른 것으로 부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해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주님 한분으로 기뻐하며 사십니까? 주님으로 기뻐하신다면 그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기뻐한다고 하면서 내가 다니는 교회 신자들이 어떻니, 교회가 어떻니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결국 주님으로 기뻐하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교회를 향한 자신의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져야 교회를 다니는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은혜와 복을 모르고 있는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45, 46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그들과 만나신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성소가 따로 없습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이제는 모든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결국 모든 세상이 성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십니다. 바른 진리가 선포된다고 그곳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눈이 가려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와 성경공부를 하신 분들이 간혹 저에게 ‘교회가 바른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데 그 교회를 나와야 합니까?’라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틀린 모습이 많이 보여진다면 그것이 틀렸음을 내 자신이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나 비판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어디에 살든지 그리스도의 피를 알고 내가 입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행복한 인생이며 죽음까지 초월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나에게 무엇이 있으나 없으나, 내가 무엇을 하나 안하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더러운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나를 만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것만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하며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제물이 피를 흘리며 죽는 그 자리에서입니다. 내가 죽을 자리에 대신한 제물을 통해서 결국 나는 줄어야 할 존재인데 희생의 피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고, 풀의 꽃과 같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죽음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환경도 초월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