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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해석학에 대하여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현상학 (phenomenology) 이란 무엇인가?
의식으로 경험한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거나 어떤 전제를 가정하지 않고 직접 기술하고 연구하는 것을 제 1차적 목표로 삼는 20세기의 철학사조현상학이라는 말 자체는 18세기 독일의 수학자인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자신의 인식론 일부에 붙인 이름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 헤겔은 <정신 현상학 Phe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감각경험부터 절대지까지 인간 정신의 발달을 추적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현상학 사조는 20세기초에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탐구의 한 방법으로서 현상학적 방법은 19세기 중반에 Brentano의 저술에서 나타났고, 20세 초에 독일과 프랑스의 철학자들에 의해 확대되었다. 현상학적인 운동을 이끌어간 철학자들은 Marcel, Heidegger, Sartre, Merleau-Ponty이며, 실존적 현상학의 의미를 좀 더 구체화하였고, 사고의 폭을 넓혔다. 현상학자들을 하나의 학파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적 사고가 다양했다.(Parse et al,1985)
이러한 현상학이 대두된 것으로는 자연과학에 대한 회의로 시작된다. 갈릴레오와 데카르트가 세계를 물리적 객체로 증명한 후에 세계는 수학적 공식에 의해 양적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물리적 객체의 양적화는 경험을 넘어 과학의 우위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즉 논리실증적인 자연과학이 대두되면서 물리적 객체를 다루는데 있어서, 경험은 의심되고 신뢰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자연과학은 서구 사회의 삶을 향상시키고 기술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여러 세기 동안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예측하기 시작하였고 인간 실존은 비인간화되었고, 객관성의 개념아래 인간 경험은 제거되어 왔다. 그리하여 인간 경험을 중시하면서 인간성, 개인의 가치를 탐구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한 목적에 따라 대두된 것이 현상학이다. 철학의 현상학적 방법은 인간의 객관화, 철학적 지식의 손상에 반응하여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현상학적 방법은 명백한 주어짐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분석적인 과정으로, 특히 인간과학 분야에서 연구를 위한 한 방법으로 철학적 운동으로부터 성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Spiegelberg(1976)는 6단계로 언급하였다.
① 기술적 현상학 (Descriptive phenomenology)
: 선입견으로부터 가능한 자유롭게 연구 중에 있는 현상을 직접 탐구, 분석 및 기술하는 현상학적 단계
② 본질의 현상학 (Phenomenology of the essence)
: 전형적인 구조 혹은 본질과 그 구조의 관계를 위한 현상을 증명하고 지각하는 현상학적 단계
③ 외형의 현상학 (Phenomenology of appearance)
: 명백한 양상 혹은 다른 관점으로 보이는 현상을 주시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학적 단계
④ 구성적 현상학 (Constitutive phenomenology)
: 현상을 확립하는 그 자체 혹은 의식을 형성하는 방법이나 구성을 탐구하는 현상학적 단계
⑤ 환원적 현상학 (Reductive phenomenology)
: 현상의 Reality에서 자신의 신념을 보류하는 것 즉 판단의 중지(bracketing)의 방법을 사용하여 명백하게 하는 방법을 가지는 과정
⑥ 해석학적 현상학 (Hermeneutic phenomenology)
: 직접적인 탐구, 분석 및 기술로 즉시 드러나지 않는 현상에서의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는 현상학적 단계
이와 같이 철학으로서 현상학과 이런 현상학적 접근을 사용하여 경험의 본질에 도달하는 방법은 수정, 정련되어 왔다.
1. 후설 Edmund Husserl
1859. 4. 8 오스트리아령(지금의 체크 프로스테요프) 모라비아 프로스니츠 ~ 1938. 4. 27 독일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
독일의 철학자
의식의 분석과 기술을 통해 엄격한 학문으로 철학을 얻기 위한 방법인 현상학을 창시했다. 이 방법은 체험생활의 구조와 관심 속에서 모든 철학 체계와 과학 체계가 생겨나고 이론이 발달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서, 관찰을 강조하는 경험론과 이성․이론을 강조하는 합리론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후설의 현상학은 확실성과 명증성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철학과 칸트의 선험철학을 계승하고 있으나 서구의 본질철학을 새롭게 창조하려고 시도했다. 모든 학문의 기초학으로서 철학은 그 근거 자체도 참이어야 한다. 근거 자체가 참이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참인 것, 즉 자명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후설은 철학의 출발점을 명중에서 찾고자 하였다.
명증
후설은 구체적인 주관을 갖는 직접 경험의 세계인 생활세계가 모든 학문을 창조하는 의미 지반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험은 선술어적인 경험으로 술어적 판단의 기원으로서 궁극적인 대상적 명증을 지닌 자기소여성을 부여한다. 여기에서 대상적 명증이란 직접적인 경험에서 획득되는 명증으로서 대상이 의식에 그 자신 현존구신적으로 현존한다고 할 수 있는 자기소여성을 말한다. (우리 의식에 구신적으로 자신이 소여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후설은 절대적으로 정당화 된 보편학을 건립하려함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의심될 수 있는 것을 사용해서는 안되므로 인식에 절대 불가회의성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서 명증을 들고 있다. 즉 학문의 명증성은 생활세계적 경험에서 구해져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구신적인 자기소여성을 말하는 것으로 개별적인 개체와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이 현존 가능하다.
1) 무전제의 원리
후설은 순수 주관을 연구하는 현상학을 통해서 존재자의 전체에 관여할 수 있는 학문의 원래 이념을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고대 철학에서는 이것의 실현을 과제로 삼았으나, 데카르트가 엄밀하게 정초된 철학을 수학적 방법에 의해서 수립하고자 한 후에 학문의 위기가 나타났고, 이는 심리주의로 대표되는 자연주의로 나타난다. 객관주의인 자연주의에서는 인간은 정신물리적 통일체에서 물리적인 육체를 분리하고 남는 존재일 뿐으로 이해된다.
후설은 이러한 자연주의를 비난하면서 의식을 절대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오직 그 선험성에 있다는 선험철학을 주장한다. 후설은 초기의 기술적 현상학에서 초월론적 현상학으로, 후기에는 생활세계의 현상학을 발전시킨다. 철학으로서의 자연주의는 존재의미의 왜곡 내지는 소외를 가져오며 자기 망각을 가져온다. 후설은 이러한 학문적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주관성에게 철학이 다시 합당한 권리를 인정해 주는 보편철학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보편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을 모든 존재자들이 거기에 관여되어 있는 궁극적인 근거를 탐구한다. 이는 형이상학의 주제이지만, 형이상학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형이상학은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조건적인 실재라는 전제하에서 모든 존재자를 설명하고자 하지만 현상학에서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전제나 존재론적인 전제도 사용되지 않는다. 현상학은 우리의 직접 경험에 주어진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성적 성취 등의 층들을 점점 더 깊이 탐구해 감으로써, 자연적 경험에 직접 주어진 것을 넘어서 근원에로 되물어간다. 즉 주어진 것에의 충실은 무전제의 원리를 표방한다. 무전제의 원리는 완전한 지적인 백지 상태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의식에 나타난 바 그대로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후설은 이를 후에 생활세계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생활세계는 일상적인 삶을 경험하는 세계로서 개인은 그들의 자연적인 맥락에서 연구된다. 생활세계의 회복은 즉 현상의 인식은 확실한 근거 위에 선 참다운 과학의 가능성을 찾는 길이요, 객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로 보았다. 생활세계의 구조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주관성에로의 귀환이 반드시 요구된다.
2) 본질적 직관
후설의 현상학은 본질을 직관하는 의식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라고 한다. 본질적 직관은 감성적 직관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형상을 보는 지적인 직관이다. 그에 의하면 의식은 어떤 것의 의식이며, 하나의전체적 종적인 체험의 흐름을 가리킨다. 어떤 것을 지향한다 함은 의식의 지향성, 즉 선험적 주관성의 구조속에 생활세계가 포함된다는 것을 뜻한다 생활세계란 과학의 세계가 아니라 그보다 한층 근원적인 것이다.
3) 현상학적 환원
후설의 우리의 의식 속에 일차적으로 주어지는 실재적인 형상의 자료들을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확보하기 위해 현상학적 환원을 시도한다. 현상학적 환원은 눈앞에 있는 사상에서 역사적인 요소와 실재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4) 형상적 환원
역사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 즉 시간과 공간적인 사실에 대한 명제를 괄호 안에 넣음으로써(배제함으로써)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형상적 환원이다.
5) 선험적 환원
이 형상적 환원이란 판단중지를 통해서 역사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즉 질료적인 것을 배제하여 눈앞에 있는 사상을 본질화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이 본질화된 사상을 순수의식 안으로 끌어들여 순수의식의 영역을 발견하는데 이 과정을 선험적 환원이라한다. 이러한 형상적 환원과 선험적 환원을 총칭하여 넓은 의미의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한다.
후설은 이러한 본질직관의 가능한 조건으로서 순수한 사유작용(노에시스)와 사유내용(노에마)을 구분한다. 주관이 대상을 형성하는 작용을 노에시스(NOESIS)라고 한다. 노에시스는 감성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이며, 노에시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미 형성체를 노에마(NOEMA)라고 한다. 이 작업에서 후설은 모든 전통과 과학적 지식들을 괄호 안에 묶는다. 후설은 순수의식 밖의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선험적 주관성의 세계에서는 밖은 무의미하다. 모든 초월적 존재는 순수의식 내에서 구성된 것이고 모든 존재는 의미 및 존재를 구성하는 선험적 주관성의 영역 내에 들어온다. 거기에는 내재와 존재의 구별이 없다.
이와 같은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은 선험적 주관성으로 인하여 독단주의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순수하고 절대적인 선험적 자아가 다른 자아존재들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선험적 주관성에서 상호주관성이 가능하게 되는 생활세계로의 전회가 이루어진다. 이와 함께 후설이 처음 의도했던 무전제의 원리에 기초한 엄밀한 수립이 상당히 약화되면서 흔들리고 있음을 할 수 있다. 후설이 과학주의를 배격하더라도 생활세계에는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많은 것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들이 이미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2. 하이데거
1916년 그 전해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대학의 리케르트 밑에서 시간 강사의 가격을 얻고 있는데, 16년 리케르트가 하이델베르크에 전임하고 그 후임으로 후설이 초빙된다. 이렇게 해서 하이데거는 그 후 23년에 마르부르크대학의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 후설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의 지도를 받게된다.
그러나 마르부르크대학으로 부임한 후 하이데거는 후설과 〈현상학의 이념과 의식에의 환귀〉라는 표제의 서론을 작성하면서 후설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서론에서 하이데거는 초월론적인 구성을 사실적인 인간존재의 실존의 가능성으로서 파악해야한다는 것을 거듭 후설에게 말하고 있다. 후설에게 있어서 초월론적 환원이란, 세계의 존재를 소박하게 전제하는 자연적 태도를 벗어나 주관에 의한 초월론적 인 세계구성의 작업을 밝히는 방법이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초월론적인 구성의 자리로서의 주관의 존재는 실종의 수행에 의해서만 개시될 수 있다. 즉 현상학저가 환원은 결코 특수한 방법적 조작이 아니라 인간적 실존의 한 가능성인 것이다.
<존재와 시간〉은 당초 후설이 주재하는 〈현상연구 연보〉의 제 8권(1927)에 예정된 전체의 전반〉이라 이름 붙여져 게재 발표되었다. 발표한 당초부터 압도적인 평가를 받아 마치 번개처럼 번뜩여 눈 깜짝할 사이에 독일 사상계의 현세를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발표의 무대가 된 〈현상연구 연보〉그 자체도 이후 두드러지게 그 편집방침을 바꾸게 되며, 이른바 현상학파도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적 현존재에 대하여 존재의 참된 의리를 묻고자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 현존재에 대하여 존재의 참된 의미를 묻고자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 현존재의 실존 즉 그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서 전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고유의 존재방식을 분석하고 또한 정화적 반성이라고도 해야 할 것에 의해 그 가장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떠오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우선 대개의 경우거기서 살고 있는자연적 태도-하이데거는 이것을 일상성이라 부른다-에 현상학적 환원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의도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은 보편적인 현상학적 존재론이며 현존재의 해석학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 해석학은 실존의 분석론으로서 모든 철학적 물음의 실마리를 그 물음이 발원하고 또한 되돌아가는 그 곳에 굳게 결부시켜 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니데거는 후설이 의식의 세계경험이라 생각한 것을 한 걸음 나아가 현존재의 기초적인 존재구조로 재정립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철학적 주체가 무동기의 반성에 의해 돌연 모든 것을 투시하는 절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그런 초월적인 주관성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 안에 던져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 관계하면서 자기를 투영하고 세계에로 초월해 가는 그 실존의 수행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해석하고, 동시에 거기에 개시되는 존재의 의미를 해득하는 각자적인 인간적 현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존재와 시간」의 2년후 행해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취직강의 「형이상학은 무엇인가」에서 하이데거는 실존에 대한 현상학이 아니라 실존에서 비롯되는 실존으로서의 현상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초월론적인 현상학을 거부하고 현상학을 독자적인 방법으로 재정립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부분일 것이다. 후설에 있어서 학의 기초로서 구상된 현상학이 나중에 실존주의와 결부되어 거의 그것과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도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이러한 사상적 전향을 통해서일 것이다. 철학의 이념의 대담한 변경, 즉 후설에 있어서조차 어떤 절대적인 주관의 일로 여겨져 왔던 철학적 반성을 철두철미 자기의 실존을 사는 인간존재 안에 뿌리내리게 하려 했던 하이데거의 결의가 현상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은 확실하다.
3. 메를로 - 뽕띠
메를로 뽕띠(1956)는 현상학을 학문의 정수, 세계를 보다 적합하게 이해하기 위해 세계에 관한 사실들에 질문을 갖는 초월적 철학,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 없이 살아있는 것으로서 경험을 기술하는 것을 시도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자연과학주의자들과 역사주의자들의 인과적 설명과 해석은 인간과 세계는 인간이 오직 세계와의 직접적이고 소박한 접촉을 발견한다는 설명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메를로-뽕띠는 데카르트가 감각적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사물들의 존재사실에 대해 회의함으로써 인식을 새롭게 재정비하려고 했지만, 그는 정신을 유일한 인식주체로 봄으로써 감각하는 신체를 정신으로부터 분리시켜 전혀 이질적인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이원론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현상학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메를로-뽕띠는 주관주의적 사고의 대표적 철학으로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한다. 세계의 선험적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체계적으로 세계를 재건하여 모든 인식에 객관적인 확실성을 부여하고자 한 후설의 이상은 모든 것이 선험적 자아, 즉 순수의식의 구성적 행위의 산물로 환원되기에 이르러, 노에시스적 해우이나 노에마적 내용이 모두 탈물질화 됨으로써 극단적인 주관주의적 관념론과 독아론의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리하여 후설의 현상학은 데카르트적이니 형이상학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적인 근원을 가진다. 즉 후설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유사한 판단 중지를 통하여 사실적 세계를 의식이 부여하는 의미들의 영역 속에서 재구성한다. 그 결과 후설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사실적 세계의 절대적인 관념화를 지향한 셈이라고 비판한다. 후설에 의하면 객관적 인식의 조건으로서의 선험적 주관은 감성적으로 받아들인 질류에 의미를 부여하는 노에시즈적 작용을 거쳐 노에마로서의 대상을 구성하며,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존재는 주관에 의해서 구성된 의미로서만 그 존재 타당성을 얻는다. 이렇게 볼 때, 후설의 현상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영역을 탈피함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모든 현상의 절대적 조건으로 삼음으로서 데카르트식의 사변성을 면치 못하는 동시에 절대적인 주관주의의 측면에서 인식의 영역을 양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본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사고에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의 독특한 철학을 전개한다. 자연적 태도를 지양하는 후설의 초월적 현상학의 근본 의도는 고수하지만, 후설과는 달리 데카르트식 cogito(나는 생각한다)의 주지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스스로의 철학은 실전적 현상학이라 칭하면서, 후설 현상학의 환원이나 지향성 등의 문제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후설 후기 현상학의 생활세계 개념을 인간의 실존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모든 인식행위에 있어서 논리나 판단에 대한 지각이 최우선권을 주장한다. 다라서 메를로-뽕띠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대상을 선험적으로 구성하는 순수의식적 주체가 아니라 신체를 통하여 세계를 지각하는 곧 선험적 세계가 아닌 전 의식적인 신체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체험적 세계를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지각’, ‘신체’, ‘지각세계’ 등의 개념이 중심적인 탐구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지각된 세계를 현상학적 환원의 목적지요 모든 것의 전제로 삼음으로써 메를로-뽕띠 현상학은 특히 인간과 세계 사이에 이루어지는 지향의 관계나 심신관계에 대한 새로운 기술을 시도한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지각의 세계란 반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항상 이미 거기에 있는 세계이며,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체험해 나가는 것이므로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나는 나의 신체의 앞에 있지 않고 신체 안에 있으며 곧 신체이다. 그러므로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인식주체와 세계와의 지향관계 즉 지향성은 후설의 인식주관의 선험적인 대상구성작용에서 비롯되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 속해있는 세계 즉 이미 있는 것으로서의 세계를 체험하고자 하는 지향성이다. 또한 위와 같은 세계를 체험하는 주체가 사고하는 의식이 아니라 지각하는 신체로서 부각됨에 따라 인식 곧 정신과 신체의 절대적인 구분이 배격된다. 인간의 의식은 이미 신체의 지각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사고하거나 알 수 없으므로 데카르트나 후설식의 순수사고자이나 순수의식-선험적주관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다. 즉 지각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순수사고의 가능성이 인식론적으로 사라짐으로서, 존재론적으로도 신체와 정신의 절대적 구분은 사라진다. 그는 이미 신체 자체가 근원적인 존재방식으로 부각되기 때문에 모든 의식은 지각적이라고 표현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인간 자체에 있어서의 주객의 절대적 구분이 또한 사라진다. 더 나아가서는 이와 같이 신체로 표현될 수 있는 의식이 세계 속에 참여하여 그 통일성을 지향하므로 의식이 주체와 대상의 절대적인 구분도 그이 현상학에서는 사라질 수밖에는 없다. 즉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전객관적인 지각의 세계와 신체의 원초적인 상호관계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한다.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은 너무나 드러나는 삶의 사실에만 집착한 나머지 초험적인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즉 세계-내-존재로만 눈을 돌린 나머지 이미 형성되었거나 형성될 수 있는 사실 그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할 뿐 존재함의 근원에 대해서는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고 비판되고 있지만,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인식능력에 제동을 걸고 인간이 이루는 모든 지식을 근본적인 우연성을 통해 개방시킨 점은 철학의 근본적인 유한성과 재귀성을 망각하지 않은 처사라 보겠다. 이는 독단적인 이성을 모호한 감성적 측면에 흡수시킴으로써 인식 영역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 그의 사고방식은 가치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Ⅱ. 해석학(Hermeneutics,解釋學)이란 무엇인가?
삶 또는 인간정신의 파악방법인 이해(理解)에 관계되는 철학이론이다. 해석학은 희랍신하에 등장하는 헤르메스신에서 그 어원이 유래하였다. 헤르메스는 신들과 인간사이에서 여러 가지 일을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신으로서 ‘해석하는 방법’이라는 뜻의 해석학이 이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석학은 성서의 주석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문헌학의 방법으로서 해석학이 활용되었다. 즉 해석학은 시간, 공간적으로 간격이 있고, 언어가 다른 민족과 그 민족의 시대성에서 신학과 문헌학, 법학 등에 접근하기 위한 학문을 보조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 후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해 해석학은 언어이해의 학문으로서 정립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해석학은 보편적 해석학이다.
해석학이 새로운 철학적 경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딜타이에 의해서 이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의 실증적인 방법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19세기말에 이르러 자연과학의 방법과는 다른 인문과학의 독자적인 방법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빈델발트로부터 시작하여 리케르트로 이어지는 개념적 논쟁으로 과학은 법칙정립적 과학으로서 자연과학과 개성기술적 방법으로서의 문학과학으로 분류되었다. 딜타이는 문학화학을 다시 정신과학이라는 말로 대치하였다. 딜타이는 ‘우리는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생활을 이해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분류했는데, 정신과학의 특징은 이해하는 방법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딜타이는 처음에 해석학이라는 말을 자연과학에 대립하는 정신과학의 방법론에 사용했으나 후에는 삶자체가 해석학적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해는 정신과학의 방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삶의 가장 본질적인 현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삶의 철학은 그 자체가 해석학적인 역사적 현실로써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1. 딜타이의 삶의 범주
딜타이는 정신세계는 법칙에 의해 그 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정신세계는 아무리 작은 현상이라도 그것은 의미와 가치의 구조로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원자적인 단순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보았다. 앞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정신세계는 인간 삶의 창조적 표현이기 때문에 딜타이는 정신세계를 이해한다고 말했으나, 딜타이에게 있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삶 자체가 해석학적인 것이므로 삶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딜타이는 내적 역사적인 삶의 구조를 삶의 이해에 앞서 발견해야 할 과제하고 보고 삶의 범주들을 발견하려 하였다.
삶의 범주는 체험, 표현, 이해이다. 체험은 현실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특수한 존재형식이다. 체험은 개인이 현실을 인식함으로서, 현실을 직접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겪음으로써 나에게 존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체험은 사유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딜타이는 이러한 체험에 의해 주관주의나 객관주의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인간이 삶의 전체성을 파악한 것이다. 체험으로서의 삶은 그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한 형식을 형성하는데 이것이 삶의 자기표현에 근거한 것이다. 삶의 표현은 인간의 삶에 이어서 가장 독창적인 행위이다.
삶의 세 번째 범주는 이해이다. 산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니 체험되고 표현된 삶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체험과 표현과 이해는 순환구조를 기반으로 가지고 있다.
2.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딜타이에 이어서 하이데거도 또한 이해는 인간존재의 실존론적인 구성이라고 보았고 해석학적인 방법론으로 철학을 전개하였다. 하이데거의 이해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그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하면서 딜타이의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해석학을 전개하였다. 해석학은 후설이 시도했던 것처럼 무전제성의 원리에 기초한 엄밀한 학문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다. 해석학은 오히려 전제들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해석학은 삶의 복합성과 구조연관을 포착할 수 있는 이해의 지평을 전제로 한다.
3. 가다머의 이해의 역사성과 지평융합
가다머는 해석학은 정신과학의 인식론이나 이해의 방법이 아니고 진리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진리의 경험은 과학적 영역을 넘어서 어디에서나 가능하며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경험은 이해의 역사성 안에서 이루어지며 이해는 바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된다.
우리는 역사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역사에 의해 규정된 의미지평위에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해는 객관적인 역사의 의미내용과 이해주체의 의미지평이 서로 융합되는 데서 이루어진다. 역사전통속에 형성된 의미와 이해주체의 의미지평이 지평융합을 이루게 된다. 지평융합은 선입견, 또는 해석학적 이해의 선-구조이다. 선입견은 전통과 권위와 같은 일정한 역사적 지평에 의해 제약된 것으로, 아직 학문적으로는 반성도지 않은 이해로서, 이해의 지평융합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며 단초이다. 이것은 이해과정에서 그 타당성이 검토되고 수정될 수 있다.
가다머는 이해의 과정이 언어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언어성이란 이해를 추진하는 지평융합의 변증법적 매개를 수행하기 위해 해석학의 존재론적 지평 속에 드러나는 것이다. 언어는 해석학적 경험의 매체가 되고 해석학적 존재론의 지평으로 본다.
4.하버마스의 의사소통과 진리의 합의
하버마스는 지평융합에 있어서의 선입견은 항상 교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 작업은 이성의 비판 또는 반성작용이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전통은 해석학적 지평의 토대가 되는 것이지만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다. 전통에 대한 권위는 오히려 이성과 그 비판적 반성에 의하여 새롭게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고조속에서 전통이란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이며 독단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해석학은 그 보편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비판적 반성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거짓된 보편성 주장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긴급하게 요청된다.
그리하여 하버마스는 해석학의 과제는 바로 이데올로기 비판에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역사속에서 인간을 억압해왔던 전통과 권위, 이데올로기들을 비판하여 해방시키는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버마스는 해석학적 과정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다머는 하이데거에게서 착안한 언어의 존재론화에 반대하고, 실용주의적 언어철학의 관점에서 대화에 의한 합의과정을 중시한다. 하버마스는 이상적인 대화를 통해 참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합의를 전제로 이전의 거짓된 합의를 배격하고 그 억압적 상황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합의는 바로 이상적인 언어상황이 주어진 경우에만 가능하며, 그것은 외부적인 강제력이 전혀 없는 이상적인 삶의 세계가 보장된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진리의 합의 이론은 절대적 진리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다만 진리에 접근해 살 수 있는 하나의 실용주의적 대안을 제시할 뿐이다. 새로운 합의가 이전의 합의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라는 보장과 기준은 알 수 없다는 것이 한계점이라고 본다.
※ 해석학적 패러다임으로의 발전과정 해석학은 '인간 행동과 산물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자연과학은 통제의 관심하에서 객관적인 과정들을 분석한다. 이 자연과학의 접근 방법을 사회현상에 적용하게 되면 자연과학에서는 장점이었던 것이 여기서는 단점으로 나타난다. 대상에 대한 기술적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탐구는 그 대상의 근저에 놓여있는 메타 이론적 제 조건을 설명하지 못한다. 자연과학의 주체인 인간은 완전히 대상화 될 수 없으며, 사회과학의 대상인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자연과학과 다른 접근법이 필요한 것이다. 정신과학적 철학과 관념론적 철학의 맥락에서 자연과학과는 다른 인문사회과학에 적합한 접근방법을 정초하고자 하는 노력은 해석학적 패러다임으로 발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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