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행동이 유전한다는 증거
'행동이 유전한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보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귀뚜라미는 날개가 두 쌍인데, 비교적 딱딱한 윗날개 한쪽 끝을 반대쪽 날개 밑면에다 대고 긁어서 소리를 냅니다. 반대쪽 밑 날개 중앙 부위를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빨래판처럼 생겼습니다. 빨래판 위 에 작은 돌기들이 있는데, 그 돌기의 모양이나 숫자가 종에 따라 다릅니다. 날개를 긁는 행동은 같지만 돌기가 달라서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지요.
저희 연구실에서 온갖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다 녹음했는데, 어떤 소리는 귀뚜라미가 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새소리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서울 시내에 사는 귀뚜라미 중에도 늦여름이 되면 '호로로롱 호호호호' 하고 우는 귀뚜라미가 있습니다. 주로 수놈이 저렇게 우는데, 그 소리를 듣고 암놈이 찾아옵니다. 소리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지요.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의사소통 방법에는 소리, 눈짓, 색깔, 표정, 몸짓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동물들은 냄새로 서로 이야기합니다. 소리로 하는 의사소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에도 할 수 있으니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누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지 위치를 잡아내기는 어렵겠지요.
귀뚜라미 중에는 그런 점을 이용하는 얌체 수컷들이 있습니다. 나가서 귀뚜라미를 관찰해 보면, 하룻밤 사이에 30분 정도만 우는 귀뚜라미가 생각보다 제법 많습니다. 또 어떤 귀뚜라미는 열 시간 동안 계속 울기도 합니다
여러분 한번 팔을 뒤로 하고 열 시간 동안 계속 비벼 보세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30분만 우는 귀뚜라미가 열심히 우는 귀뚜라미 근처 풀숲에 숨어 있다가, 그 소리를 들고 암컷이 오면 그 앞에 먼저 싹 나타나서 빙그레 웃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계속 울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얌체 귀뚜라미는 얌체들끼리, 성실한 귀뚜라미는 또 그들끼리 번식을 시키는 식으로 한 세대, 두 세대, 세 세대 정도를 반복하면 그 성향이 완전히 구별됩니다. 이처럼 반복 번식 실험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향을 두드러지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행동이 유전 되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행동만 보고 그 행동에 따라서 분류한 다음에 번식시킨 것이니까요.
그 대표적인 예로 닭을 들 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새들은 1년에 한 번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닭은 매일매일 알을 낳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알 잘 낳는 닭을 집중적으로 번식시켰기 때문에, 옛날엔 1년에 한 번 알을 낳던 닭이 오늘날 하루에 하나씩 알을 낳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미 나는 어릴 적에 그러한 실험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닭을 100마리쯤 기르셨습니다. 맏손자인 내 몸보신을 시켜 주겠다고 가끔 닭을 잡으셨는데, 그때마다 어떤 닭을 잡을지 지목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습니다. 매일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 오는 사람이 나였으니까요.
"할머니, 쟤가 자꾸 알을 안 낳아요" 하면 할머니는 그 닭을 잡았습니다. 그럼 우리 닭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날이 갈수록 알 잘 낳는 닭만 살아남고, 또 개네들이 번식해 그다음 세대에 알 잘 낳는 아이들만 낳고...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 알을 낳는 닭이 만들어진 것 입니다.
그다음으로 신기한 동물이 젖소입니다. 젖소는 포유동물이고, 포유 동물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젖을 빨아 줘야만 젖이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기르는 젖소는 어떻습니까? 자식도 안 낳는데 사람이 가서 주무르기만 하면 젖이 '콸괄콸콸' 나옵니다. 사실 그런 동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젖을 특별히 잘 내는 젓소를 집중적으로, 또 인위적으로 선택해서 번식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개구리 역시 귀뚜라미와 마찬가지로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입니다. 개구리는 숨을 들이마셔 공기주머니를 부풀렸다가 그걸 쭉 빼내면서 소리를 냅니다. 개구리를 가지고 조금 잔인한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수개구리의 부풀어 오르는 주머니에 구멍을 냈습니다. 고통은 없습니다. 하지만 구멍을 내면 소리를 낼 수가 없겠지요?
그 개구리와 아주 가까운 다른 종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다음에, 소리를 못 내는 개구리가 울 때 그 뒤쪽 수풀에 스피커를 숨겨 두고 녹음한 울음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러면 그 개구리는 그 소리가 자기 것인 줄 압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찾아온 다른 종의 암컷이 알을 낳으면 그 위에 정자를 뿌립니다. 이렇게 잡종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쪽의 암컷을 쓰느냐에 따라 두 가지 종류의 잡종이 나올 수 있는데, 소리는 모두 중간 소리가 납니다. 소리를 만드는 메커니즘이 유전자 속에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잡종 암컷들을 놓고 네 종류의 수컷 소리를 네 개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면, 신기하게도 잡종 수컷의 소리 앞에 가서 선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유전하지만, 소리를 듣고 감상하는 능력도 똑같이 유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할 수 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하지만 인간은 동물을 놓고 하는 인위적인 실험들을 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침팬지와 결혼해서 아이를 좀 낳아 주세요. 그래서 그 애가 침팬지랑 인간의 중간 형태의 행동을 하는지 보게 해주세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또 "특별히 성실한 사람이니 성실한 사람하고 결혼해서 아기들을 좀 낳아 주시고, 얌체이니까 얌체랑 결혼해서 2세를 낳아 주세요" 이럴 수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이 우리에게 미리 해준 실험을 들여다보는 게 고작일 것입니다. 일란성 쌍둥이는 대표적인 자연의 실험입니다.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 예전 미국과 유럽에서는 쌍둥이를 낳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동네에 소문나기 전에 낳자마자 몰래 한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두 아이를 각각 따로따로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미네소타 의과대학과 스웨덴의 스톡홀름 의과대학에서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쌍둥이를 다시 만나게 하여 두 사 람이 얼마나 비슷하지 관찰하는 연구를 했습니다.
미네소타 의과대학에서 연구한 한 쌍둥이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독일에서, 한 사람은 남미 베네수엘라에서 살았습니다. 40년 넘게 떨어져 살다가 처음으로 만났는데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신기하게도 둘 다 소방대원이었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털이 많았는데, 턱 수염은 안 기르고 콧수염만 기른 것이라든지 웃는 모습도, 하는 행동도 정말 똑같았습니다.
정말로 신기한 일은 그 두 남자가 차례로 화장실에 갔는데, 한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쏴~악' 하고 났습니다. 용변을 본 후 또 물 내리는 소리가 '쏴~ 악' 하고 났고요. 얼마 후 다른 형제가 화장실에 갔는데 그도 똑같이 들어가자마자 물을 내리고, 다시 용변을 본 후 물을 내리더랍니다. 상당히 결벽증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40년을 전혀 다른 대륙. 다른 집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용변을 보기 전 물 내리는 행동까지 똑같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유전자의 힘은 강합니다. 유전자가 행동을 유전시키고, 행동이 유전자에 어느 정도는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입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중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생명 이야기
최재천 지음
첫댓글 유전의 힘 거스를수 없지요 ~~ 어느새 나에게서 우리부모 모습을 보곤 한답니다 우리기사협회 는 우월한 유전자 회원 집단 인듯 합니다 ~~으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