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도는 일명 까치섬이라는 뜻이다. 사천에서 곤양 인터체인지를 지나 서포 방향으로 십 리쯤 가다 보면 오른쪽 작은 숲길 안에 작도정사가 있다.
약 오백 년 전 경북 안동에서 수백 리 남쪽 사천 곤양을 찾은 퇴계 이황의 흔적을 기린 곳이다. 퇴계의 글재주와 덕망을 들은 곤양 군수 관포가 나이를 초월해 친교를 맺고 싶어 초대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곳이 평야로 되어 있지만 일본 강제 점령기 이전만 해도 그곳은 바다였고 바다 가운데 작도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때 갯벌을 간척해 평야를 만들어 지금은 넓은 들을 이루고 있다.
작도정사는 1928년 퇴계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유림이 세웠다가 1954년 지방 유지들에 의해 다시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그동안 곤양 향교에서 관리해 왔다. 행정구역이 서포로 바뀐 뒤, 지금은 관리가 허술해 기와도 기둥도 낡고 마당엔 온통 잡풀이 무성하다.
햇살과 바람이 키운 가을 들판은 황금 물결을 이루며 넘실거린다. 고개 숙인 벼 위에 잠자리가 앉는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들꽃의 인사가 정겹다. 퇴계는 그곳에서 한편의 긴 시를 남겼다. 알알이 영근 파라칸시스의 하얀 꽃과 빨간 열매처럼 나이를 초월한 관포와 퇴계의 친교를 떠 올려 본다.
아버지는 곤양향교 출신이다. 1954년 작도 정사를 다시 복원할 때 현판 글을 써 올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아버지는 남명 조식 선생의 배움을 이은 후학들에 의해 한학을 공부했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는 그곳 학당에 머물러 계실 때가 많았다.
설리학의 대가인 남명 조식 선생은 일생 동안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며 살았다. 아버지도 학문은 깊었지만,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문중의 족보를 편찬하는 일에 힘쓰셨다. 뒤에는 고향에 내려와 청년들의 야학에 힘썼다. 제자들 중 군수도 되고 면장도 되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밤이 되면 동네 청년들이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들어 글 읽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아버지 방에는 사서삼경 등 고서적이 많았다. 직접 엮은 책도 많았다. 자필로 쓴 문중의 족보도 여러 권이다.
아버지는 유교 관습에 따라 할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을 정해 할머니께 생일상 같은 음식을 차려 올리라고 어머니께 당부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외출할 때도 돌아와서도 할머니께 인사는 절대 빠지지 않았다. 건강을 챙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잠자기 전에도 할머니 방문을 열고 편안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꼭 드렸다. 우리 할머니는 아버지 어머니의 극진한 효도로 103세까지 장수하셨다. 할머니의 장수로 인해 어머니가 사천 군수 효부상을 받았다.
아버지는 배움에 대한 애착도 컸다. 아는 것보다, 가벼운 보배는 없다고 누가 훔쳐 갈 수도 잃어버리지도 않는 얼마나 가벼운 보배고 재산이냐며 공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부하지 않는 아이는 땀 흘리는 일을 시켰다. 공부도 싫지만 일은 더 하고 싶지 않기에 오빠들은 몰래 빠져나가 놀다 늦게 집에 들어오는 통에 꾸중을 자주 들었다.
아버지는 향학열에 삼촌과 우리 형제들은 대부분 대학을 나왔다. 삼촌은 부산교대 1회 졸업생이다. 당시 호롱불 켜고 사는 시골에서 대학은 꿈같은 일이었다. 산골에서 면 소재지까지 걸어 나와 부산까지 가자면 아침 일찍 출발해 차를 두 번 갈아타면 거의 하루가 걸렸다.
나는 공부가 싫어 고등학교는 안 간다고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물었다. “너 고등학교 정말 안 가고 엄마 따라 일할 거냐?”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녀는 농사일을 시킬 것이라며 잘 되었다. 했다. 몇 달 동안 집안일 심부름 등 일을 해 보니 너무 힘들었다. 또 친구들은 대부분 객지로 떠나간 뒤라 그때 서야 학교 보내 달라 졸랐다. 공부가 떨어져 부산으로 와서 몇 개월 학원에 다녀서 다음 해 입학했다.
오빠와 내가 방학 때 집에 오면, 아버지는 가끔 나와 오빠를 불러놓고 나에게는 곽 마리아 김활란 같은 주로 여성의 활약에 대해 말하며, 오빠에겐 중궁의 유명한 학자나 우리나라 율곡 이이 이황 등 성현들이 남긴 발자취를 가르치며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부터 서당에 다녀 학문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늘 책을 가까이 하시고 시조를 자주 읊으셨다. 그중 황진이의 “청산리 백계수야 ~”를 하도많이 들어 외우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술을 드실 때마다 시조를 그렇게 자주 읊으셨는지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에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며 타지에 계신 아버지를 할머니가 집으로 불러들였다. 농사일을 모르던 아버지가 집에서 머슴을 시켜 농사에 신경을 써야 하고, 문중 일의 책임감과 학문에 대한 애착도 컸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할머니에 대한 효심이었다.
당시에 서울에서 신문이 배달되어 왔는데 거의 한자였다. 우리는 잘 볼 수가 없었다. 간혹 외국어(영어)가 있으면 자녀들에게 물어보곤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고향길에 들어설 때 작도정사를 바러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지방의 유림들이 모여 퇴계 이황의 학문과 뜻을 논하며 술 한 잔 이울이며 자자한 이야기꽃을 피우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나는 중학교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일하기 싫어하는 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얀 두루마기에 중절모 쓰고 출타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선하다. 지금 계신 하늘나라에서도 “청산리 백계수야~”를 읊으시며 술 한 잔 기울이고 계실까?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