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우>春雨
ㅡ허난설헌
'春雨暗西池
봄비는 서쪽 연못에 그윽히 내리고
輕寒襲羅幕
가벼운 찬바람이 장막에 스며드네
愁倚小屛風
작은 병풍에 시름을 기댈 때
墻頭杏花落
담장위에 살구나무꽃 떨어지네'
'내 죽음이 가까이 왔을까?
올 봄 삼월 하순 담장가의 살구나무꽃들의 떨어지는 모습이 나와 같구나.'
스물일곱 살구나무꽃잎이 떨어지듯, 스물일곱 연꽃송이 떨어지듯 부인이 죽은 그해1589년, 김성립은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문장 실력이 인정되어, 문장 실력자들이 근무하는 정8품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으로 승진했다.
부인의 학문에는 크게 떨어졌으나 보편적인 여건에서는 탁월하여
그의 문명이 꽤나 높았다.
김성립은 3년이 지나자 마자 대를 잇기 위해 정3품 군자감정軍資監正 홍세찬의 딸과 재혼했다. 한 달도 안되고 아기가 들어서기도 전에, 부친 김첨의 강직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성품을 닮은 김성립의 잠재력이 발휘되는 일이 발생했다.
31세인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파천의 조짐에 4월 28일까지 선조의 파천을 반대하는 시위에 앞장서서 하고,
29일 선조가 파천하자 의병을 일으켜 양수리 인근 용진강 일대에서 활약 하다가, 11월 7~13일까지의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의병장에게 합류 후방에서 왜군을 교란하는 공을 세웠으며, 왜군이 선정릉(성종, 정종부부)을 파괴할 때에 결사 항전하다가 사망했다.
*선릉과 정릉은 파헤쳐지고 재궁이 전부 불타 버렸으며 왕과 왕비의 시신이 사라졌다. 1593년 1월경기관찰사에 의해 뒤늦게 발견되었으며, 임란 후 시신 반환 문제로 일본과 다투었으나 찾지 못하고 종결지었다.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어 의관만 있으며 왜란 때 왕릉 중 유일하게 수난당했다.
김성립의 시신을 찾지못하여 평소 입던 옷으로 의관장衣冠葬을 치뤘다고 하며, 동생 김정립의 삼남 중 장남 진振을 양자로 삼아 부인 홍씨가 잘 양육하여 후계를 이었으나 홍씨 부인의 삶도 참 기구하다.(진도 과거에 급제 관찰사에 이른다.)
이후 종2품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난설헌과 홍씨 부인은 종2품 정부인에 봉양 되었다.
운명일까?
난설헌의 이름 초희楚姬는 초나라 장왕莊王의 어진 아내 번희樊姬를 가리키며, 자인 경번景樊은 ‘번희를 사모하다’라는 뜻으로, 자를 이름에 어울리게 스스로 지은 것이다.
중국 주나라 문왕의 현모양처로 알려진 태임太任을 닮겠다는 뜻으로 사임당師任堂이라고 지은 서화가신사임당은, 시댁과 남편에게 엄청난 대우도 받았지만, 남편 이원수의 주막집 주인과의 외도에는 서로가 고사를 들어가며 다투기도 했으나 성과가 없이 병으로 47세에 죽었다.
사임당 사후 그 여인이 안방을 차지하고 사납고 무대포로 행패를 부림에도 부친은 못본체 하니, 율곡이 가출하여 2년간 스님이 되는 등 자녀들은 불행을 겪었다.
그러나 강릉 후배 난설헌은 대우는 커녕 남편과 시댁이 주는 고통속에서도, 그 이름 초희와 자 경번대로 인고의 어진 아내로 살았고, 난설헌 죽기 전에 남편은 속차렸으며 위국헌신했다.
호도 난설헌蘭雪軒으로 지어 짧은 삶을 산 난설헌은 女仙되어
8세 때 상상해서 지은
강한 햇빛을 막아주는
보배같은 차일遮日과
구름같은 휘장이
지극히 아름답게 쳐진
기둥 높이 솟은 푸른 기와집
광한전廣寒殿과 그곁
은빛 반짝이는 백옥루白玉樓
23세 때 꿈에서 노닌 광상산廣桑山에서
신선된 두보를 비롯
허씨 5문장 가족들
난설헌이 죽은 해에 기생되어
균 동생과 불변의 詩友된
女仙 매창
딸 희喜와 아들 윤胤과 손잡고
조선 땅에서 훨훨 날지 못한
동병상련 임제와 동행하며
이승에서의 한많은 삶을
실컷 실컷 달래며 지내리라.
*허씨 5문장: 부친 엽과 4남매인 성, 봉, 초희, 균
* 서애 유성룡은 한나라와 위나라의 여러 문장가들보다 빼어나고, 그 나머지들도 당나라 시대 문장이 융성했을 때 지어진 시만큼 우수하다고 칭찬을 했다.
*유독 난설헌 시에만 말이 많다.
당시를 베꼈다, 허균이 매형을 무척 못마땅히 여겨 술과 노류장화에 빠진 것처럼 날조했다, 허균이 누나의 시를 미화했다, 시가 저속하다 등 말이 많은데, 남존주의와 김성립을 옹호하는 상대적 입장에서의 음해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지배적 사실은 당시의 법칙에 정통한 할아버지 허한, 천재들인 오빠 허봉과 스승 이달에게서 학문과 당문학 배움이 있었고 이를 따랐기에 당시풍이 당연했다.
허균의 능지처참 때 난설헌집도 모두 파기됐으나, 중국에서는 종이값이 오를 정도로 책이 간행됐고, 일본에서 명시로 격찬받던 난설헌의 시가 103년 후 영조 즉위년 1724년 조선에 역으로 들어오게 되고, 이를 읽은 1776년 재위 후 읽은 정조 임금이 감탄했다.
영ㆍ정조 시대 중인과 평민들의 문학 참여가 본격화되면서 명시로 격찬되고 조선에서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