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 모음
《1》가을 당신에게
박두진
내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속도와 거리는,
당신이 내게로 오시는 거리와 속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이 시대의 붉은 피를 씻을 수 있는 푸른 강물,
그 강물까지 가는 길목 낙엽 위에 앉아 계신,
홀로이신 당신 앞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별에까지 들리고, 달에까지 들리고, 가슴속이 핑핑 도는 혼자만의 울음,
침묵보다 더 깊은 눈물 듣고 계시는,
홀로 만의 당신 앞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2》갈대
박두진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하고
언어는 이슬 방울,
사상은 계절풍,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 흘림,
영원 -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 갈긴 칼에
선혈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하면
갈대는
고독
《3》겨울 나무 너
박두진
카랑카랑 강추위
빈 들에 혼자 서서
혼자서 너는 떨고 있다.
몸뚱어리 가지 온통, 오들오들 떨고 있다.
파아랗게 얼은 하늘
서리 엉긴 이마,
마지막 한 잎까지 훌훌 떨린 채
알몸으로 발돋움해
손을 젓고 있다.
영에 얼사 부둥켰던
우리들의 영원,
활활 달턴 뜨거움,
해의 나라 달의 나라별의 나라 모두
불러보는 이름들의
듣고 싶은 음성,
벌에 혼자 너만 서서
울음 울고 있다.
《4》꽃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5》꽃과 항구(港口)
박두진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닷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구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구나.
《6》꽃사슴
박두진
꽃이김에 모가지가
난만해져 있었다.
피 뻗혀
서른 울음.
간만에 極光(극광) 하나
피고 있었다.
넋이는 고운
칠색.
金剛(금강)에,
金剛에,
푸른 물이 눈동자를
씻고 있었다.
입 한번 다물으면
영원한 침묵.
두 뿔은 먼
星座(성좌)에 걸어 놓고,
네 굽,
네 굽,
까만 굽이 山줄기를
뛰고 있었다.
白樺(백화) 하얀
山崍(산내).
방울방울 땅에 젖어
꽃피 淋?(임리) 떨구며,
골골을 못 잊어워
울어예는 사슴.
한밤에,
한밤에,
모가지가 꽃에 척척
이겨지고 있었다.
《7》너는
박두진
눈물이 글성대면,
너는 물에 씻긴 흰 달.
달처럼 화안하게
내 앞에 떠서 오고,
마주 오며 웃음지면,
너는 아침 뜰 모란꽃,
모란처럼 활짝 펴
내게로 다가오고,
바닷가에 나가면,
너는 싸포오
푸를 듯이 맑은 눈 퍼져 내린 머리털
알 빛같이 흰 몸이 나를 부르고,
달아나며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푸른 숲을 걸으면,
너는 하얀 깃 비둘기.
구구구 내 가슴에 파고들어 안긴다.
아가처럼 볼을 묻고 구구 안긴다.
《8》당신 사랑 앞에
박두진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 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라까 라보니여
《9》도 봉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