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불교문예 신인상 수필부문 당선작] 김영성
문해교육文解敎育의 추억
봄기운이 왕성한 5월 초순이었다. 퇴직 전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문해교육 강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본인은 다른 데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관계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평상시에 뜻이 있었던지라 흔쾌히 받아들이고 안내해준 해당 기관으로 갔다. 지인으로부터 이미 연락이 되어 있었던 터라 관계 직원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무실에 방문하여 내놓은 신청서를 작성해 주고 실무자와 면담을 한 다음 앞으로 담당할 마을을 안내해주었다. 사업 명칭은 ‘찾아가는 한글학당’이었다. 해당 어르신들의 명단도 넘겨받았다. 접수된 인원은 20여 명이 넘었다. 이 사업은 이미 올해 초부터 시작되었으나 담당하던 강사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교재와 출석부 등 관련 자료는 해당 마을의 반장한테 있다고 하였다. 수업시간은 하루 2시간씩 주 2회였다. 나는 수업시간을 화요일과 수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로 잡았다. 부임 장소와 날짜를 정하고 부임 당일 담당자와 함께 가기로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부푼 꿈을 안고 부임 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소개말을 허드레 종이에 적어보고 이를 다시 컴퓨터로 워드 작업하여 프린터 해 놓았다. 드디어 부임 날이 왔다. 먼저 해당 기관으로 가서 관계자들을 만나고 담당자 차를 앞세워 내 차가 뒤를 이어 따라갔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형태는 집성촌이 아니라 여러 군데로 분포되어 길게 늘여져 있었다. 마을회관도 그다지 크지 않고 아담하였다. 마을회관의 유리창 미닫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을 어르신 8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담당자가 먼저 인사말을 하고 이어 나를 소개하였다. 나는 준비해간 소개서 프린트물을 보아가며 나의 소개와 앞으로 수업방법 등을 말했다. 그렇게 첫날은 교과서 없이 간단하게 진행하고 반장님으로부터 교재와 자료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수업 일은 인계받은 교재로 전에 했던 부분에 이어 교재를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받아쓰기 시험도 보고 어려운 단어는 공책에 써보게도 하였다. 그리고 숙제도 내주고 다음에 나올 때 확인하는 도장을 찍었다. 받아쓰기 시험은 답안지 서식을 컴퓨터로 작성하여 나눠드리고 불러주는 대로 그 답안지에 받아쓰도록 하였다. 작성한 받아쓰기 답안지는 한분 한분 차분하게 틀린 부분을 바로잡아 다시 쓰게 하여 모두 100점을 드렸다. 후일 들은 말이지만 해당 기관에 100점을 맞게 해주었다고 자랑도 하였다고 한다. 받아쓰기뿐만 아니라 말 연결하기 등의 시험문제도 출제하여 배부하고 답안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시험문제에 보다 능숙해지게 하는 나름의 방편에서였다. 이렇게 수업하다 보니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힘들어하고 별 흥미도 없어 보였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손자들이 보게 하려고 놓아두었던 동화책을 여기저기 뒤져서 좋은 내용을 찾았다. 그리고는 그 내용을 컴퓨터 워드로 다시 글자 포인트를 크게 작성하여 프린트해서 나눠주고 다 같이 큰 소리로 읽어 보았다. 의외로 흥미를 가졌다.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동화내용에 대해 서로 본인들이 느낀 평도 해주었다. 더 흥을 유발하기 위하여 교재에 나오는 초등학교 노래 외에 더 많은 노래를 컴퓨터로 워드 작업하여 나눠드리고 먼저 문자 해득을 위해 가사를 크게 같이 읽어 보았다. 다음에는 가져간 이동식 스피커(블루투스bluetooth 기능이 있음)에 휴대폰 정보를 내려받아 해당 곡이 나오게 한 다음 따라 부르게 하였다. 나중에는 유행가 가사도 편집해서 프린트 작업하여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감동이 가는 시詩도 발췌하여 편집, 프린트해서 나눠드리고 같이 낭독하면서 음미해 보았다. 숫자 읽기는 처음 1부터 100까지 따라서 수없이 반복하고 나중에는 1000까지의 숫자 구성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구구단을 프린트해서 나눠드리고 매 수업 전에 한 번씩 따라 외우도록 하였다. 영어 알파벳도 프린트해서 나눠주고 수업 전에 한 번씩 읽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모든 학습이 그렇듯이 공부는 반복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렇게 학습 자료를 프린트하다 보니 프린터기의 잉크 소요와 복사지도 많이 소비되었다. 그러나 봉사하는 마음으로 제공하였다. 오히려 오르신 들이 더 염려해 주셨다. 자료는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주셨다. 이렇게 낯이 익어가면서 관계가 편해져 갔다. 그러다 보니 때에 나는 포도나 복숭아며, 감 등을 선물해 주셨다. 부담스러웠지만 안 받으면 더 큰 오해를 받을까 싶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그해 가을에는 청와대를 단체 방문할 기회가 생겨 같이 나들이도 다녀왔다. 청와대 방문기념으로 단체사진도 남겼다. 나는 이 단체사진을 포토샵 하여 ‘청와대 방문기념’이란 글씨를 넣어 사진관에서 현상한 다음 나눠드렸다. 모두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흥미를 가지고 수업하던 중 그다음 해 2월 말경 코로나19 창궐로 수업이 중단되고 갑자기 어르신들과 결별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지나면 코로나19의 상황도 끝나고 일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같이 코로나19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 해에 나는 초등문해교육 자격연수나 같은 교육을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이수 받았다. 더 나은 질로 어르신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제 어르신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는 기대와 설렘으로 기다리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불안은 쉽게 종식되기는 어려워만 보인다. 계속해서 수업이 이어졌더라면 더 많은 자료와 연구로 어르신들에게 더 유익한 삶의 정보를 제공하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이 남았다. 그때 어르신들의 즐거워하시던 표정이 오늘도 마냥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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