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은 관람객들로 북적거렸다. 제2연평해전 당시 전투에 나섰던 참수리호 모형을 둘러보는 해군 장병들부터 전시회 곳곳을 사진기에 담아가는 외국인들까지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젊은 방문객들 사이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구의 백발이 성성한 류형석(79)씨였다. ‘6·25참전유공자’라는 글씨가 새겨진 조끼를 입은 류씨를 보고 김동현(23)군이 다가가 인사를 했다. 류씨는 “요새 사람들은 이렇게 다 훤칠하네”라며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163센티미터까지 컸는데 지금은 159센티미터밖에 안 된다”고 웃으면서 첫마디를 건넸다.
류형석씨는 1934년생, 김동현군은 1990년생으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56세나 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속담을 떠올려볼 때 두 사람 사이엔 강산이 여섯 번 바뀐 세월이 놓여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은 나이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두 사람 다 정전 60주년의 의미를 특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류형석씨는 소년병 출신의 6·25 참전용사다.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열여섯 살(중학교 2학년)의 나이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1일 대구 북쪽 다부동에 있는 제1사단 11연대 1대대에 배치됐다. 통신병으로 근무하며 1950년 9월 24일 북진해 서울을 수복하고, 다시 북진해 평양을 거쳐 평안북도 태천까지 진군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수차례 넘기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일등중사(하사)로 전역했다.
김동현군은 현재 고려대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다. 김군은 2010년 10월에 주한 미2사단에 어학병(통역병)으로 입대해 2012년 7월에 제대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마친 후 전쟁기념관 2층에 마련된 특별전시실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유엔군 참전·정전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아! 잊힐리야’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번 특별기획전에는 6·25전쟁 당시 기록, 정전협정 체결 후 한국의 발전상, 참전용사들에 대한 학생들의 감사편지·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당시 사용하던 전투복, 전쟁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첩 등 현재까지 국내에 공개되지 않았던 물품들도 볼 수 있다.
“6·25 참전은 희생 아니라 당연한 국민의 도리”
김군의 손을 꼭 잡고, 전시장을 둘러보던 류형석씨가 한 장의 흑백사진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군인들의 형상만 어렴풋하게 알아볼 수 있는 오래된 사진이었다.
류형석 “김군, 저게 뭔지 알겠어요?”
김동현 “글쎄요. 사진만 보고는 어떤 상황인지 구별이 잘 안가요.”
류 “내가 복무했던 1사단 사진이에요. 흑백사진이라 잘 안 보이지만 방패에 빨간색으로 ‘1이’라고 쓰여 있어요. 내가 저걸 입고 전쟁터에 있었어요.”
김 “50년도 더 된 일인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다 기억하세요?”
류 “기억할 수밖에 없죠(웃음). 6·25전쟁은 내 인생의 가장큰 자부심이에요. 이 옷은 아주 중요한 날에만 입는 소중한 옷이에요. 이 옷을 입으면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잖아요. 열여섯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게 자존심입니다.”
류형석씨가 입은 조끼 오른편에는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왼편에는 ‘6·25참전유공자’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부동전투는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함께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다. 다부동(현재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은 대구를 방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학도병 500여명이 포함된 국군 제1사단은 열세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김 “제가 열여섯 살 때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전쟁에 나갔다는 게 상상이 안 돼요. 저는 열여섯 살 때 공부하기에도 벅찼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전쟁에 참여하실 수 있으셨어요?”
류 “그때는 죽는 게 겁이 안 났어요. 죽는다는 생각도 안 했던 거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김군처럼 ‘어떻게 나라를 위해 희생을 할 수 있었어요’라고 물어봐요. 그런데 그게 희생이라는 생각도 안 했어요. 나라가 어려워져서 국민들이 피난을 가는데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느껴졌거든요. 자기 한 몸 편하자고, 나라의 어려움을 모른척하는 건 기생충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소년병을 모집한다는 걸 듣고 자연스럽게 지원했죠. 그때 마음은 현재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이라도 전쟁 나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요새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요.”
김 “가끔 친구들이랑 ‘만약 전쟁 나면 어떡하지?’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몇몇 친구들은 ‘전쟁 일어나면 도망가야지’라고 말하더라고요. 부끄러우면서도 안타까운 일이에요.”
“한반도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
‘아! 잊힐리야’ 특별기획전 관람을 마친 두 사람은 전쟁기념관 2층에 있는 ‘6·25전쟁실’로 자리를 옮겼다. ‘배경 : 남침’ ‘반격 : 북진’ ‘중공군개입과 전선교착’ ‘UN참전’ 등으로 이뤄진 이 전시실에 가면 6·25전쟁의 배경에서부터 정전협정에 관련된 다양한 기록물들을 볼 수 있다.
전시실에서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연상시키는 “서울 시민들 안전하게 피하십시오”라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김 “군대를 다녀오긴 했지만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전혀 상상이 안 가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는 좀더 다른 모습일 것 같기도 해요. 선생님께선 직접 전쟁터에 계셨는데 어떠셨어요?”
류 “한마디로 처참했죠.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사방에서 총탄이 오가고… 말로 다 하기 힘들 정도죠. 우리 국군들이 목숨 걸고 지켰어요. 인간의 삶의 질을 100이라고 한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내 생각엔 80에서 90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100퍼센트 만족한다고 느끼기는 어렵잖아요. 그때 우리는 10에도 못 미치는 한 4에서 5정도였던 거 같아요. 그런 시절에 겪은 전쟁이니 오죽했겠어요. 요새로 치면 산꼭대기에서 비박을 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면 돼요. 한두 달 정도 목욕도 못하고요.”
김 “선생님께선 정전 60주년을 맞는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류 “아시아에서 아주 못살았던 대한민국이 지금 이 정도로 잘 살게 된 것도 놀랍고, 여러 생각이 들죠. 그런데 아쉬운 점도 있어요. 정전 60주년이라는 이런 기념적인 일을 우리가 너무 소홀하게 지나가는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요. 동현군, 이번에는 내가 질문 하나 할게요. 정전 60주년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김 “일단 ‘정전’이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아요. 한반도가 종전이 아니라 정전 상태라는 거잖아요. 잠깐 쉬고 있을 뿐이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도 있는 거죠. 군대에 가기 전에는 정전 60주년을 생각할 때 별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런데 군 복무 후에는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북한의 도발 행위는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국방부 정보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4월 말 기준으로 6·25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부터 연평도 포격이 발생한 2010년 11월까지 북한의 대남도발은 육상 720여 건, 해상 920여건 등 침투만 1,640여 건에 이른다. 국지도발은 1,020여 건으로 지상도발 470여 건, 해상도발 510여 건, 공중도발 40여 건 등이었다. 북한의 도발로 제2연평해전 당시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46명이 전사했다.
김 “북한에 있는 동포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게 사실이에요. 잘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잖아요. 하지만 안보는 또다른 문제예요. 북한의 무력 도발은 계속되고 있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전쟁이 끝난 게 아니잖아요. 안보의식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얼마 전에 많은 청소년들이 6·25를 북침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고 놀랐어요. 현대사 교육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역사교육이 꼭 필요해요.
젊은 세대들을 위한 안보교육은 분명히 필요해요. 안보 불감증은 매우 심각해요. 현충일에 사이렌이 울리잖아요(매년 현충일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묵념하기 위한 사이렌이 울린다). 외국에선 이런 사이렌이 울리면 모든 사람들이 멈춰서고, 경례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요새는 사이렌이 울려도 멈추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류 “교육도 중요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뒷받침돼야 해요. 미국서부를 여행간 적이 있는데 독특한 모습을 봤어요. 대부분의 미국 가정집들엔 정원이 있잖아요. 그런데 몇몇 집 정원수에는 노랑색 천이 둘러싸여 있더라고요. 신기해서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깐 그 집에는 이라크에 파병된 가족이 있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집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의 대상이래요.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니까요. 우리나라에도 참전 용사들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그런 문화가 자리잡았으면 좋겠어요.”
글·김혜민 기자 / 사진·전민규 기자
[출처] http://www.korea.kr/gonggam/newsView.do?sectId=gg_sec_21&newsId=01H79fMoDGJMP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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