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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13-21절.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설교함
13절.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we, going ahead to the ship, set sail for Assos, intending from there to take Paul on board; for so he had arranged it, intending himself to go by land.
앞서 배를 타고
Ἡμεῖς δὲ προελθόντες ἐπὶ τὸ πλοῖον
we but having gone ahead to the ship
직역하면 ‘그러나 우리는 배로 나아가서’란 뜻입니다.
‘나아가서’(προε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gone ahead) 배로 나아간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앗소에서
ἀνήχθημεν ἐπὶ τὴν Ἆσσον,
sailed to the Assos
직역하면 ‘앗소로 항해했다’는 뜻입니다.
‘항해했다’(ἀνήχθημεν)는 부정과거로서(sailed) 앗소를 향해 배타고 항해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ἐκεῖθεν μέλλοντες ἀναλαμβάνειν τὸν Παῦλον·
there intending to take in the Paul
직역하면 ‘거기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해서’란 뜻입니다.
‘태우려고’(ἀναλαμβάν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take in), ‘해서’(μέλλ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intending) ‘의도해서’란 뜻입니다.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οὕτως γὰρ διατεταγμένος,
thus for having arranged,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가 이렇게 정하여 주어서’란 뜻입니다.
‘정하여’(διατεταγμένος)은 완료분사로서(having arranged) 바울이 이미 정해준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ἦν μέλλων αὐτὸς πεζεύειν.
he was intending himself to go on foot
직역하면 ‘그 자신은 걸어서 가고자 의도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걸어서 가고자’(πεζεύ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go on foot), ‘의도하고’(μέλλων)는 현재분사이고(intending), ‘있었다’(ἦν)는 미완료과거로서(he was) 도보로 가고자 계속 의도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1. 바울은 드로아 교회에서 죽었던 유드고를 살려내는 놀라운 기적 사건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로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로 갈 때, 일행들은 배를 타고 가게 했고, 바울만 혼자서 34킬로를 걸어갔습니다.
이 때 바울은 혼자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4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열두 제자들까지 다 보내신 후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로 재충전하시고, 풍랑에 고생하는 제자들을 구원하러 물 위로 걸어가셨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이룩한 후에는 재충전의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놀라운 역사를 이룬 후에 방심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람만 높임 받다가, 마귀의 시험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드고를 살려낸 기적 사건 후에, 혼자서 걸어가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시간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재충전의 시간(retreat hour, break time, quiet time)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잠시 일행들과 떨어져 있음으로써 일행들이 자신을 우상시하지 못하고, 바울을 잠시 잊도록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우상시 될 때 가장 괴롭기 때문입니다.
실상 독자가 가족들에게 우상시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 같아서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우상시해서 괴롭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4절.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when he met us at Assos, we took him on board and came to Mitylene.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ὡς δὲ συνέβαλλεν ἡμῖν εἰς τὴν Ἆσσον,
when now he was met with us at the Assos
‘만나니’(συνέβαλλεν)는 미완료과거인데(he was met with) 이것은 바울이 앗소에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소위 ‘우리’라는 동행인들이 걸어오고 있는 바울을 보고 가서 만나서 배로 데리고 오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when Paul was nearing at Asos, we saw him and took him into boat). Linguistic Key. 317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ἀναλαβόντες αὐτὸν, ἤλθομεν εἰς Μιτυλήνην·
having taken in him, we came to Mitylene
‘태우고’(ἀναλαβ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in) 과거의 사실을 가리키고, ‘가서’(ἤλθο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came) 역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도보로 가는 동안 일행들은 먼저 가서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앗소에서 바울은 일행들을 다시 만나 이번에는 같이 배를 타고 미둘레네로 갔습니다.
미둘레네는 앗소에서 남쪽으로 50킬로 떨어져 있는데, 동그란 고리같이 생긴 섬입니다.
15절.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ailing from there, we arrived the following day opposite Chios; and the next day we crossed over to Samos; and the day following we came to Miletus.
거기서 떠나
κἀκεῖθεν ἀποπλεύσαντες
and from there having sailed away
‘떠나’(ἀποπλεύ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ailed away ) 배타고 떠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τῇ ἐπιούσῃ κατηντήσαμεν ἄντικρυς Χίου,
on the following (day) we arrived opposite Chios
‘오고’(κατηντήσ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arrived) 기오 맞은편에 도착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τῇ δὲ ἑτέρᾳ παρεβάλομεν εἰς Σάμον,
the then next (day) we arrived at Samos
‘들르고’(παρεβάλο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arrived)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τῇ δὲ ἐχομένῃ ἤλθομεν εἰς Μίλητον.
the now following (day) we came to Miletus
‘이르니라’(ἤλθο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came) 도착한 것을 가리킵니다.
1. 미둘레네에서 배로 떠나 남쪽으로 80킬로를 가서 이튿날 기오 섬에 도착했습니다.
이 기오 섬은 소아시아에 매우 가깝지만, 그리스의 영토입니다.
이곳에서 유명한 시인 호머(일리어드와 오딧세이 저자)와 유명한 우화 작가 이솝과 유명한 탐험가 콜럼버스가 출생한 곳입니다.
2.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 일행은 기오 섬에 들렸다가 다시 출발해서 그 다음 날에 밀레도 항구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이 밀레도는 에베소의 외항으로서 마치 에베소가 서울이라면 밀레도는 인천과 같은 곳입니다.
에베소에서 밀레도는 50km로서 걸어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시간 관계상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라고 불렀습니다.
16절.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Paul had decided to sail past Ephesus so that he would not have to spend time in Asia; for he was hurrying to be in Jerusalem, if possible, on the day of Pentecost.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κεκρίκει γὰρ ὁ Παῦλος παραπλεῦσαι τὴν Ἔφεσον,
had decided for the Paul to sail by the Ephesus
직역하면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를 지나 항해하도록 정해주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지나 배타고 가도록’(παραπλεῦσ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sail by) ‘단호하게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가도록’이란 뜻입니다.
‘정해주었기’(κεκρίκει)는 대과거로서(had decided) 이미 과거에 바울이 정해준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ὅπως μὴ γένηται αὐτῷ χρονοτριβῆσαι ἐν τῇ Ἀσίᾳ·
so that not it might come upon to him to spend time in the Asia
‘지체하지’(χρονοτριβῆ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spend time) 바울이 아시아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기로 다짐한 굳은 의지를 보여줍니다.
‘않기 위하여’에서 동사(γένηται)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입니다(it might come upon).
급히 감이러라.
ἔσπευδεν γὰρ,
he was hastening for,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가 서두르기 때문이었다’는 뜻입니다.
‘서두르기’(ἔσπευδεν)는 미완료과거로서(was hastening) 바울이 계속 서두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εἰ δυνατὸν εἴη αὐτῷ, τὴν ἡμέραν τῆς Πεντηκοστῆς γενέσθαι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if possible it was for him, on the day of the Pentecost to be in Jerusalem
직역하면 ‘할 수 있으면 오순절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그에게 가능하도록’이란 뜻입니다.
‘있는’(γενέσθ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오순절에 바울이 예루살렘이 확실히 있게 하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능하도록’에서 동사(εἴη)는 현재 기원격 동사입니다(optative).
1. 바울은 아시아 지방의 에베소에서 들리지 않고,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급히 여행길을 재촉했습니다.
만일 에베소 교회에 들린다면,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큰 교회이고, 여러 지방 교회들의 모체교회이기 때문에 적어도 한 달은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큰 교회지만 에베소에 들리지 않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라고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에베소에 가면 과거에 에베소는 바울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킨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그런 기적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은 바울이 일으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데미 우상 도시를 복음화 하기 위해서 필요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에 가면, 사람들의 지나친 기대 심리 때문에 피곤할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들르지 않고, 장로들만 만나보고 지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처럼 큰 교회는 사역하기가 더 힘들고 작은 교회는 그 만큼 일이 적어서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 교회 같은 곳에서는 목사가 책을 쓰기 위해서 일부러 작은 교회에 가서 시무한다고 합니다.
물론 독일 같은 곳은 국민들이 종교세를 내서 목사들이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사들이 굳이 큰 교회에 가서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17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rom Miletus he sent to Ephesus and called to him the elders of the church.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Ἀπὸ δὲ τῆς Μιλήτου πέμψας εἰς Ἔφεσον
from then the Miletus having sent to Ephesus
‘바울’이란 단어는 의미상 추가한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어’(πέμψα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ent) 사람을 보낸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μετεκαλέσατο τοὺς πρεσβυτέρους τῆς ἐκκλησίας.
he called for the elders of the church
‘청하니’(μετεκαλέσατο)는 부정과거로서(he called for) 청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바울 사도는 에베소 도성의 외항인 밀레도에서 50킬로 떨어진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라고 초청했습니다.
원래 바울은 얼마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까?
왜냐하면 자신이 선교 사역 가운데서 가장 장기간인 3년간이나 선교함으로 설립한 교회가 에베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해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병자들에게 얹어도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데미 우상숭배자들이 선동을 해서 수만 명의 군중이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다행히 서기관의 설득으로 데모 군중이 해산함으로써 바울과 에베소 교인들이 극적으로 살아난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 감개무량했지만, 현재는 거금의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고 빨리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야 했습니다.
자칫 에베소에서 지체하다가 거액의 헌금을 잃어버리기라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의 대표자들인 장로님들만 밀레도로 오라고 초청한 것입니다.
2. 그렇습니다. 장로님들은 교인들의 대표자들입니다.
마치 군의원들이 군민들을 대표해서 군정을 논의한 것과 같고, 국회의원들이 각 지역민들을 대표해서 국사를 의논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님들은 개인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교인들을 대표한다는 의식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로들은 교인들의 대표이기 때문에, 목자를 따르는 양의 대표로서 가장 목자를 잘 따르고, 가장 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로가 교인들의 대표라고 해서 목자에 대해서 대항하고, 불순종하려고 하면, 그런 교회는 싸움이 일어나고 불신자들의 지탄을 받으며 전도의 길을 막고 맙니다.
그렇지만, 장로가 양의 대표로서 가장 모범적으로 목자를 따르고 순종하면, 그런 교회는 크게 성공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3. 바울은 보통은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목회자로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님들에게 목회자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잘 보살피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선교사였지만, 설립된 교회들마다 장로들을 세워서 목회하는 목회자이기도 했습니다.
즉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설립된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이 때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난 장면은 마치 어지신 목자가 나약한 양들을 목자적인 심정으로 만나는 모습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랑이 넘치는 엄마가 객지에 있는 어린 자녀들을 애정으로 만나보고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고 헤어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교회의 모습을 보면, 목사와 장로들의 관계가 마치 이권 다툼을 하기 위해서 팽팽히 견제하고, 인정 없이 냉랭하게 대처하는 모습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로 장로들이 목사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생각지 않고 대등한 관계이고, 장로들은 교인들의 대표로서 목사에게 교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인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도 교인들과 장로들을 위로하고 수고를 격려하며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양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성경 율법으로 종노릇시키고, 노동으로 부려먹고, 경제적으로 착취해먹고, 인격적으로 압제하는 대상으로 착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만일 목회자들이 교회 시무를 밥벌이로 생각하지만 않고, 언제든지 목회를 그만두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세만 가져도, 교회는 상당히 경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의 관계는 서로 목자와 양의 관계였고, 애정과 신뢰와 존경이 넘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과 장로들의 분위기 속에서 바울의 설교와 장도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바울의 고별설교라고 합니다.
18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when they had come to him, he said to them, "You yourselves know, from the first day that I set foot in Asia, how I was with you the whole time,
오매
ὡς δὲ παρεγένοντο πρὸς αὐτὸν,
when then they come to him
직역하면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왔을 때’란 뜻입니다.
‘오매’(παρεγένοντο)는 부정과거로서(they come)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바울에게 온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말하되
εἶπεν αὐτοῖς
he said to them
‘말하되’(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바울이 단호하게 말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여러분도 아는 바니
Ὑμεῖς ἐπίστασθε, ἀπὸ πρώτης ἡμέρας ἀφ’ ἧς ἐπέβην εἰς τὴν Ἀσίαν,
you know, from the first day on which I arrived in the Asis
이 문장에서 ‘여러분이’(Ὑμεῖς, you)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에 ‘여러분도’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는 바니’(ἐπίστασθε)는 현재로서(know) 현재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들어온’(ἐπέβην)은 부정과거로서(I arrived) 과거에 들어온 사실을 가리킵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πῶς μεθ’ ὑμῶν τὸν πάντα χρόνον ἐγενόμην,
how with you the whole time I was
직역하면 ‘모든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내가 지냈는지를’이란 뜻입니다.
‘행하였는지를’(ἐγενόμην)는 부정과거로서(I was) 과거에 처신한 어떤 확실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하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거역하지 않고 50킬로를 걸어서 바울에게로 왔습니다.
참으로 순종을 잘하는 장로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먼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바울 자신이 3년간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말하면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바울의 이러한 사역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고 증인으로 채택했습니다.
마치 사무엘이 선지자 사역을 그만두고 왕정 시대를 열면서, 자신이 선지자로 사역할 때 백성들의 것을 빼앗아 먹지 않았다고 말한 것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삼상 12:3)
그래서 바울도 20장 33절에서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회자들 중에는 교인들의 것을 탐하고, 빼앗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옷 가게 하는 교인 가게에 가서 옷이 참 마음에 든다고 자꾸 만지고 있으면, 옷 가게 교인이 목사에게 옷을 그냥 가져가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장사하는 교인 가게에 가서 무엇이 좋다고 자꾸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인이 직접 생산하는 것들은 조금 얻어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서 채소밭에서 채소 얻어가는 것이나, 감자 캔 데서 감자 얻어가는 것이나, 과수원에서 과일 얻어가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교인이 돈 주고 사 와서 장사하는 데서 자꾸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어떻게 전도하고 목회했는가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잘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 절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19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erving the Lord with all humility and with tears and with trials which came upon me through the plots of the Jews;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δουλεύων τῷ Κυρίῳ μετὰ πάσης ταπεινοφροσύνης καὶ δακρύων καὶ πειρασμῶν
serving the Lord with all humility and tears and trials
직역하면 ‘모든 겸손과 눈물들과 시련들 가운데서 주를 섬기면서’란 뜻입니다.
‘섬기면서’(δουλεύων)는 현재분사로서(serving) 항상 주를 섬기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τῶν συμβάντων μοι ἐν ταῖς ἐπιβουλαῖς τῶν Ἰουδαίων,
of the having befallen me in the plots of the Jews
직역하면 ‘유대인들의 간계로 말미암아 나에게 떨어진 (시험들 가운데서 주를 섬기고)’이란 뜻입니다.
‘당한’(συμβάντων)은 부정과거 수동태로서(having befallen) 바울이 과거에 유대인들에게 시련 당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1. 본 절에는 바울의 목회 자세 세 가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란 <겸손과 눈물과 참고 섬긴 것>입니다.
한 마디로는 섬기는 목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섬기되 주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물론 주님을 섬기게 되면, 주님의 몸 된 교회 성도들을 섬기는 목회를 하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섬기려 오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처럼 섬기신 주님은 베드로와 주의 종들에게 양들을 잘 돌보고 섬기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래서 바울은 주님을 섬기면서 복음 전도하고, 교회를 목회하는 데 있어서 자기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바울은 군림하고 억압하는 목회가 아니라, 섬기고 생명도 주는 목회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섬김의 목회는 3가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첫째로 겸손이었습니다.
19절에 <곧 모든 겸손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교인들 앞에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않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참으로 바울은 복음을 주고, 기도를 주고, 축복을 주고, 온갖 봉사와 시간을 주면서도, 교인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제품을 주면서 뺨 맞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세로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치 엄마가 자녀들에게 온갖 것을 주면서도 겸손한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모든 겸손>이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겸손했고, 모든 일에 겸손했고,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 앞에서 겸손하기는 쉽지만, 힘없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 앞에서 겸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서는 겸손할 수 있으나, 내가 잘 아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부분에서 겸손했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눈물 목회였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억울하고 화가 나서 한바탕 싸우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억울한 말, 모함하는 말, 오해한 말, 옳은 것을 비뚤어서 반대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화가 납니다.
어떤 때는 악의적으로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고,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대단히 화가 나서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의 가는 길은 세상적인 방법, 육신적인 방법, 원수 갚은 방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을 흘릴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가 아니었다면, 수십 번도 재판해서 감옥에 넣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 갚는 것을 포기하고 목회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목사도 그런데 하물며 위대한 사도 바울이야 얼마나 눈물 흘릴 일이 많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목사의 아내들은 스트레스로 병이 난 경우가 많습니다.
고린도전후서를 볼 때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반대하는 파를 만들어서 심지어 고린도후서에는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고, 말을 잘 못 한다고 비난하고, 헌금을 도둑질해 먹었다고 하고, 사도의 추천서도 없다고 비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커다란 에베소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울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3년이나 밤낮으로 눈물로 에베소 교인들을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과거에 시집살이하던 어머니들은 시댁에서 온갖 시집살이를 당할 때면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얼마나 눈물을 흘리면서 시집살이를 했는지 모릅니다.
셋째로 참는 목회입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소위 ‘인내 목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 전도를 방해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도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3차 전도 여행 때도 에베소에서 유대인들이 아데미 우상 숭배자들과 합세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19:33 참고).
이처럼 유대인들이 바울의 복음 전도를 방해하고, 죽이려고 할 때 바울은 얼마든지 로마 시민권을 이용해서, 유대인들을 법적으로 고소하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도자요 목회자이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목사들도 목회하면서, 억울한 일들을 당할 때면, 분명히 법적으로 고소해서 처벌할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목회자이기 때문에 참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동족이라고 특별 대우하여 먼저 복음을 전하고, 구제 헌금도 전했습니다.
그러나 동족인 유대인들이 더 바울을 방해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를 해보면, 일반 성도들이나 불신자가 방해하고 피해를 끼친 것 보다, 장로나 목사들에게 더욱 많은 해를 당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세상 법정에 고소할 수 없고, 그저 참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전도와 목회를 하면서 오래 참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오래 참고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처럼 자기가 오래 참는 것이 사도된 표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우리 주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서 군병들을 데리고 왔을 때, 베드로가 칼로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을 때,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제가 젊었을 때, 가족들과 함께 기도원에 갔는데, 어떤 서예가가 <이것까지 참으라>는 글을 써 주어서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아직 목회자가 아닌데도, 그 분이 어떻게 알고 그런 글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하여튼 목회자는 바울처럼 참음으로써 섬기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목회자뿐 아니라 교회의 중직자들과 성도님들도 크던 작던 <겸손과 눈물로 인내로 섬기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20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how I did not shrink from declaring to you anything that was profitable, and teaching you publicly and from house to house,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거리낌이 없이
ὡς οὐδὲν ὑπεστειλάμην τῶν συμφερόντων
how nothing I did shrink back of that being profitable
직역하면 ‘유익한 것은 어떤 것도 내가 숨기지 않았고’란 뜻입니다. withdraw
‘위축되지’(ὑπεστειλάμην)는 부정과거 분사인데(I did shrink back) 원형(ὑποστέλλω)는 ‘철수하다, 뒤로 물러나다, 뒤에 감추다, 피하다, 숨기다’(withdraw, draw back, keep back, shun, conceal)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익한 것’(τῶν συμφερόντων)에서 동사는 현재분사이고(being profitable), 원형(συμφέρω)은 ‘데리고 가다, 모으다, 유익하다’(bring together, collect; I am profitable to)란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τοῦ μὴ ἀναγγεῖλαι ὑμῖν καὶ διδάξαι ὑμᾶς
of that not to announce to you and to teach you
직역하면 ‘여러분에게 전하고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을 않으려고 (피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전하지 않으려고’에서 동사(ἀναγγεῖλ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announce), 단호하고 용감하게 알리는 모습을 가리니고, 원형(ἀναγγέλλω)은 ‘알리다, 선포하다’(report; announce, declare)는 뜻입니다.
‘가르치고’(διδάξαι)도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teach) 여러 가지 유대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가르치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δημοσίᾳ καὶ κατ’ οἴκους,
publicly and from house to house
1. 바울은 소극적으로 앞 절에서 말한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섬긴 것> 뿐만 아니라, 본 절과 다음절에서는 적극적으로 <유익한 것은 전하여 가르치고, 회개와 믿음을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남에게 유익한 것을 꼭 전달해주어야 하는데, 전해주지 않았으면 내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에게 유익한 것을 전해주지 않았다는 거리낌이 없이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거리낌 없이 다 전달해주었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저 사람에게 꼭 전도하고 싶은데 안 했다 싶으면 양심에 거리낌이 됩니다.
심방도 어떤 집에 꼭 심방해야 하겠는데, 안 하고 나면 마음에 걸립니다.
한참 젊은 시절에 서울에서 주인댁 부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그 분이 죽어버리고 나니 마음에 가책이 들더라고요.
남편이 하도 포악스러워서 부인이 병이 났는데, 그 부인이 결국 정신병으로 밥도 못 먹고 죽고 말았어요.
부인이 피아노도 잘 치고, 신앙생활도 하신 분인데, 죽어버리고 나니 많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어느 도시에서도 남편이 술만 먹으면 아내를 때린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이 몰라도 병원 신세를 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그 남편을 아버지 학교에 보내고, 주서택 목사의 내적 치유에 보내서 변화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익한 것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다 전했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유익한 것을 전달하는데, 장소와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장소이든지 남에게 유익한 것이면 전달했고, 누구든지 유익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전달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회당과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고, 또 공중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복음 전도를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유익한 복음 전도와 하나님 말씀 가르치는 일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전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내가 깨끗하다고 증언했습니다.
사도행전 20:26-27.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그 피 값을 너에게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21절.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lemnly testifying to both Jews and Greeks of repentance toward God and faith in our Lord Jesus Christ.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증언한 것이라.
διαμαρτυρόμενος Ἰουδαίοις τε καὶ Ἕλλησιν
earnestly testifying Jews both and Greeks
‘증언한 것이라’(διαμαρτυρόμενος)는 현재 분사로서(earnestly testifying) 열렬히 증언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τὴν εἰς Θεὸν μετάνοιαν καὶ πίστιν εἰς τὸν Κύριον ἡμῶν Ἰησοῦν.
the to God repentance and faith in the Lord of us Jesus
1. 바울은 에베소 3년 사역 동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필수 불가결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 회개와 신앙은 다시 말해서 율법과 복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 것을 절감하고 회개해야 하며,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믿으면 어떠한 죄인도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철저한 회개가 있을 때 그 만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받은 자가 일백 데나리온 탕감받은 자 보다 더 감사가 넘친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만큼 더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 일은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하는 동안 내내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더욱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깊이 통감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용서를 더욱 체험한 성도는 갈수록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더욱 주님께 충성봉사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희생적인 사랑과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의 모범적인 순종을 본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교회가 되시고, 모든 가정이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