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아십니까?
갈라디아 5:16~18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저의 아버지는 사냥을 좋아하셔서 늘 사냥개가 집에 있었습니다. 그 중에 쫑이라는 개는 명견(名犬)이었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부엌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듭니다. 그 때는 이 개가 쥐들이 다니는 것을 막아줍니다. 그렇지만 음식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주인이 주는 것만 먹습니다. 이렇게 영리한 개였음에도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개와 함께 나들이하게 되었습니다. 얼마쯤 갔을 때 길에 어떤 아이가 똥을 싸놓은 것을 개가 보더니 그리로 달려가서 그것을 냉큼 먹어 치우는 것입니다. 그때 개는 개로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알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 속한 인간이 하늘에 속한 생명체로 변환되는 것은 노력으로 애씀으로 되지 않습니다. 땅에 속한 인간은 죄에 붙들려 삽니다. 죄짓는 것이 자연스럽고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런 죄인에게 하늘에 신령한 말씀에 순종하라고 외쳐도 전혀 가능성이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성령에 의하여 가능합니다. 성령에 의하여 근본적인 생명의 변화가 있어야 땅의 속한 생명체가 하늘에 속한 생명체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하여 많이 듣기는 하지만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한 것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원인은 성령을 느낌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성령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서 성경의 흐름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수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하늘과 땅이 필요 없습니다. 더욱이 수만 가지 종류로 이뤄진 피조물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떤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로 압축해서 말씀드리자면 사랑의 대상을 만들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함임을 말 수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사랑의 대상인 인간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는 성경의 첫 페이지를 열면서 시작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안에 여러 피조물로 채우십니다. 그리고 후렴구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영어로는 “God saw that it was good.”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하시면서 그 분의 선하신 뜻이 성취됨을 확인하고 기뻐하셨다는 뜻입니다. 중국 고사성어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모든 만물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고 하시면서 ‘심히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it was very good’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런 표현을 하셨을까요? 자연 만물 안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려는 의도에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사람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만물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것이요, 아름다움은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스스로 사랑할 수 있고 아니면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는 의지를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구속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바탕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이루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정하셨다면 아들 예수님은 이것을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성취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이 성취하신 것을 우리 각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구원받은 성도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고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있을 때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소수의 사람과 제한된 공간 그리고 시간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과 동시에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다른’이란 영어에서는 ‘another’라고 하였고 헬라어 원문에서는 ‘알로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또 다른’이란 뜻으로 ‘모든 인품과 능력이 똑같은 다른’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은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모두 가지시고 영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야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도 이룰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단계에 대하여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도 내 노력과 수고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야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 하는 이유는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기 위함입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결정할 때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일까요?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내 안에 담긴 말씀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보고 암송하여 내 안에 말씀이 담겨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없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데 있어서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였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제 노후에 대하여 많은 염려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진 재산도 없고 연금도, 적금도 없습니다. 그러니 은퇴 후의 삶이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어 은퇴 후 퇴직금을 지급할 능력도 되지 않았고, 매월 사례비를 받을 형편도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먼저는 이런 감정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안하고 염려하는 것이 바로 육체의 소욕이기 때문이고, 마귀는 이 틈을 타고 들어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숨김없이 저의 감정을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내 안에 담긴 염려와 근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을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몇날 며칠을 기도하는 가운데 제 마음에 평안이 다가오면서 성령님께서 말씀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사 46: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계속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내 마음에서 하나님께서 내 노년을 복되게 하시고 보장하고 계심에 대한 확증이 생겼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성취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또 하나는 내 마음으로 인도를 받는 방법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좇아 살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게 되면 내 생각 내 판단에 의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생기 즉 영을 불어 넣어주심으로 만드셨습니다. 영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도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한 인식이 흐릿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에 물이 들어오면 전혀 이질감을 못 느끼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선택을 할 때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행할 때 평안이 주어지는지 아닌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사람의 노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