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을 '관광' 목적으로 떠나는 건 근대의 산물이다.
조선 때도 세조니 하면서 온천이 없지야 않았지만 질병 치료라는 특별한 의례에 불과했다.
질병치료에서 재미로 변환되는 건 자연스러운 이행 과정이 아니다.
인삼을 넣은 술이 아무리 좋다기로서니 대중적인 술이 되지 못한 것 처럼 말이다.
한때는 온양이나 부곡하와이가 신혼여행지로도 이름높았다.
그러나 신혼여행은 커녕 일반적인 온천 여행이 지금은 한국에서 거의 사라진 걸로 보인다.
일본은 여전히 온천이 성행하는데 그 이유 중에는 높은 습도와 살을 에는 추위에도 있다는 걸 보면,
여행의 방식과 목적은 환경이 결정하는 걸로 볼 수도 있겠다.
아래는 1965년 새해맞이
아무나 할 수 없었던 2박3일 온양온천과 덕산온천 여행 안내지이다.
70년대 안내지는 그동안 많이 수집했는데, 60년대는 그리 흔하게 보이지 않아 가치가 높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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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서울신문사 관광부가 주관하는 양력 1월 1일부터 3일까지 온천순회 관광안내지이다.
양력 1월 1일이 금요일인 건 1965년과 1971년인데 여기서는 1965년이 되겠다.
정원 30명에 2박 3일 회비가2000원이라는게 결정적인 이유이다.
경향신문 관광부에서 1964년 3월 23일낸 홍보기사에 의하면,
서울에서 유성온천행 1박 2일이 1,300원이라는 걸 보면 짐작할 수 있겠다.
기사에 의하면, 명승고적의 탐승., 수학여행, 산업공장의 단체견학 그리고 서울구경 등이 제시된다.
명승이 먼저냐 고적이 먼저냐라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만한 문제인데,
->여기 <- 를 클릭하시면 지난 세월동안의 변천 과정을 생각해 볼 실마리가 되겠다.
이미 1960년대에도 수학여행에는 명승고적과 함께 '산업화단지'가 팩키지였고,
지방학교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서울로 많이 왔었다는 걸 알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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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여행은 사실상 일제 때 붐이 생겨났다.
설악산 매니아라 해도 오색 온천이 일제 때 개발된 건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해방전 민속학계의 태두라고 하는 송석하가 '설악정복'에서
설악을 올라 오색으로 내려오면서 온천을 하고 연계탕에 막걸리를 마셨다고 하고 있다.
가로수로 소나무를 식재하니,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개명하니 하던 김현풍 강북구청장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김용재로 제헌의회 의원이었고, 형제가 다들 대단하다..
김현창은 스페인어과의 원로로 서울대 교수를 지냈고, 김현욱은 4선의원이다.
김현창이 1960년대 초 신혼여행으로 온양온천을 다녀왔다고 적고 있다.
그런 곳을 신정 연휴동안 자그마치 2박 3일여행으로 소개하는 안내지라는 것.
그때 그 시절 그런 추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 지금 얼마나 있을까.
유성온천. 동학사, 공주산성 갑사. 덕산온천. 수덕사가 당시 대표적인 명승지였다.
계룡산이야 일제때 경부고속도로로 인해 전국적인 명망이 있었는데,
특히 수덕사는 주목할만한 관광지였다는 것.
당시에는 경부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이라 이렇게 꼼꼼한 시간 스케줄이 의심이 들 수도 있겠는데,
자동차가 귀한 시절이라 지금보다 시간이 더 정확했다는 것.
그들은 매일 온천을 하고 등산과 관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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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신문사들이 국내외여행을 진행하고 있는데,
서울교통공사 에서도 관광부와 산악부가 있어서 지역소개 및 수익사업을 진행했었다.
6,70년대에는 이게 흔한 풍속도였다.
이상 지금은 사라졌지만,
1965년 그때 그시절 온천을 중심으로 했던 우리나라 등산관광 풍속도를 한번 보았습니다.
표적인 계몽주의자인 황교익이 '불고기'라는 용어가 생겨난 건,
20만년의 화식(火食)역사를 돌이켜 보아야 소용없고, 일제라는 독특한 시대에서 가능했다고 말하듯,
온천도 마찬가지이다.
첫댓글 잘 감상합니다. 옛 추억!
항상 이렇게 댓글로 힘을 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완연한 가을날씨이네요. 주말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