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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실크로드 문명기행
저-정수일
출- 한겨레 출판
독정-2019. 8. 3.
· 짜이지엔(다시 만납시다) 베이징!
·흔히들 시안(장안)을 실크로드의 동쪽끝,혹은 출발지로 알고 있다.
·막고굴에 남은 불후의 화폭은 모두 천대받던 민초 화공들 손끝에서 나온 걸작들이다. 인류 거룩한 문명은 모두 노동하는 민초들이 만들었다.
·민족 다양서보다 문화적 다양성은 폭이 더욱 넓다. 그 중심에 종교가 있다.
·비이슬람적 민간신앙에 현혹된 일부 무슬림들은 불상의 눈을 흉안, 아이눈 랏마로 착각하고 불상의 눈을 도러내는 만행을 한다. 한 대 중국 땅을 공포로 몰았던 홍위병의 난동도 문명파괴에 대한 단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면은 자연환경이 유리한 곳에 탄생한다. 나일강을 비롯한 세계 4대 강 유역에서 가우물리 범람해 기름진 땅을 만들어 유리한 환경이 되고 인류가 그곳에서 고대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영국의 문명사가 토인비는 이의 상반되게, 문명을 불리한 자연환경의 도전에 인간이 성공한데서 탄생한다는 문명 탄생의 도전과 응전 원리도 있다. 높은 산과 울창한 수림이라는 어려운 환경 소겡서 태어난 마야나 잉카 문명을 토인비의 이같은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투루판의 명물-
주위는 만년설로 뒤덮인 고산지대이고 당은 해면 이하로 움푹 패어 강풍이 불어대는 데다가 바‘싹 마른 사막 속 오아시스 분지다. 한여름과 한겨울의 기온 차는 무려 60~70도 증발량은 강우량의 180배다.
·신장의 축소판 카슈가르에는 눈처럼 하얀 소금이 물기 없는 푸석푸석한 땅바닥에 겹겹이 깔려 있다.
·중앙아시아 어디를 가나 말 형상화 구조물은 말이 국가적 상징, 건물의 장식물, 길 표시물로 등장, 형상도 날래 달린 천마,. 대지를 주름잡는 준마, 앞발을 치켜들고 표효하는 용마 등 다양하다. 말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영매체로, 성인의 탄생을 알리는 예시 동물로, 수호신으로 여기고 숭상한다. 초원에서 한혈마(땀과 피를 흘리는 말)같은 전설적 명마가 생겨나 말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옛날 대원국에는 하늘에 닿은 높은 산이 있어 그 위에 천마가 내려와 노니는데, 이를 못 잡아 산 알에 오색 암말을 풀어놓아 암내를 피워 천마가 내려와 교배를 해 새끼를 낳아 천마자라는 한혈마의 조상이 되었다. 하루에 천리씩 달린다는 천리마(빙댝의 상징)
오른편 탈라스 강의 물줄기를 사이에 두거 저 멀리 탈라스 연산이 바라보이며, 왼편은 카자호스탄과이 국경선인 알라타운 산맥의 멧부리들이 우중충하게 늘어섰다. 이 두 산맥 사이의 오지는 천혜의 방복지다. 한 시간쯤 달리자 이삼십 마리의 말떼가 나타난다. 윤기 흐르ᅟᅳᆫㄴ 검붉은 갈색 털에 미끈하고 탄탄한 몸대다. 채찍만 들면 금방이라도 갈기를 휘날릴 당찬 기상이다. 산봉우리들이 구름바다 위에 두둥실 뜬다. 말은 기마 유목민들에게는 숭상의 영물이며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가 밑천이다. 기병은 전력의 중추역할을 해왔다.삼국지에는 붉은 몸체에 토끼처럼 날쌘 말이라는 듯의 적토마가 있다. 이 말은 동탁의 것인데 정원을 살해하기 위해 부하 여포에게 준다. 그후 여포가 살해되자 조조가 받아 조조는 항복한 관우에게 선물로 준다. 관우가 죽자 오나라 마충이 가져가 먹이를 거부해 며칠 후 굶어죽는다. 두보는 ‘푸른 실로 머리르 동여매고 그대(주인)를 위해 늙고 있으니 어느 인연으로 다시 사움터로 나가리오라고 주인과 함께 더 이상 싸움터로 나가리오“라고 더 이상 싸움터로 가지 못하는 늙은 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조선 광해군 때 부원수로서 만주 정벌하던 충무공 김응하 장군은 전사 직전에 옷에다가 유서를 써서 애마가 고향에 전하도록 한다. 애마는 머나먼 요동으로부터 가원도 고향까지 찾아와 임무를 다한 후 북녘에 묻힌 장군을 그리며 굶어죽는다. 인간이 못지않은 영물의 충절이다. 말 조상은 약 5800만 년 전에 아멜카 대륙의 북부와 중부에 나타난 페나코두스라는 키가 50여 센티미처밖에 안되는 동물로서 발가락은 5개였다. 여유만큼 키가 ᄏᅠᆽㅣ면서 발가락은 4개로 줄어 오늘날 말처럼 단굽 모양이 된 것은 약 200만 년 전이다. 말이 가축으로 길들여진 것은 신석기시대인데 처음은 식용이었다.
책명-실크로드 문명기행마드라사의 맞은편에 주마 마스지드(모스크) 사원이 이/ㅅ다.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에 집단 예배를 보는 대 사원 한 켠의 도서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경젅 사본이 있다. 이 경전 사본은 ‘오스만 본’이라 하며 이슬람교 경전의 정본이다. 1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패자 키무르는 이라크 정복으로 이 정본을 전리품으로 가져다 애첩을 위해 세운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눔 사원에 보관했다. 지금오 이 사원 안들에는 이 정본을 전시했던 커다란 대리석 전시대가 남아 있다. 정봉는 338족 글씨는 누르스름한 얇은 사슴가죽에 나무 편으로 나무 액을 사용해 썼다.
·한국 문화의 전도사 고려인들
일제의 조선 강점과 3.1운동을 계기로 농민과 독립지사들이 러시아 극동지역에 대거 모여들면서 1920년대 말에는 그 수가 25만이다. 1937년 하겨울에 18만의 무고한 극동 한인들이 한 달간 수송열차에 실려 낯선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송. 주로 카슈켄트와 카자호스탄의우스토버 부근의 ㅎ뢍막한 사막에 내려진 그들은 움막을 쳐놓고 삽과 곡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해 벼농사를 짓고 목화를 가꾸며 가까스로 연명해왔다.오느날 우리가 만나는 고려인이 바로 그 망국유민들의 2,3세다. 사슬릭(꼬치구이) 굽는 냄새, 좁은 계단을 비집고 올라가니 돔형의 2층 대형 건물이 중앙상가다. 토산품에서 일용품까지 없는 게 없다. 큼직한 배추 포기에 발간 고추물이 제법 짙게 베어 먹음직스럽다. 고려인들이 거친 이역 땅에서 삶을 일궈낸 고달픈 역정은 억척같은 의지와 근면으로 우리 겨레의 얼과 혼을 만방에 빛낸 자랑스러운 민족사이기도 하다. 영국 여행가이자 지리학자 비숍의 저서 <한국과 그 이웃 나라>에 “그는 조선의 가난과 상류층 의 ㅁ방탕을 보고 한국의 장래에 절망했는데 러시아 한인촌을 가보고 자신의 오판을 후회했다면서 조선 사람은 ”박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라고 했다. 한인촌을 일궈낸 고려인들의 후예가 바로 이들 카레이스다. 주로 벼농사에서 출중한 위훈을 세운 중앙아시아 고려인 출신들이 여러 명, 1945년부터 1991년 구소련연방아 해체 될 때까지 중앙아시아를 비롯ㅎ 14개 민족이 운영하는 콜호즈(집단농장)에서 650명이 노력영웅이 나와‘ㅅ는데 총인구의 1퍼센트밖에 안되는 고려인이 139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김병화는 사막에 삶으 둥지를 틀어 집단농자을 이끌려 다수확 벼농사를 성공. 지금도 고려인 700명을 포함해 3천 명 구성ㄹ원으 농장에 각종 복지시설이 갖춰져 ”이 ’땅에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차잤(찾았)다.‘라는 한글 내리걸게 구호가 걸려 있다. 벽에는 온통 고국의 글미이며 엽서며, 노리개로 꾸며 놓았다. 멀리 길가까지 나와 손 저으며 아쉽게 바래주었다. 우리 모두는 한 피붙이기에 눈에 선하다. 이곳 타슈켄트에는 소설자 조명희의 <낙동강>이 있는데 거기에 “필경엔ㄴ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라는 문구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반일활동 하다가 1928년 구소련에 망명해 작품 활동 중 무고한 죄목으로 1938년에 감옥에서 처형된다. 귀곡계천(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긴다. 뜻이나 먼데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말로 ‘집 떠난 사람을 더 생각하라’는 훈계이기도 하다. 일본이나 미국 사는 한인에게는 재일교포니 재미동포니 하면서 한겨레임을 과시하나, 중앙아시아나 중국 사는 한인에게는 그런 온정에 인색하니 냉전전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려 피마저 흑백을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나 않은지 그글이 고국에 가고 싶짐ㄴ ”언제 가곗소!“ 하는 말이 한 맺힌 하소연이다.
·티무르는 녹색 도시라는 뜻의 사흐리사브즈 부근 마을 한 가문에서 태어나 지금은 널따란 광장에 티무르 동상이 있고 악사리아 궁정 잔해가 있다. 이 궁전은 1380년에 짓기 시작해 티무르가 죽은 해인 1405년에 완공했다. 궁전 기둥에는 “누가 내 힘을 의심하면 내가 지은 이 궁전을 보여 주라.” 호기어린 한 마디가 아랍어로 새져져 있다. 화려함이 자신만만하다. 악은 백색, 사라이는 궁전이라는 뜻. 페르시아 타크리트 성채를 공격할 때는 적병을 모조리 살상한 후 자른 머리로 피라미드를 ‘상하 시중하고 호라산을 점령하고은 연와와 석회 속에 ㅅ람을 생매장해 성벽을 쌓았다.
‘구르 아미르(지배자의 무덤)는 일화가 있다. ’티무르이 무덤에 손 대지 마라. 손 대면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경구가 적혀 발굴단은 실없는 망언이라며 노인을 쫓아냈는데 그 이튿날(22일) 히틀러가 독소 전쟁을 일으켰다. 그후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은 티무르 무덤에 손댄 탓이란다. 이것은 티무르에 대한 절대적 숭배이거나 전화에 찌들어 전쟁을 피하려는 염원의 반영이다.
·아프사안 궁전 벽화
복식을 보면 상투머리에 모자를 쓰고 새 깃 조우관을 쓰고 있으며, 무릎을 가릴 정도으 긴 황색상의에 허리엔ㄴ 검은 색 띠를 두르고 헐렁한 바지에 끝이 뽀족한 신발을 신고 양손은 팔짱을 기고 있는데, 이런 복식은 당시 국내외 고분벽호ㅘ에서 나타나는 한국인들의 복식과 일치한다. 차고 있는 큰검은 한국, 고구려인들이 쓰던 환두대와 형태가 같고 그 특징은 머리가 둥그스름하고 칼 콧등이 크며 칼집에 M자 형 장식이 있다.
세월 흘러 색은 바랬지만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사절도는 1300여년 전에 첫 한국(고구려)사절이 중앙아시아에 갔음을 오롯하게 말해준다.
<제지 공장> 주원료는 아마나 면화나무며 그런 전통은 지속되어와 지금은 가끔 면화 나무를 쓰다가 뽕나무를 주원료로 쓴다. 마른 뽕나무를 태워 만든 잿물 속에 넣어 6~7시간 끓인 다음 나무판 위에 놓고 가볍게 두드려 섬유질이 풀어지게 하곤즌 물로 깨긋이 씻는다.
씻어낸 섬유를 체에 걸러서 물기를 뺀 다음
널어서 구덕구덕해지게 말린다.
롤러나 두 널빤지 속에 끼워압푹해 물기를 말끔히 빼낸 다음
나무판 위에 널어 말리면 애벌 종이가 된다
그 후 조개껍데기로 문지르면 반들반들해지고 윤이 나며
암염가루룰 약간 뿌리면 글씨를 쓰거나 그림 그릴 때 앞뒤가 비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흰 종이는 눈을 자극하기 때문에 요즘은 주로 황지를 제조, 고서 복원이나 전송에 쓰고 전통 그림을 그리는데도 쓰인다. 이 공장에서 만든 두 가지 종이와 사료인 마른 뽕나무 섬유를 선물로 받았다.
·다른 곳에서는 빛이 하늘로 내리 비치지만 부라리에서는 빛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 비친다.도 시 전체는 20미터 문화층의 하층은 기원 전 4세기부터 기원 후 4세기까지의 고대 문화층이고
상층은 7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중세문화층이다. 지금 지상에 나와 있는 여러 유물은 원래 지층에 묻혔던 것을 파헤쳐 찾아낸 것들이다.
·경전 쿠르안을 보면 알리의 첫 계시가 바로 “읽어라, 창조주이신 알라의 이름으로”라는 한 절이다. 이것은 알 리가 무지에서 벗어남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쿠르안은 이 절의 명령형 동사 ‘읽어라’의 어근인 읽기나 읽음이라는 뜻이다 교조무함마드는 문도들에게 읽고 쓰기를 배우며 지식인을 존경하라며 전쟁 포로 한 사람이 무슬림 어린이 10명에게 읽고 쓰기를 깨우쳐주면 곧 석방했다. (움을 중시한 것)
·심신의학법으로 한 왕자를 치료한 이야기
-망상증에 걸린 왕자는 자신이 소라고 믿고 소 울음소리를 내며 자기를 잡아먹어 달라고 애원
이븐 시니는 도살꾼으로 가장하고
“왕자가 너무 여위어 앙상하니 우선 살찌워 놓아야 잡아먹을 수 있다.”
하자, 왕자는 마음껏 먹다 보니 병세는 말끔히 가시고 건강이 회복되었다하여 심신의학법의 효험이라 한다.
·갖가지 과일, 채소도 푸릇푸릇 무르익고 있다.
·집시는 영국인이 만들어낸 타칭으로 이집트에서 온 사람인줄 알고 이빕션한 것이 어두움이 말소되어 집션. 즉 집시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보혜미안이라 한다. 스페인에서는 집시의 유랑 생활을 금지한다며 그들을 추방하거나 종신형에 처하고 귀를 자르기도 했다. 구성진 플라망고에는 모든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란의 구텐베르크가 가차투르가 만들어낸 이 금속활자 인쇄기 현물을 월척이나 낚은 듯 보배시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발명한 금속활자의 서방 전파 문제의 해결에 빛ㅇㄹ 준다. 한국은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과 금속활자본을 함께 품고 있는 인쇄문화 선도국이다. 아직 우리를 헤치고 초유의 발명으로 잠곳 알려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주조는 고려 최초의 금속활자보다 200여 년, 그 첫 인쇄본인 <42행 서서>는 흥덕사의<직지>보다 78년 뒤의 것이다. 2005년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시회에 우리와 독일 학자는 “새 발견, 활자로드를 찾아서”라는 제하의 국제학술모임을 하고 처음으로 금속활자 인쇄와 그 전파에 관한 학문적 접근으로 주빈국으로 의미 있는 모임이었는데 국내에는 보도 한 마디 전해지지 않았다. 문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한 최고의 발명품이며 알파벳은 지식을 특권츨 독점으로부터 만민공유로 유도한 평등과 민주주의의 촉발제였다.
·점토판 문서란 진흙을 물게 개어 여라 크기 판을 만들고 굳기 전에 대나무같은 예리한 도구로 글씨를 눌러 쓴 문서다. 이런 점토판은 햇볕에 말리거나 뜨거운 불에 구워내면 돌같이 단단해진다. 최초 문자는 점토판 쐐기문자로서 장장 3천 년 동안 쓰였다. 이런 체계화된 알파벳이 있어 비로소 그토록 많은 점토판에 문서를 기록했다.
· 2차 대전 계기로 공군 조종사들의목격담에 의해 방주의 실체가 재론. 1916년 늦여름, 러시아의 한 항공 군견데 로스 코비카 중위는 실험비행을 하다가 아라피트 산 남족 시슭의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동그스름한 지붕으로 덮인 배 한 척을 발견-대장과 함/개 현장 확인 후
그 내용을 로마높 황제에게 보고-황제가 파견한 2개 중대와 탐험댄ㄴ 한 달 만에 몇 백 개의 칸막이가 달린 소나무 배를 발견
크기도 재고 사진도 찍었다.
으듬해 황재에 보고된 사진과 보고서는 그 해에 일어난 구소련의 시월 혁명 와중에 소실-
2차 대전 기간에 소련공군이 이곳을 확인하려고 부하를 보내 정찰했는데-
얼어붙은 호수가에 반쯤 파묻힌 화석으로 변한 길이 120미터의 평저선 모양의 네모난 배를 발견
1955년 프랑스 탐험가 나비라는 아라라트 산에 올라 해발 4ㅊ언 미터 지접의 얼음 구덩이에서 검은 역청이 칠해진 1.5미터 길이의 나뭇조각을 가져와<내가 손으로 만진 노아의 방주> 책을 출간.
같은 해 미국지구자원탐사기술위성이 아라리트 산 위 740미터 상공에서 어렴풋한 물체를 찍었는데 방주와 같다는 설-당사국 터키는 화산암이 침식되어 우연히 배 모양을 나타낸 것이라 함
최근 일간지는 디지털글로브 사가 2003년에 찍은 위성사지능 공개하며 높이 4663미터의 아라라트 산 허리에서 발견한 인공 구조물이 길이와 너비의 비율에서 방주와 같다는 점을 들어 방주일 가능성을 주장
최근 이란 테헤란 서북쪽 엘부르즈 산 정상 부근 고도 4천 미터에서 노아의 방주로 추정. 나무배를 발견했다고 미국 한 성서연구단체가 발표. 어찌보면 영원한 수수께끼로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로 풀어나가는 것이 순리
·터키 카파토키아(아름다운 말이 있는 곳이라는 뜻) 호수는 넓이가 1500평방킬로미터. 바다였다가 물이 빠져서 생긴 찬물호수로 겨울엔 물이 2미처터 차지만 여름이 되면 증발해 소금으로 남는다. 발밑 흰 모래소금이 흐슬부슬 바싹거린다. 10센티미터쯤 파니 바닥은 약간 호졸근하다 .호숫가에 세워진 두 개의 소금 정제공장이 해마다 30만 톤의 소금을 걸래낸댜. 소금호수의 끝자락인 셀주크 시대 고도 악사라이(흰 궁전)호숫가에 세워진 두 개의 소금 정제공장속
오랜 세월동안 홍수나 비바람에 씻기고 깎이고 닳아져 천태만상의 신기한 모양, 새로운, 옹긋쫑긋 튀어나온 바위는 버섯, 도토리, 갓, 짐승 등 여러 모양이다. 여기 데란 쿠유(웅덩이라는 뜻)지하 도시는 해발 1355미터의 질펀한 고지다. 어린 목동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입구를 발견한 이 자하도시는 4년 후인 1965년에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임구에 들어서면 높이 150센티미터, 너비 60센티미터 통로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뚫려 몸집이 웬만히 큰 살마은 머리 숙인 채 모로 걸어야 한다. 엉금엉금 기어야 하는 길목도 수두룩. 도시 전체가 미로라서 길 잃기 일수. 일부는 천연동굴이지만 대부분은 용암을 파서 만든 인공 굴로 인구 2만을 수용했다. 지금껏 8층까지 발굴(55미터), 17~ 18층은 족히 되리라 추정 층마다 거주공간엔 부엌과 방앗간, 창고, 화랑과 학교, 교회당과 수도괸이 달린 세레 장소, 포도주저장고 같은 부대시설 흔적도 보인다. 깊이가 70~85미터에 달하는 수직통풍구가 52개. 횐기 뿐 아니라 내부 온도를 조절하느 구실도 한다. 현지 안내원이 어스름한 천장 구멍에 대로 라이터를 켜니 불꽃이 한쪽으로 발려간다. 통풍구가 아직 작동한다는 증거다. 요소마다 두께 55~65센티미터에 지름 170~175센티미터의 육중한 둥근 돌문을 설치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봉쇄한다. 이 지하도시는 북쪽으로 9킬로미터 덜어진 한 지하도시와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찾아낸 도시는 150개. 유물로 미루어 6~7천 년 전 신석기 시대에 원시인들이 바위를 뚫고 혈거생활을 한 이래 고대 히타이트인들이 처음 정주한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박해자 은신처가 되었다가 기독교가 합법화되자 수도나 포교 장으로 바뀐다.
·하란 땅에서 눈에 띄는 건 달걀 모양의 원추형 지붕 흙집이다.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로 높이 4~5미터의 흙집 겉면은 동물 배설물로 바르고, 지붕엔 빛이 들어오도록 구멍을 몇 개씩 뚫어 놓았다. 흙집이 몇 새씩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런 원추형 지붕은 천장 공기를 많이 확보하여 여름에는 뜨거운 열을 분산. 겨울에는 온기 저장고다. 그래서 여름에는 시원, 겨울에는 따뜻해서 사막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