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장비, 여포의 무기는 모두 창(矛)이었다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유비 관우 장비의 삼형제가 여포와 싸운 이야기)"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여 아마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예술화된 인물의 형상은 회사, 조각, 희곡등의 작품에서도 계속하여 나타난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였던 병기마저도 예술화되었다. 그리하여, 장비의 장팔사모(丈八蛇矛), 관우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여포의 방천화극(方天畵戟), 그리고 유비의 쌍검(雙劍)은 그 자체로 사용하는 사람을 대표하는 무기가 되어 버렸다. 나관중은 이들 네명이 이 무기를 들고 서로 말을 탄 상태에서 서로 싸우며 돌아가는 모습을 아주 실감나게 그렸다. 그러나, 삼국연의는 어쨌든 3푼이 사실이면 7푼은 허구인 소설이다. 명나라때 사람의 사고방식으로 2천년전의 전쟁장면을 묘사하다 보니 시대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최근들어서의 온라인게임에서의 삼국시대의 무기설계는 예술화를 강조하다보니 더욱 황당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실제로 사용한 무기는 무엇인가? 그들은 도대체 어떤 병기로 싸웠을까?
장비의 장팔사모
장팔사모의 기원은 삭(槊, 긴창)이다. 동한의 유희가 쓴 <<석명.석병>>에서는 "창이 길이가 일장팔척인 것을 삭이라 한다. 말위에서 쥐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장비가 쓴 것은 기방이 사용하는 길이가 일장팔척인 긴 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모(馬矛, 말창)이라고도 한다. 한나라때의 1척이 약 23센티미터였던 것을 감안하면 길이가 약 4미터여에 이른다. 아주 가늘고 긴 창이다. 이런 병기는 동한 말년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군대에서 아주 성행했다고 한다. 자루가 길었으므로 말등에서 사용하려면 아주 높은 기술이 필요했다. 장비는 분명 이 방면의 기술이 뛰어났을 것이다. <<삼국지>>에는 "장기가 물을 막고 다리를 자르며, 눈을 부릅뜨고 창(矛)을 옆으로 한 채 소리쳤다: '나는 장익덕이다 같이 죽을 자는 오라!'" 영웅의 기개가 보인다. 근세 작가들이 장팔사모의 끝을 뱀처럼 구부러진 형상으로 그리는 것은 '사모(蛇矛)'라는 글자때문일 것인데, 실제로 사모는 그저 형상에 대한 비유이며, 가늘고 길다는 뜻을 나타내는데 불과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창끝이 뱀처럼 구부러진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후세인들의 묘사에 의하면 관우라고 하면 바로 청룡언월도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관우와 청룡언월도는 서로 하나로 완전히 융합되어 일체가 되었고, 없어서는 안되는 이미지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상 관우가 정말 칼(刀)을 가지고 싸웠는가? 한나라 말에, 기마병들은 칼(刀)을 가지고 전투를 했는데, 사용한 것은 모두 환수도(環首刀)이다. 이런 무기는 단병기에 속한다. 칼이 곧고 좁고 긴데, 길이는 약 1미터이다. 칼날은 한쪽만 있고, 호격이 없다. 자루머리는 모두 칼과 함께 주조하였으며 환형이다. 기병이 전투할 때, 쓰는 법은 현재의 마도(馬刀)와 같이 좌우로 휘두르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것이다. 관우가 칼을 썼다면 겨우 이런 칼을 썼을 것이다. 장병대도(長柄大刀, 자루가 긴 큰 칼)은 당송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관우의 언월도라는 이름은 북송때 <<무경총요>>에 처음 보인다. 당시의 전투명가들이 스스로 제작해서 다른 무기와 다르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다. 이런 칼은 매우 무겁고 일상적으로 무술수련할 때 쓰는 것이지, 전투할 때 쓰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관우는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삼국지>>에는 "조공(조조)가 장료와 관우를 선봉에 서게 했다. 관우는 마량의 휘개가 보이자, 말을 몰아 마량을 여럿 중에서 찌르고 그의 머리를 베서 돌아왔다." 관우와 동시대에 생활했던 진수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찌르다(刺)"는 말은 칼일 때 쓰는 것이 아니라, 창을 사용했을 때 쓰는 말인 것이다.
여포의 방천화극
사람들의 인상중에 방천화극은 찌르는 한쪽 측면에 초승달형의 짧고 굽은 칼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형태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북송 <<무경총요>>에서이다. 민간의 화가들이 장식을 좋아하는 것때문에 무기를 그릴 때 더욱 화려하고, 더욱 기괴할 수록 장식성과 엄숙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래서 그린 무기들은 자주 변형되고, 이상하여, 후세사람들은 자연히 아주 아름답게 만든 극(戟, 창)을 "화극" 또는 "방천화극"이라고 부르면서 시사, 희곡에서 썼다. 실제로 극(戟)이라는 것은 창(矛)의 중간에 옆으로 가지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이다. 즉, "복(卜)"자와 비슷한 창끝을 가진 무기를 말한다. 장극은 길이가 약 2 내지 3미터이고, 기병이 사용하면 "마극(馬戟)이라고 부른다. 전위(典韋)가 사용한 것은 보병이 사용하는 단쌍극(短雙戟)이었다. <<삼국지>>에서 여포의 원문사극(轅門射戟)의 이야기에서 진수는 명확히 말하고 있다. 여포가 영문에서 한자루의 극을 든 적이 있는데, 이것은 임시로 부하에게 빌린 무기라는 것을. 그러므로 극은 여포가 사용하던 무기가 아니다. 여포는 도대체 무슨 무기를 사용하였는가? 바로 창(矛)이다. <<삼국지>>에 여포가 동탁을 찌를 때 "숙이 극으로 찔렀다. 동탁이 팔에 상처를 입고 차에서 떨어졌다....'여포는 어디 있는가' 여포는 대답하며 창(矛)을 들고 동탁을 찔렀다."
유비의 쌍검
유비는 쌍검을 쓴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서한때부터 칼(刀)로 전투를 했는데, 이는 칼이 가진 장점이 점차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병들이 싸우면서 주로 내려치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칼등은 두터워서 검보다 힘이 있었고, 잘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기병은 칼로 전투를 하는 것이 점점 더 유행하였다. 동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칼과 검이 완전히 교체되어 검은 실전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저 귀족이 차고다니면서 노는 장식품에 불과하게 되었다. 유비는 일방의 수령이므로 친히 여포와 싸웠을 리는 없고, 그것은 소설가의 허구이다. 비록 친히 전투에 나섰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쌍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말의 등자가 나타난 것은 양진시대부터이므로, 당시에는 등자도 없다.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두 발로 말의 배를 조으면서, 두 손으로 무기를 든 다는 것이 가능하겠는지. 이런 기교는 서커스에서라면 몰라도, 전투에서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