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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세모(歲暮).
한해의 마지막 날.
송년이다 망년이다 하여 기억할 일도 잊어버려야 할 일도 많은 날이지만
이곳은 그러한 인간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 후끈한 열기로만 가득 차있다.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
자신의 마지막 꿈을 가지고 이곳으로 모인 많은 사람들.
부자가 된 사람도, 거지가 된 사람도
만상투인루의 마지막 축제인 최종 투신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약간의 술과 음식이 제공되었으며,
죽고 죽이는 비무와는 상관없이 관중들에게는 흥겨운 날임에 틀림없었다.
비무장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밀실.
귀조수(鬼爪手) 연동립과 광천마승(狂天魔僧) 요불
그리고 냉면살마(冷面殺魔) 종천수가 있었고,
그들 앞에는 제 몸 가누기 힘들 정도의 거구가 무엇인가 보고를 하고 있었다.
"우부전노(愚夫錢奴) 만여해가 백산이란 놈에게 금 사억 냥을 걸었단 말이냐?"
"넷! 통령 각하!"
총관인 서귀(鼠鬼) 주유태가 고개를 깊숙하게 숙이며
한시진 전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투신전(鬪神戰) 최종비무에 돈을 거는 곳인가?"
안을 볼 수 있도록 사방이 투명하게 처리되어 있는 실내의 측면 벽에는
백산과 광천마승 요불의 주요 전적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가장 위쪽으로는 붉은 글씨로 그들의 배당률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그곳에 패물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금포에
개기름이 번들번들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헉! 우부전노 만여해?"
서귀 주유태는 직감적으로 '이건 봉이다.'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부전노 만여해.
중원 삼대 거부의 일인으로 다른 거부들과는 달리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돈을 쓰는 인간,
수중에 가진 돈을 다 써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며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수재민을 돕는다는가 하는 빈민구제사업에는 단 한푼도 쓰지 않는 수전노이기도 하다.
또한 귀가 얇아서 수없이 당한 사기 탓에 우부전노라는 별호가 생겼지만
금력으로 만들어진 관부의 막강한 배경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사기를 친 사람들을 철저하게 응징해버려서
이제는 감히 그를 속이려 드는 인간은 없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서귀(鼠鬼) 주유태의 설득에 넘어갔는지
약간 긴장된 만여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광천마승(狂天魔僧)보다는 이 백산이란 친구가 실력이 낫다 이 말인가?
내가 듣기에는 광천마승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하던데…."
"아이고! 대인 그것이 다 속임수라니까요?
이곳의 소문도 못 들으셨습니까?
운수대통 다쇠불알 백산이 무공을 숨기고 들어온 고수라고 말입니다."
서귀(鼠鬼) 주유태는 이 돈 많고
세상물정 모르는 인간을 설득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수룩해 보이는 이 인간은 다 넘어온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딴소리를 해서 주유태의 속을 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천마승 요불 쪽에 이미 오억 냥이 다 걸려있어서
더 이상 걸 수 있는 금액도 없습니다. 대인!"
주유태가 최후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더 이상 광천마승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리라는 뜻이었다.
"또한 백산 대협의 배당률은 이십 배입니다.
투신전이 치러진 이래로 역대 최고의 배당률입니다."
주유태의 열변에 넘어갔는지 아니면 이십 배란 말에 혹했는지
만여해가 백산에게 걸 수 있는 금액을 물었다.
만여해의 의심을 덜어주기 위해서 백산에게 걸린 돈이 총 천만 냥 밖에 없는데도
삼억 냥이 걸려있다고 부풀려서 대답했다.
"그럼 나는 이억 냥 밖에 걸 수 없는 건가? 아쉽구먼. 조금 더 걸려고 했었는데."
조금 더 걸려했다는 만여해의 말에 주유태의 표정이 변했다.
"얼마를 거시겠단 말입니까?"
"이 정도면 어쩌겠나?"
만여해가 보인 손가락을 본 주유태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만여해의 손가락이 네 개였던 것이다.
"사, 사억 냥이란 말씀이십니까?"
주유태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의 생각대로 봉이 걸린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자가 자신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백산이라는 떠돌이에게 거금을 걸려하고 있었다.
"안되나? 그럼 어쩔 수 없이 내년을 기다려야겠군."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만여해가 자리를 털고 나가려 했다.
"아닙니다. 대인!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결국 주유태는 만여해가 백산에게 금 사억 냥을 걸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사람이 이곳 만상투인루의 지불능력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사억 냥을 걸었으니 백산이 이기게 되면 그의 몫이 팔십억 냥인데,
이곳에서 그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지 확인을 해야만 돈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관인 주유태가 지금 이곳에 와있는 것이다.
"연동립!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팔십억 냥 정도는 되느냐?"
"네.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다! 그럼 우부전노(愚夫錢奴) 만여해에게 확인을 시켜주어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만 대인! 저를 따라오시죠!
주유태가 만여해에게 금고 속에 있는 전표다발과 보석들을 보여주었다.
만여해는 많은 전표다발과 보석을 보고는
가타부타 말없이 자신의 돈 사억 냥을 기꺼이 백산에게 걸었다.
그 시각 백산은 다급한 표정으로 온 방안을 뒤지고 있었다.
"이것들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시펄! 분명히 이곳에 두었는데."
백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신 욕설을 퍼부으며 온방을 헤집고 다녔다.
"이놈아! 무얼 그리 찾고 있는 거냐? 시간 다 되었는데."
풍신개가 백산을 재촉하며 물었다.
"내가 먹던 약, 그 광혈단이 없어졌다고요.
분명히 이곳에 두었는데 없어졌단 말이요. 사람 미치겠네 이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침대 밑까지 확인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냐? 이걸 어쩌면 좋아?"
"뭘 어째, 이놈아! 그냥 그대로 나가서 비무를 해야지.
나도 네놈에게 돈을 걸었다는 것을 명심해라."
백산의 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풍신개가 낄낄대며 먼저 간다며 나가 버렸다.
"비무 시간 다 되었습니다. 백 대협!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백산이 있던 방을 관리했던 사람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그런 사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로 백산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데리러 온 인물을 따라 나서는 백산은
무엇인가 고민을 하는 듯했다.
"자네 이름이 장사라고 했나?
혹시 말이야, 내방에 있는 물건 누가 치웠는지 알고 있나?"
앞서가던 장사라는 인물이 흠칫 놀라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왜 백공자의 장을 치우겠습니까?"
그는 묻지도 않은 옷장 이야기를 했다.
백산은 빙그레 웃었다.
"남의 물건을 손을 댈 때는 그 만큼 각오도 했겠지? 뭐!"
장사라는 인물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본 백산은
자신의 품속에서 밤톨만 한 단환 하나를 꺼냈다.
"이것만은 복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장사라는 인물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백산의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지금까지의 광혈단(狂血丹)과 전혀 다른 색인
빨간색의 단환이 마치 악마의 눈빛처럼 빛을 뿌리고 있었다.
별것 아니었다.
광혈단 두 개를 뭉쳐서 빨간 염료를 바른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백산의 표정은 그 단환이 마치 엄청난 약이어서 복용하기를 꺼리는 모습이었다.
백산은 이내 결심이 섰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그 단환을 꿀꺽 삼켰다.
잠깐 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
백산을 쳐다보는 장사는 이제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했으나
변화되어 가는 그의 모습에 발이 땅에 붙어버렸는지 움직이지를 못했다.
섬뜩하게 변해가는 백산의 모습에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크악!"
백산이 바닥을 구르며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고,
그의 몸에서는 핏빛 혈광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참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뒹굴던 백산이 별안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한 백산의 모습에 깜짝 놀란 장사가 주춤주춤 백산을 향해서 다가가서는
'공자님!' 하고 툭 건드려 보았다.
순간,
크앙!
괴성이 터져 나오며 마치 맹수가 연약한 짐승의 목덜미를 물어뜯듯이
백산의 오른손이 장사의 목을 틀어잡았다.
"크크크! 네놈이 감히 나의 물건을 훔쳤다 이거지?"
우두둑!
장사의 목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캬악!
다시 한번 괴성이 들리고 장사라는 인물의 팔다리가 그 자리에서 찢겨나갔다.
한 손에 목을 그대로 쥐고는 장사의 팔과 다리를 차례로 뜯어내고 있는 백산은
한 마리의 악귀 그 자체였다.
장사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가 그의 얼굴이며 온몸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으나
아는지 모르는지 장사의 사지를 뜯어내고 있던 백산이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웬 쥐새끼야?"
그의 왼손이 거칠게 휘둘러지며 혈광이 한쪽을 향해서 쭉 뻗어나갔다.
콰앙!
핏빛 강기에 부딪친 바위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뒤로한 채
비무장 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백산의 뒤쪽으로 장사의 피가 점점이 흩뿌려졌다.
"으음!"
백산의 장력이 강타한 바위 옆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피범벅이 된 물체가 일어섰다.
바로 살수의 제왕이라는 귀살(鬼殺) 마천득이었다.
귀조수(鬼爪手) 연동립의 명령으로 백산을 감시하던 마천득은
자신의 고통도 잊은 채 멀어지는 백산을 멍하니 쳐다보다
서둘러서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비무장의 관중석에서 올해의 철혈투(鐵血鬪)의 최종전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관중들은 경악하며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광천마승(狂天魔僧)이 기다리고 있는 비무대로 들어서는 백산의 모습이
완전한 혈인이었던 까닭이다.
철혈투(鐵血鬪)의 투신을 뽑는 마지막 비무이기에
저런 비상식적인 행동은 그들이 기대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은 눈과 코, 입의 구분이 안될 정도였고,
그의 의복에서 떨어지는 핏물이 비무대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비무대를 향해서 들어서던 백산이 광천마승(狂天魔僧) 요불을 발견하고는
'크앙!' 하는 괴성과 함께 거칠게 돌진했다.
흠칫 놀란 요불이 백산을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백산의 붉은 철구가 그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까앙!
살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닌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강불괴!"
관중석에서 외마디의 외침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운수대통이라 해도 이미 금강불괴인 광천마승에게는 승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천마승을 공격한 당사자인 백산의 얼굴에서는 동요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니 동요니 뭐니 하는 그런 감정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백산의 철구는 계속해서 광천마승(狂天魔僧)을 가격했다.
그런데 백산의 행동을 자세히 보면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백산은 처음 공격했던 타격점을 일관되게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금강불괴지신을 파괴시켜 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지 그의 심사를 알 수가 없었다.
칠 테면 쳐보라는 듯 가만히 있던 요불의 몸이 처음으로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계속되는 철구의 타격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표정이 단호하게 변했다.
요불의 몸에서 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요불의 신형은 금빛 운무 속에 완전히 가려서 보이지를 않았고,
금무 속에서 요불의 장엄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반야대승신공(般若大承神功)!"
금빛 좌불(坐佛)의 형상을 한 강기가 천천히 백산을 향해서 밀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은데도 모든 방위를 점하며
백산이 움직일 공간마저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애로워야할 부처 본연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백산의 눈빛처럼 부처의 얼굴에서도 시뻘건 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혈면(血面)에 금빛 몸체를 가진 부처,
장엄함과 사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것은 역반야대승마공(逆般若大承魔功)!"
관중석에서 두 사람의 비무를 보고 있던 풍신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악스런 외침을 토해냈다.
역반야대승마공.
소림사 창사 이래 최고의 영광이자 치욕의 산물이다.
소림 역사상 보리달마 이래로 가장 유능했던 육조 혜능,
그의 손에서 재편된 소림의 무공은
소림을 무림의 영원한 태산북두(泰山北斗)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찬란했지만
그가 반야대승신공(般若大承神功)을 역으로 해석하여 만들어놓은 무공은
한마디로 마공 중의 마공이었다.
창안하면서 스스로 익힌 마공(魔功)의 영향으로 주화입마에 들고 말았고,
자신의 사문인 소림에서 살육을 저지르는 참극을 일으켰다.
자결마저도 거부하는 마공에 의해 살육을 저지르던 혜능은
사부인 백타선사의 항마후(降魔吼)에 촌각(寸刻)의 시간 동안 정신을 차렸고,
자신의 손에 죽임을 당했던 사부의 시신을 안고 금마동(禁魔洞)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소림사는 그곳을 영원한 금지 구역으로 정했고,
위치조차도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저주의 마공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풍신개의 설명에 조천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동생은 괜찮겠죠?"
두 주먹을 꽉 말아쥔 조천영이 울먹거렸다.
"조 소저, 걱정하지 마시게.
무림에서 저 친구를 어찌해볼 수 있는 인물은 없을 테니까.
그것은 이 철목승이 장담하겠네."
조천영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으나
철목승도 긴장감이 흐르기는 매일반이었다.
차리리 상대가 고금오천무(古今五天武)라면 더욱 안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세에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소림 최고의 무공이 역반야대승마공(逆般若大承魔功)이다.
어쩌면 고금오천무보다 우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백산도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혈면금체(血面金體)의 좌불상(坐佛像)을 노려보고 있었다.
불타의 자비로움과 악마의 사악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더욱더 붉어진 혈광이 아지랑이처럼 넘실대며 백산의 주위를 감싸고 약한 바람이 일었다.
"캬-악!"
괴성과 함께 앞으로 튀어나간 백산이 좌불상을 향해 두 손을 거칠게 뿌려댔다.
붉은 광채에 휩싸인 철구와 광천마승의 좌불상은
두 사람의 중간에서 커다란 굉음을 내며 부딪쳤다.
콰-앙!
백산과 광천마승 두 사람이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뒤로 물러났다가
재차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허공에 떠있는 광천마승(狂天魔僧)의 금무(金霧) 속에서
또 다른 불상이 솟아나와 백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였다.
이번에는 입상(立像)이었다.
서 있는 자세 그대로 얼굴은 역시 핏빛이었다.
동체는 금빛으로 빛나고 머리 부분만 혈광으로 뒤덮인 부처형상의 입상은 괴기 그 자체였다.
자비로 세상을 구원하는 부처의 모습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시키려는 악불(惡佛)이었다.
아무런 외침도 없이 허공에 있던 백산의 몸이 회전하며 선풍각을 쏟아낸다.
연달아 회전하는 그를 따라 열두 개의 철구가 춤을 추고 있다.
오른쪽 다리에 있던 세 개의 철구가 입상불의 머리를 박살내고,
오른손을 따라서 돌던 세 개의 철구는 몸통을 갈라 버린다.
붉은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져 유성우를 만들며 사라진다.
다시 광천마승의 손에서 좌상불과 입상불이 동시에 쏟아지고
두 종류의 이십여 개의 불상이 백산의 전면을 포위하듯 밀려들었다.
백산의 눈에서 번득이는 혈광이 한결 짙어진다.
허공을 밟고 다시 튀어오르며 등각을 이용해서 철구를 위로 차올리고,
이어서 왼발을 이용한 편퇴(鞭腿)를 날린다.
또다시 이어지는 회선각,
그의 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리의 움직임과 함께 양손에 있던 철구들도 허공을 가르며 불상들을 박살내버린다.
붉은 얼굴의 불상과 붉은 철구들이 비무대 허공에서 돌고 있다.
한여름의 불꽃놀이 같았다.
한치의 밀림도 없이 허공을 유영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내려섰다.
"놀랍군! 나의 공격을 오십 초씩이나 받아내다니, 네놈의 정체가 뭐냐?"
광천마승(狂天魔僧)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감히 그의 무공을 받아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킥킥킥! 남들이 볼 때는 네놈을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야.
나의 연극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이거든.
그리고 오늘이 지나면 나는 거부가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그동안 나의 연극을 구경하느라 고생 많았다.
어떤가? 제물이 될 놈이 너무 오랫동안 버틴다고 생각하지 않나?"
백산의 제물이란 말에 광천마승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제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러면서도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인가?"
이내 놀라던 표정을 푼 광천마승이 백산을 쳐다보며 느긋하게 물었다.
이제 와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대세는 변함없다는 뜻이리라.
또한 누가 있어 저 전설의 사대금강마저 격파한 자신을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소림사의 방장이 와도 두렵지 않은 광천마승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는 뇌룡현(雷龍縣)의 건달 출신은
아무리 무공 실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그저 삼류건달에 불과할 뿐이다.
반딧불은 영원히 반딧불일 뿐 결코 태양 빛이 될 수는 없음이다.
"자신감이지. 네놈이 얼마나 뛰어나서 소림을 뛰쳐나왔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해.
개구리는 말이지 아주 지그시 밟아 죽어버리면 되거든. 힘이 하나도 들지 않지.
그리고 오늘부터 귀조수 연동립,
냉면살마 종천수를 비롯한 이곳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것이 이 백산이 주는 진리야, 이 혈맹 양반!"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을 들어주는 것처럼 백산의 말을 듣고 있던 요불은
마지막의 혈맹이란 말에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것도 알고 있었단 말이냐?"
요불에게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고 살기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알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야 시체라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을 텐데…."
금광에 휩싸여있던 요불의 몸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양손으로부터 나오던 혈면(血面) 불타(佛陀)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산을 향해서 두 팔을 들어올리며 공격자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금빛이던 동체가 차츰 붉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백산의 철구들도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다리와 팔을 이용해 묘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것이었다.
차올린 발 사이로 왼손의 철구가 지나간다.
왼손의 철구가 지나간다 싶으면 오른손이 옆으로 빠지고 있다.
마치 사지를 이용해서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숨죽인 관중석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다가오는 결말을 기다리며 두 사람의 한 동작 한 동작을 주시하고 있었다.
"철 동생, 지금 저 녀석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처럼 보이나?"
백산의 이상한 손놀림이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생소한 것 같기도 하자
풍신개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철목승에게 물었다.
분명 눈에 익기는 한데 무엇인지 정확하게 떠오르지가 않았던 것이다.
"글자예요. 천자문(千字文)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글자들 말이에요."
철목승의 옆에서 백산을 주시하고 있던 냉추렴이 대꾸했다.
천자문이란 말에 풍신개, 철목승, 조천영 등은 일제히 백산의 행동을 주시했다.
과연 그랬다.
휘둘러지고 있는 열두 개의 철구는 글자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쳐다보는 그 순간에 백산의 철구는 불(佛)자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단순한 글자 앞에서 사기(邪氣) 가득한 혈불상(血佛像)이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다시 백산이 허공에다 파(破)자를 쓰자
허공에 머물러 있던 혈불상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그것을 본 철목승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어떻게 저런 것이…."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허공에 그리는 단순한 글자에서 죽음의 기운이 쏟아져 나오다니…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설마 저 정도 일 줄은 미처 몰랐다.
조천영을 치료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크게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지금 백산이 보이고 있는 저것은 자신의 투기 자체를 사라지게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의 경지를 무어라 표현해야 하나?"
백산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철목승에게까지 이런 소리를 들을지 몰랐던 풍신개가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백산 저 친구가 허공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알고 있을 겁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느끼지 못하고 있겠지만 저에게는 느껴집니다.
저 친구가 그려내고 있는 단순한 글자에서 가공할 만한 역세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말입니다.
조금 전 저 친구가 파(破)자를 새길 때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혈불상이 파괴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철목승의 말 그대로였다.
백산이 허공에다 새겨내는 글자는 그냥 글자가 아니었다.
천자문을 배운답시고 허공에다 글을 새길 때 그의 사부인 팽무도가 말리지 않았던가!
그때의 가공할 위력이 지금 발휘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저 친구의 머리입니다.
저를 비롯한 그 누구도 본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죠."
"저 녀석의 본 실력은 누구도 모르는 게 맞아.
머리 좋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지만…
가르친 사부도 저 녀석의 실력을 완전히 모르는데 뭐! 저 자신은 알려나 몰라…."
결정타였다.
풍신개의 이 말에 그곳에 있던 세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물끄러미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것은 광천마승(狂天魔僧)도 마찬가지였다.
저것이 무슨 개 같은 무공이란 말인가!
저놈이 그려내고 있는 한 글자에 자신이 쏘아낸 기운이 소멸되어 버렸다.
또 한번의 손짓에 밀려오는 한기,
한기(寒氣)가 온다싶으면 어느 사이 극양(極陽)의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이런 기운을 다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어쩌란 말인가!
요불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육조 혜능 이래로 소림의 최고 기재였다.
아니 혜능보다도 더 뛰어났다.
그와 같은 무공을 익히고도 나는 주화입마에 들지 않았다.'
요불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금광이 서서히 혈광으로 변해갔다.
굳어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있는 요불의 귀에 백산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요불!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은데 이왕이면 좀 세게 쳐주지 그래.
자네가 너무 약하면 연극하기 힘이 들잖아.
귀조수를 잡아야 되거든? 이번이 마지막 연극인데 협조 좀 해줘."
백산의 이 말에 요불의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 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렇다면 아예 가루로 만들어주마!"
요불의 표정이 괴기하게 변해가더니
잠시 후 혈광 속에서 커다란 악마지후(惡魔之吼)가 터져 나왔다.
"역반야대승마공(逆般若大承魔功)! 멸(滅)!"
그의 온몸에서 혈불(血佛)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좌상부터 시작해서 입상, 환희불, 고뇌불 등
갖가지 자세의 불상들이 백산을 향해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정확하게 백팔 개의 혈불상들이 온 비무대를 채우고 있는 광경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혈불상 하나하나에 전율적인 살기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혈불상을 쳐다보던 백산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리는 것 같더니
백산의 입에서도 거칠었지만 분명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천자문(千字文)!"
백산의 팔과 다리가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백산의 모습은 거의 시선에 잡히지도 않았고,
철구들이 남기는 붉은 잔상만이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중석에 있는 철목승에게는 선명하게 보였다.
백산이 휘두르는 손과 발에서 무수한 글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많은 글자들이 모여서 또 다른 하나의 거대한 글자를 만들어내는 것을.
파멸(破滅).
모든 것을 멸한다는 두 글자였다.
거대한 공간에 수놓아진 파멸이란 글자가 철목승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쿠앙!
백팔 개의 혈불상(血佛像)과 백산이 그려낸 글자가 충돌했다.
"크윽!"
"시벌!"
거친 욕설과 함께 백산이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가고,
요불은 그 자리에서 손을 뻗은 상태 그대로 서 있었다.
"누구냐? 누가 이겼느냐?"
관중들은 누가 이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승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자신이 잃었는지 땄는지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히 어느 누구도 소리를 치지 못하고 여기저기에서 침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충돌의 여파로 피를 뿌리며 뒤쪽으로 날아가던 백산이
비무대 한쪽 구석에 거칠게 부딪치며 떨어졌다.
그리곤 움직이지 않았다.
"와아-! 와…!"
"광천마승(狂天魔僧) 요불이 이겼다! 나는 이제 부자다!"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환희와 탄식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미 비무대에서 죽음의 혈투를 벌인 승자와 패자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돈과 앞으로의 꿈만 있을 뿐이었다.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있던 관중석이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숨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거지? 요불이 이겼으면 손이라도 들어줘야 되는 것 아냐?"
그랬다.
백산도 요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움직입니다. 루주님! 백산이란 놈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귀조수와 냉면살마가 있는 상층부의 밀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종천수의 말에 연동립은 황망히 창가로 다가가서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때까지도 요불은 손을 뻗은 채 그대로 서 있었고,
비무장 벽에 박힌 철구들 아래로 사지를 벌리고 널브러져 있는 백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백산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백산의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그의 양손이 앞으로 쭉 펴지자,
비무장 벽에 박혀있던 여섯 개의 철구가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이어 발에 차고 있던 나머지 철구들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 충격으로 인한 파장이 비무장 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오! 오! 우와! 와! 와!"
처음엔 놀람이,
다음엔 감탄이,
그 후엔 환호성으로 관중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퍽! 픽! 퍽! 퍽! 퍽!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요불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멈춘 듯 서 있던 요불의 몸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막아놓았던 물줄기가 터져 나오듯이 피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열두 개의 철구가 비무대 바닥으로 떨어지며 만든 진동에 의해서
지금껏 유지되고 있던 요불의 몸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퍼억!
핏줄기를 뿜어내던 요불의 사지가 공중분해되어 비무대 바닥으로 흩어졌다.
백산의 승리였다.
뇌룡현의 평범한 삼류 건달인 백산이 철혈투의 투신이 된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백산은 관중석을 향해서 자신의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
그 자리에서 천천히 쓰러졌다.
조천영이 쏜살같이 몸을 날려 백산을 안았다.
이어서 풍신개, 철목승 그리고 냉추렴이 뒤를 따랐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만상투인루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십 대 일의 대박이 터진 것이다.
관중들은 한결같이 운수대통 다쇠불알을 외치며 환호했다.
반면에 가장 상층부의 밀실에서는 귀조수 연동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병신 같은 요불 놈. 그깟 마단을 복용한 놈에게 그렇게 당하냐?
그놈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으아악!"
분노한 연동립의 괴성이 울려 퍼지고 내부에 있던 모든 집기들이 가루로 흩어졌다.
"백산 이놈!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가루로 만들어서 마셔버리고 말겠다. 이-놈!"
씹어뱉듯이 살기를 품은 귀조수의 외침소리가 밀실 안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