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간이 여리고성에서 범죄했다.
문득 궁금해진다.
아간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평소에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기는 하지만 기회만 오면 신앙을 버리고 한몫 챙겨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혹시 금과 은, 그리고 시날산 외투를 보기 전에는 다른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전남 영광에 있는 염산교회는 순교자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6·25 때 교인 2/3인 77명이 순교했다. 죽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돌이 목에 묶인 채 수장 당하기도 하고,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그 교회 교인들이 순교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본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전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찬송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수장을 당하면서도 허우적거리는 대신 그 찬송가를 불렀고, 죽창에 찔리면서도 그 찬송가를 불렀다.
염산교회는 1947년에 설립되었다.
교인들 대부분 예수를 주로 고백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은 교회에서 참 즐겨 부르는 찬송인데 예배 때만 부를 게 아니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난리가 끝났다.
1/3 남은 교인들이 모였다.
예배를 드리는데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은 차마 부르지 못하고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불렀다.
그때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은 분명히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킬 마음으로 불렀을 것이다.
혹시 우리가 예배 때 그 찬송가를 부른다면 과연 그때 그들과 같은 마음일까?
신앙이 있으면 그 신앙은 모름지기 환난이나 핍박이 있을 때도 나타나야 한다.
텅 빈 운동장에서는 운전을 할 수 있는데 차가 다니는 거리에서는 운전을 못하는 사람은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없으면 신앙을 나타낼 수 있는데 환난이나 핍박이 있을 때는 신앙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신자가 아니다.
환난과 핍박을 유혹으로 바꾸면 어떨까?
아간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금, 은이나 시날산 외투와 관계없이 하나님 백성이어야 한다.
그것들이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었는데 그것들이 눈에 띄는 바람에 별수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면 아간과 다른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간만 불합격이고 다른 사람은 다 합격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 금과 은, 시날산 외투가 다른 사람 눈에 띄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간은 3,400년 전 사람이라서 실감이 덜할 수 있다.
요즘 상황으로 바꿔보자.
지난 2019년 12월 2일에 환경미화원 A씨가 점유 이탈물 횡령 혐의로 광주 북부 경찰서에 불구속 입건되었다.
거리를 청소하다가 현금 일천 만원 뭉치를 주워서 몰래 챙긴 혐의다.
한 건설업자가 근로자들에게 지급할 급여를 실수로 흘렸는데 그것을 발견하고는 주머니에 넣은 것이다.
피해자는 당연히 신고를 했고 경찰은 현장 폐쇄회로 영상을 분석해서 A씨를 검거했다.
이런 경우에 A씨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였으면 당연히 주인을 찾아 돌려줬을 텐데 유독 A씨가 탐심이 많았을까?
아간의 범죄는 아간 혼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죄가 아간에게 투영된 것이다.
이런 아간에 대한 처벌은 심히 엄중했다.
아간만이 아니라 아간한테 속한 모든 것이 다 처벌 대상이었다.
아간이 숨긴 금과 은, 외투는 물론이고 아간의 아들들과 딸들, 아간의 소들과 나귀들, 양들과 아간의 장막과 아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온 이스라엘이 돌로 치고 불살랐다.
그러고는 후세에 경계하는 뜻으로 돌무더기를 쌓았다.
찬송가 323장에 나오는 아골 골짜기에서 바로 이런 일이 있었다.
아골 골짝 빈들에 복음 들고 간다고 찬송만 하지 말고 떡 한 접시 들고 아파트 옆집 문이라도 두드려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