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안학수 유고 소설 『머구리에서 무거리로』
무거리
무거리는 예전 집에서 명절 떡을 만들 때, 고운 떡가루를 얻기 위해 체로 치는데 그 때 체에 남은 거친 가루를 일컫는다. 어린 작가에게는 이 것이 '잔치에 들지 못하는 외로운' 것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무거리는 시루떡을 만들 때 가마솥과 시루가 닿는 틈을 메꾸는데 사용되고, 먹을 것 없던 시절 무거리가 떡이 된 시룻번은 아이들의 간식이 되었다. 작가는 소설집에서 우리 시대의 무거리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회 발전의 밑둥을 떠 받치면서 소리 없이 사라져 간, 사회 발전의 힘이 되어 준, 그러나 차별과 배제, 왕따와 무시를 겪으면서도 살아내온 무거리들. 작가는 말한다. 이 소설집에 '무거리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열리는 데 작은 일깨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을 조금 넣었‘다고.
머구리에서 무거리로
건준과 탱숙은 오래전 연인관계였다. 건준은 목회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탱숙도 그와 결혼할 것을 약속하고 교육대학을 들어가고 피아노도 배우고 신학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건준은 교통사고로 일가족을 잃게 되고, 작은 삼촌에게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뺏긴다. 이후 광부가 되어 돈을 벌어 목회 터를 살려는 계획을 갖는데, 고모부의 권유로 산 땅이 사기인 것을 알게 된다. 건준은 키조개를 캐는 머구리가 되는데, 사고로 잠수병에 걸린다. 서서히 근육이 굳어가는 그에게 탱숙의 오빠가 동생과 헤어질 것을 요구한다. 탱숙은 오빠의 말을 듣고 외국에 나가 있어 건준의 사고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귀국 후에는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녀는 오빠의 친구와 결혼을 했다. 그로부터 40년 지났다. 탱숙은 남편과 사별하고 건준이 사는 도시로 돌아왔다. 건준은 지역의 장애인단체 회장일을 하며, 꿋꿋하게 봉사활동을 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탱숙과 건준의 맘이 4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종말이 지나간 세상
선망조업 선원으로 장어잡이를 위해 먼바다에 열흘 동안 나가있던 재문. 경찰서에서 아동학대 혐의로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재문은 띠동갑인 22살 영선과 결혼해 살고 있다. 그녀에게는 40개월된 홍아라는 아이가 딸려 있었다. 재문은 아이를 사랑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가는데, 어느날 재문이 바다에 나가 있는 사이, 영선은 아이를 홀로 두고 집을 나간 것이다. 아이는 방치된채 사경을 헤매다 결국 죽었고, 영선이 재문의 재산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했음이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나중에 붙잡힌 영선에게 재문은 따져 든다. 적반하장으로 악다구니하게 나오는 영선을 보고 재문은 부동산 많은 노총각이 아니었다는 자신이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았다. '성정을 잃은 기계인간'을 믿은 것에 자책하고 만다.
조현병자의 아카페
봉해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반골 빨갱이다. 사사건건 지역정부의 시책에 반기를 들고, 전쟁반대와 평화실천을 주장하는 것이 꼴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주변에 깔려 있다. 장애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 사는지 오래여서 봉해를 아는 사람이 많이 있다. 헛헛하고 외롭고 억울한 맘으로 구장터 시장을 배회하는데, 거기서 50년 전 헤어졌던 경원을 만나게 된다. 경원은 외지 사람으로 어머니와 누이와 같이 이 도시로 어릴 적 이사왔다. 어느 날 봉해는 경원네 빚쟁이가 와서 설쳐댈 때 그의 아버지가 고정간첩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봉해는 당시 큰 형 봉학이 사모하는 현옥과 경원이 사귀는 것으로 경원을 얄미워하고 있었다. 봉해는 경원네가 빨갱이 집안이라고 소문으로 퍼뜨렸고, 이 사실을 안 현옥 집안에서 파혼을 선언했다. 이에 경원집은 타 지역으로 떠났고, 현옥은 음독 자살을 시도하고 그 후유증으로 몇 년 지나 사망했다. 경원은 연좌제로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나름 성공한 삶을 이루었다. 경원은 은퇴를 하고 옛 추억이 있던 도시를 찾아 온 것이다. 봉해는 지독한 빨갱이로 낙인찍힌 자신이 그 옛날 지독한 반공 아이였다는 것에 아이러니를 느낀다.
안학수선생님
은 올해 8월 3일 소천하셨다. 선생님은 전날 오후에 자신의 몸이 이젠 다 했다는 생각을 하시고 나를 불렀다. 저녁에 병원으로 찾아뵈었다. 생전에 서약해 논 장기기증과 신체기증을 실행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귀를 당신의 가슴에 대었다. 산소포화도와 들어가는 산소량과 말씀하시는 기운을 봐서 힘을 좀 내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당신의 말투에 어린이 같은 맑음이 깃들여 있다고 느꼈다. 안심하고 싶은 내 맘이 자물쇠 역할을 했나 보다.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가슴이 턱 내려 앉는 동시에 당신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 사람이 죽음을 넘어갈 때 쉬는 것이 목으로 쉬는 숨이다. 사람이 목숨을 끈질기게 잡으면 삶이 다시 살아난다. 당신은 방하착의 마음으로 목숨을 내 놓고 세상과 작별했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 세상에 한 줌의 흔적도 없이 가기를 당신은 소망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아니 못했다. 작은숲 출판사 강봉구대표는 소설을 흐르는 정서는 ’아름다운 슬픔‘이라 했고, 금강소설가 모임 대표 조동길 공주대 교수는 작가를 상징하는 것은 ’따뜻함, 평화, 치열함‘이라 했다. 나도 동의한다. 또한 다짐한다. 작가의 그 고운 동시와 치열한 글작업의 소산인 소설들이 빚어낸 생명, 평화의 정신을 꼭 안고 살아가겠노라고.
책익는 마을 원 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