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꼭지만 까맣게 말라붙은 어머니 가슴처럼
쩍쩍 금이 간 결마다 귀를 대 본다.
되직하게 풀먹여 바싹 말린 이불호청 서걱이는 소리
꽉 조였던 슬픔의 좁은 솔기 터지는 소리 들린다.
햇볕을 착착 아귀 맞게 접어놓고
수천 번 다듬이질로 갈무리할 줄 알았던
그 시절은 이미 전설이 되었고
없어진 그늘자리 같은 서늘한 기운만 남았다
완벽한 오체투지
세상에 젖지 않고 마를수록 저렇게
가볍게 자기를 던질 수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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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그 '정신적인 힘'은 물론 결말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른바 모든것을 포기하고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랑이다. 시인은 바싹 마른 장작개비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사랑이란 본래 부드럽고 따뜻하고 촉촉히 젖을 수 있는 감정의 어떤 실체이므로 딱딱하게 굳고 말라붙은 장작개비에서 그가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의외다(만일 그것이 타오르는 장작개비의 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에도 리비도로 상징되는 그 "불"은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기보다 이성애적 관능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내가 앞에서 지적한바 시인이 지닌 범상치 않은 상상력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만날 수 있다.
훌륭한 상상력이란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데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마른 장작개비에서 어머니를 보았던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불길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장작개비에서 어머니의 자기 희생적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시의 큰 틀이 이렇게 '장작개비'와 '어머니'의 통합된 의미로 구성되었다면 이차적으로 장작에 난 금이 늙은 어머니의 피부의 잔금에, 장작개비의 건조함이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에 비유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시인은 드디어 "세상에 잦지 않고 마를 수록 저렇게/ 가볍게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삶에서 이 속된 세계를 벗어나 순결하고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세상에 젖지 않고 마른 다는 것"은 곧 오염되지 않고 삶의 순결성을 지킨다는 뜻이다.
이인원의 시가 문학적 호소력을 배가시킬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려 하지 않고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둔다는 점이다. 독자가 그 메시지를 수용하건 아니하건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자유이다. 시인은 다만 그들의 상상력을 촉발시키는데 관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시들에서 시인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다만 사물이 대신할 따름이다.고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시들의 경우 시인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사적인 에피소드를 독자를 향해 고백하는 형식과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이이원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 대신 말해줄 수 있는 사물들이다. 그리고 이 사물들이야말로 또한 이 시의 상상력의 보고이기도 하다. 사물들의 말이란 간단히 사물이 지닌 상상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인용시의 경우도 자기 헌신적인 사랑, 혹은 순결한 삶이라는이 시의 메시지는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작" 이 말한다.
독자는 다만 장작이 들려주는 말(상상력)을 경청하고 자신의 감성으로 그것을 이해할 따름이다. 이렇듯 시인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인원의 독자는 자유롭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자유야 말로 우리를 편안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말을 들려주는 사물들이 독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같은 사물이라도 대함에 있어 생경한 것 혹은 전혀 모르는 것은 거부감이나 저항감을 보다 많이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인원의 이 시에서 제시하는 사물들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또는 매우 낯익은 것들이라는 점에서 독자들과 자연스러운 대면의 자리를 마련한다.
붉은 그물망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양파들의
둥근 어깨가/ 외롭다/ 서로 등 기대고 싶은......
채반 위에 가지런히 널린 표고버섯들의
가는 발목이/ 슬프다/ 꼼짝 없이 발목 잡힌......
어느 날 오후의 우리 집 좁은 베란다에 내려와 유난히 추위에 타는것들과 번갈아 놀아주다가 한순간 냉정하게 돌아서는 따가운 가을볕의 수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훔쳐보았다네. 뒷모습이 아름다운 가을 햇빛이 무척 부러웠다네.
< 뜨거움이 잠시 다녀감>
가정주부가 아니면 놓치기 쉬운 가사의 소도구들이 마치 요술처럼 화사하게 시적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물들 속에서 이처럼 존재의 근원적인 아픔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섬세한 감성이 놀랍다. 우리에게 친숙한것 그러므로 또한 타성적으로 지나치기 쉬운 사물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새삼 확인된다.
물론 그에게도 몇 가지 극복되어야 할 문제들은 있다. 가령 아직도 신인작품에서 보이는 바, 장황한 개인적 사변들과는 분명 다르지만- 수식적 표현이 지나치다는 점, 소시민의 생활 묘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주부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 시적 소재가 가사의 소도구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앞으로 성장해야 할 큰 시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기대를 지적한 것이지 그의 시가 동세대의 시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선 그는 무엇보다도 시의 미학적 완결성을 성취해 내고 있으며 건강성에 기초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데 일단 성공한 듯이 보인다.이는 요즘 유행하는 시들의 병적이고도 자극적인 방법으로 저널리즘에 영합하는 것과는 그 태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문학에 대한 외경스러움을 아직도 간직한 처녀이며 바로 그러한처녀성이 쓰러져 가고 있는 우리 문학의 발판을 버텨주는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