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낙동강 둔치도
고유명사인 지명은 대개 사연이 서려 있기 마련이다. 이렇듯 신촌(新村)은 새로이 형성된 마을로 우리말로는 ‘새말’ 또는 ‘새마을’로 불린다. 신기(新基)는 ‘새터’다. 그런데 보통명사가 그대로 땅이름에 쓰인 경우도 있다. 삼귀 해안에 ‘갯마을’이 있는데 바닷가라 그렇게 부른다. 고성 당항포에 ‘간사지’가 있는데 바다를 메우다 중단된 지점으로 간척지의 다른 말이 간사지다.
지금은 생활 속에 일본어 찌꺼기들이 사라졌다. 내가 어릴 적 도시락은 ‘벤또’였고 수레는 ‘구루마’였다. 예전에는 일본식 표기가 상당했는데 세월 따라 우리말로 되살려진 예가 있다. 한동안 큰물이 날 때만 물에 잠기는 하천 언저리의 터를 ‘고수부지(高水敷地)’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 용어를 대체한 ‘둔치’라는 말이 일반화되었다. 둔치도 물가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낙동강은 하류에서 물길이 나뉘어 흐르면서 삼각주가 형성되었다. 부산 강서구 일대는 예전 김해 가락과 녹산이었다. 이젠 공장이나 창고에 잠식되어 지난날 김해평야라던 명성도 사라져 기름진 곡창지대라는 말은 듣기 어려워졌다. 올겨울에 서낙동강 하중도인 중사도(中沙島)를 찾은 적 있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는 모래섬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제방을 쌓아 농경지로 바뀌었다.
대한을 하루 앞둔 일월 셋째 목요일은 서낙동강의 또 다른 하중도 둔치도를 탐방하려고 길을 나섰다. 앞서 언급했듯이 ‘둔치’는 보통명사인데 그곳에서는 고유명사로 지명에 붙여 썼다. 이른 아침 도시락을 챙겨 아파트단지를 벗어났다. 반송 소하천을 따라 원이대로로 나가 창원대학에서 김해 장유로 가는 170번 버스를 탔다. 시내를 관통한 버스는 남산터미널에서 창원터널을 지났다.
장유 농협 앞에서 을숙도를 거쳐 하단으로 가는 220번 버스로 갈아탔다. 율하를 지난 응달과 수가를 거친 조만포에서 내렸다. 장유의 대청천은 김해 들판으로 흘러오면서 조만강이 되었다. 샛강 조만강이 서낙동강에 합류하는 포구라 조만포로 불리었는데 개통을 앞둔 마산 사상간 민자 철도 경마장역과 같은 위치였다. 거기서 멀지 않은 녹산의 부산과 경남 경계에 경마장이 있다.
조만포에서 경마장으로 통하는 혼잡한 찻길을 비켜 둔치도로 드니 먼저 해포정미소가 나왔다. 근처 마을이 해포여서 붙여진 이름인데 낙동강 유역에서 최남단 벼농사 지대였다. ‘둔치교’라는 동판이 붙은 낡고 좁은 다리를 건너니 강 언저리는 태공들이 낚시에 몰입해 있었다. 둔치도에서 포장된 둑길의 농로를 반시계 방향으로 걸으니 행정구역은 부산광역시라도 전형적 농촌이었다.
낙동강의 하류였지만 생각보다 쓰레기가 많지 않음은 외지인들이 몰려오지 않음도 한 가지 이유일 듯했다. 벼를 거둔 빈 들녘이 보였고 연중 민물고기를 양식하는 양어장과 겨울이면 비닐하우스에서 미나리를 재배했다. 다육이농장과 카페도 한두 군데 보이긴 했으나 인적은 드물었고 자전거를 타는 이가 드물게 스쳐 지났다. 생곡으로 건너는 샛강에는 최근 제2 둔치교가 놓여 있었다.
강 언저리의 색이 바래 시든 갈대는 가벼이 스치는 바람에도 이웃끼리 몸을 비비며 야위어갔다. 물결이 잔잔한 강물에는 평화로이 노니는 고니들 틈새에 가마우지 한 녀석이 힘차게 자맥질해 먹잇감을 찾아냈다. 타원형 섬의 남단을 지나 북으로 방향을 틀면서 강가로 내려가 배낭에 넣어간 도시락을 꺼냈더니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강물에 떠서 노는 물닭을 바라보며 도시락을 비웠다.
띄엄띄엄한 농가가 몇 보였는데 명지시장으로 오가는 마을버스가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교통편이었다. 매실나무 농장에서는 매화꽃이 아직 남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쯤 피어 눈길을 끌었다. 섬을 에워싼 둘레길을 걸으니 무슨 용도로 쓰일지 모를 농지가 아닌 꽤 넓은 부지도 나왔다. 등 뒤로 햇살을 받으며 강물을 거슬러 오르니 서낙동강도 본류만큼이나 유장하게 흘렀다. 23.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