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 수. 아빠, 학교가기 싫어......
저녁, 전철역에 마중나온 작은 아이가 잔뜩 볼멘 소리다.
얼굴을 보니 영 심상치 않다. 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
아니, 그냥 싫어. 재미 없어. 노래하고 싶어. 공부 안할래.
(마음 같아선, 야 이 주길 놈아. 누군 학교 가구싶어 가냐 ~ 냅다
소릴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정한 얼굴로)
그래, 사실은 아빠도 회사 가기 싫다. 정말 지겨워 죽겠어...
우리 내일 같이 땡땡이칠까 ? ... 그렇게 작당을 하고 잤다.
늦도록 부슬부슬 비가 내렸고 혼곤한 잠과 지랄맞은 꿈이
밤새 내 머리채를 끌고 돌아다녔다.
8. 27. 목. 새벽에 작은 아이와 몰래 집을 나왔다.
꾸려놓은 텐트와 배낭을 짊어지고....... 아빠, 비가 오지만 상관없어요.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며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유림이가 밥먹은 게 체해서 학교 못간다고 전화좀 해줘
일요일 밤에 올라올게...... 뭐, 머시여 ? 이 냥반이 미쳤나.
어이없어하는 아내의 얼굴이 그려진다.
'이미 늦었어, 벌써 바다가 보인다구.'
아이의 말을 듣는다.
아이는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를 끝없이 조잘거린다.
반 친구들 이름을 하나씩 들어가며 그들의 성격, 행동, 놀던 얘기
그리고 계집아이들, 누구는 이쁘고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못됐고...... 이야기하는 내내
아이가 무척 행복해 보인다. 하긴 누구에게 자기 하고싶은 이야기를
모두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속이 후련한가. 저 작은 가슴에
저렇게 많은 이야기가 쌓여있었다니......
저녁 대구에 도착,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다.
대구에는 공원이 많으니까 숙박비도 아낄겸, 대충 텐트를 치고 자기로 한다.
수성못에서 지인을 만난다. 시를 쓰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가슴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낮에는 너 좋은거 실컷했으니까, 저녁에 아빠 친구 만날 동안 기다려줄거지 ?
응..... 혼자서도 잘 놀아. 걱정말고 실컷 아빠친구들하고 놀아.
술도 몇 잔 먹고, 지인들과 오래 얘기한다. 기분이 좋다.
.........................................................................................................가우님 시집발간 축하연 뉴욕뉴욕에서
8.28. 금. 새벽을 달려 통영에 도착
짐보따리를 하나씩 둘씩 짊어진 섬사람틈에 끼어 비진도로 간다.
섬은 조그맣고 아늑하다.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 솔숲에 텐트를 친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래밭을 따라 걷는다. 아름답다.
바닷가 바위틈으로 난 길을 따라 섬을 돈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섬을 돌다가 만난 조그만 포구에서 비린 것을 주문한다.
멍게, 해삼, 전복, 소라를 한 접시 가득 내온다...... 속깊이 시원함이 밀려 들어간다.
저녁, 파도소리를 들으며 아이와 이야기한다.
.............................................................................................(통영시내, 그리고 시장)
아빠, 난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작곡가
그리고 어떤 악기든 잘 다루었으면 좋겠어요.
아빠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 잘 벌고
결혼해서 아이낳고, 아빠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
난 뭐든 다하고 싶어요, 그런데 맨날 공부만 해야되요.
그래서 너무 싫어요........ 끝없이 이어지는 아이의 말을 묵묵히 듣는다.
그래 알아, 나도 그랬어
어렸을 때 아빠는 사진사가 되고 싶었단다.
나무와 숲과 바람과 햇빛을 찍고 싶었지. 마악 달리는 강아지도 찍고
신나게 노는 아이들, 달리기 일등하고 으쓱으쓱 폼잡는 사진도 찍고 말야.
한 때는 시인이 되고 싶었어, 생명으로 가득찬 세상이 왜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국군의 날 행진을 보면서는 군인아저씨가 되고 싶어 열병을 앓기도 했단다.
빛나는 칼을 차고 금색 견장과 계급장을 달고 으시대며 걸어보고 싶었지
그런데 지금 아빠는, 그냥 아빠가 되고 말았네..... 우습지 ?
하지만 난 그냥 아빠가 된 게, 네 아빠가 되어 있는게 그렇게 나쁘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아주 좋아...... 네가 보기에 아빠가 멋있지 않니 ?
(으쓱 어깨에 힘을 주면서 말한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까르륵까르륵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ㅋㅋ... 바보쟁이 아빠같으니라구, 뭐 그런 생각을 하겠지.)
8. 29. 토. 새벽 5시에 통통배를 빌려타고 바다로 나갔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달려 닿은 곳에서 낚시줄을 내렸다.
돔, 복어, 자리돔, 놀래기......고기를 많이 잡아 배불리 먹었다. 시몬과 베드로처럼.
점심때가 되도록 나는 자고 아이는 물놀이를 했다.
저녁에 섬을 한 바퀴 걸어서 돌았다.
오는 길에 밤이 깊어 별이 쏟아져내렸고 달빛이 밝았다.
아빠, 이것좀 봐요. 달빛에 그림자가 생겼어요.
아빠, 난 잘하는게 너무 없어요. 형은 랩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고 혼자서 여행도 잘 다니는데 난 아무것도 못해요.
아빠는 내가 뭐가 될거 같아요. 내가 뭐가 되면 좋겠어요 ?
글쎄, 잘 모르겠다. 하여간 뭔가 되겠지.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무엇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할까.
그냥 그대로 어른이 되면 왜 안되는걸까.)
알타미라 동굴에는 석기시대인이 그린 소그림이 있어. 아주 아름답지.
난 그 붉은 채색의 아름다운 소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단다.
아마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남들처럼 잘 달리지도 못하고
숫기도 없어서 사냥도 제대로 못했을거야. 그래서 이즘 가난한 남자들처럼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었을테고. 그러니 허구헌날 동굴에 숨어 그림이나 그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2만여년이 지난 지금 봐라, 사냥 잘해서 이쁜 암컷을 독차지하고
처자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던 잘난 석기인은 그냥 먼지로 사라져갔지만
저 그림을 그린 자, 사냥도 못하고 인기도 없었던 저 그림쟁이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렇게 우리앞에 우뚝 서있지 않니.
유림아, 그러니 먹고사는 것에 너무 집착할 필요 없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이쁜 여자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무엇으로 너를 남길 수 있는지 생각하는거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심하게 부끄러웠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해왔는가.
하지만 아빠를 너무 타박하지는 마라, 아빠 역시 대부분의 석기인처럼
사냥을 열심히 해서 처자식 벌어먹이려고 발버둥쳐왔을 뿐이니 말이다.)
8.30. 일.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병균은 '나중에'라는 바이러스다.
모두들 '나중에' 라고 말하지. 나중을 위해서 지금 현재의 고통을 참으라구
그런데, 한 50년 살아보니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나중은 오지 않아, 결코 나중은 오지 않고 끊임없이 지연될 뿐이지
'나중에' 성공하려면 지금 놀지 말고 어쩌구 하던 선생님 말도 그진말이었고
'나중에' 잘 살려면 열심히 일해야한다는 말도 그진말이었고
'나중에' 행복한 국가를 만들테니, 지금 세금 많이 내라는 대통령말도 그진말이었고
'나중에' 여행같이 가자고 수없이 너를 달랬던 아빠말도 결국 다 그진말이었잖니.
그러니까 '지금', 오직 지금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해라.
현재를 게임이나 단순한 쾌락으로 소비할 건지, 자아를 키우는데 소비할 것인지 잘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서 자신있게 말이다....... 현재(Present)만이
신의 선물(Present)이라고 하지 않니.
그런 저런 이야기를 사나흘 동안 나누었다.
사나흘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말을 듣는다면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자 한다면, 시간의 길고짧음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제 큰 아이를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시키고 왔다. 아내는 울었고
아이를 한지에 두고 오는데 애비의 가슴인들 멀쩡했겠는가.
하지만 한켠으로 나는 가슴이 든든했다. 나는 저 아이가 홀로 설 수 있도록
여행을 통해 잘 훈련시켰고, 이미 그에게
내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 주었기 때문이다.
첫댓글 친구같은 아빠, 그래서 아드님들은 백배의 친구를 가진 든든한 마음으로 세상을 잘 달려갈 것 같아요.
참 행복한 풍경들입니다~~ 주말에만 아버지를 만나는 아들들이 마음이 걸리네요....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왜 자꾸만 어린왕자가 생각날까요....
참 편한 아빠와 아들 통영 다녀가셨군요. 다음엔 시하늘 식구랑 같이가요^^
내 아들은 얼마나 아빠와 시간을 가졌을까? 아빠와 별 추억도 없이 장성한 아들이 ...
내 아들들도 마찬가지에요. 어려서부터 그렇게 세 부자가 함께 여행 다닐 것을 권해도 실행되지 않은 권면이었고, 지금은 한달에 한번이나 얼굴 볼까말까 ... 어려서부터 대화의 문이 닫힌 부자간의 어색함 때문에 꼭 중간에 저를 매개로 해서 서로에 대한 의견을 나누려는 세 남자들 때문에 아주 징그러울 정도에요.그래서 시리우스님과 아드님 둘이 참 부럽다는 생각도 들고요.
참으로 환한 아이들 ......햇살보다 눈이 부셔 부셔 ......바다보다 더 큰 사랑 간직한 시리우스 님!
제도 속에 묶인 바보가 아니었다. 당신의 생각과 이야기와 모습이 그대로 시였다. 나 다시 태어난다면 당신처럼 아이 데리고 그렇게 해보겠는데, 우린 바보같이 살았군요.
어휴, 어줍잖게 올린 아이 이야기에 이렇게 좋은 생각을 덧붙여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내 아이도 나중에 시하늘의 주요맴버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거예요, 오래뵌 분들의 모습이 눈에 잠겨있을테니.....
'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