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체육관 (외 1편) —독감
조혜은
꿈속에서 나는 꿈을 잊었어. 꿈에서 깨어났어도 꿈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지. 어디에서 왔을까. 가장 처음 간판을 켠 사람의 처연한 얼굴빛이 아이의 얼굴을 적셨다. 서러움에 울먹이던 얼굴. 고열이 훑고 간 얼굴. 오랜 절망에 침윤당한. 서글프고 서럽고 화창한 얼굴. 사실 그건 일요일을 지나오며 생긴 월요일의 몸살. 나는 돌아온다.
육아는 미리 몸을 다 써서, 더는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일. 아이를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누가 말했다. 혹시 당신은 그런 걸 생각할 수조차 없이 가혹하게 몰아치는 당연한 희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당신은 내게 화가 났느냐고 물었다. 아이를 낳고 디스크에 걸린 누구는 드디어 피부가 괴사해 수술을 받았다고. 누구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당신은 말했다. 그날 아이의 유치원 앞에서 나는 아이 셋을 낳고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은 누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발 누구라도 원망해 봐요. 나는 소망했다. 그날 나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나는 유리에 갇힌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가지도 못하고 멈추지도 못한 채 뭘 해야 할지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상했다. 유리 안에 있는 아이는 보호받는 느낌일까, 우리라는 밖으로부터 격리된 느낌일까. 우리를 따돌리려는 소망인 걸까. 나는 웃었고 여느 때처럼 일을 마치고 갑자기 18층으로 올라가 뛰어내렸어요. 나는 그런 누구의 이야기를 엿들었어요. 네, 화가 났어요 나는. 아무도 그 당연함을 생각하지 않은 채로, 이제 누구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한 명씩 동정을 나누기 시작하겠군요. 매 순간 내가 벌인 장례식에서, 나는 허기진 입을 벌렸어요.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가지고 싶었던 여유라는 상징을 향해. 나는 말할 수 없는 입을 찢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세계로 돌아온다.
글러브를 끼면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소망은, 약해짐으로써 강해지는 것.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것들을 가두어두고 보길 좋아한다고.
나는 한없이 약해져야했고 그래서 강해져야했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은 더는 기록할 수 없는 소망이었다.
눈 내리는 체육관 —우산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마음을 애태워 혼자 쓰고 있던 날 꿈속에서 나는 여러 번 문을 잠갔다 꿈인 줄 알면서도 우산을 놓고 나와 다시 들어갔고 불투명한 모든 정면에서 나를 발견했다 저녁을 통과했다 머리가 깨진 줄도 모르고 미끄럼틀에 물을 잔뜩 뿌려 나선형을 그리고 내려오는 아이들 곁에서 위태로운 모든 측면에서 마스크를 쓰고 숨통을 틀어막은 나와 나 나는 내가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견디지 못했다 망가진 내가 있는 아이들 서로의 머리칼에 밴 비슷한 저녁의 냄새를 맡으며 손등을 펴면 진실이 보이고 손바닥을 펴면 진짜가 보이지 내가 아직도 당신을 좋아하는 게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더하고 더해도 사랑은 불안한 것이었다 나는 깨어진 날들을 망설였다
터널을 지나는 내가 있고 아이들을 두고 사라지는 나의 세계 그런 나의 아이들을 시청하며 이다지도 온건한 나의 삶을 손톱으로 쥐어뜯고 싶어져요 그가 휙 돌며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초보입니다 듣는 나보다 더 모욕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씩 감정을 눌러 가며 나는 애써 나의 존재를 모르는 척 기억하려는 사람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과 남의 인생을 얼마나 수렁으로 몰아넣는지 나는 알고 있어요 거절하지 못해 무책임해지죠 망가진 사람과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 가운데에서 더 잘못한 쪽은 누구일까요 엄마는 왜 반쪽이야? 반만 남은 커피의 모양으로 나의 세계가 출렁일 때, 카페의 유리문 너머로는 서로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지나고 있었다. 아무리 반성해도 돌이킬 수 없는 당신과 나 빠르게 부서지는 비의 입술이 낱낱이 우산의 흔적을 좇았다
―시집 『눈 내리는 체육관』 2022. 9 ----------------------- 조혜은 / 1982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특수교육학과 졸업. 200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구두코』 『신부 수첩』 『눈 내리는 체육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