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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제1독서 : 2코린 3,15─4,1.3-6
복 음 :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전주의 노송동에는 매년 겨울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이 기다려집니다.
익명의 독지가가 매년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독지가는 동사무소 앞에 적지 않은 금액을 봉투에 담아서 갖다 놓았습니다.
동사무소에서는 이름도 알 수 없고, 고마움을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독지가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매년 그렇게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따뜻한 사람이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뜻밖의 재물 때문에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법정으로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40억 원이라는 거액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생들은 당첨된 돈을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오빠는 집을 구입하였고, 어머니를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 많은 다툼이 있었고, 결국 법정에서 형제들이 재판을 받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돈이 아니었다면 형제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일도 없었고,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로도 사람의 욕심을 나눔으로 바꾸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1997년 형님의 사업이 어려워졌습니다. 벌써 20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을 위한 전세 집을 마련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면서 하는 일들이 잘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거처하실 작은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성당이 가깝고, 지하철역이 가까워서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십니다.
부모님께서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능을 주셔서 강의 요청도 가끔 받게 됩니다.
조카들도 직장을 마련하였고, 형님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일은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원망하면, 짜증을 내면 원망할 일이 생기고, 짜증 낼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인의 삶을 이야기 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는 희생과 고통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을 밝고 환하게 비추고, 세상에 참된 맛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무엇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외모, 능력, 재산, 명예, 권력으로 평가를 받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를 가지고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과 규율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를 편안하게는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먼저 그 형제와 화해 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 곧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이들,
율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살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단순한 문자적, 형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 율법의 참 정신인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을 설명하십니다.
곧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 동기를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세 단계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 곧 단순한 내적인 분노요,
<둘째>는 형제를 ‘바보’라고 말하는 것, 곧 천박하다고 멸시하는 것이요,
<셋째>는 형제를 ‘멍청이’라 말하는 것, 곧 불경하다고 매도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능가한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곧 살인의 내면적 혹은 근본적인 동기까지 금지하시면서,
동시에 더 나아가 살인과 분노와 모욕과 매도를 “화해하라”는 사랑으로 대치시킴으로써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시키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단의 예물만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예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창세 4,4)고 하시며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예물로 삼으십니다.
결국, 형제와 맺는 관계가 곧 하느님과 맺는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예물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예물을 들고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사랑하고 화해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를 소중하게 여기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우애와 사랑을 중요시 여기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결국,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합니다.
곧 용서와 형제애, 우애가 이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형제 상호간의 화해를 거듭 강조하여 촉구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마태 5,25)
그러니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하라는 촉구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받아야할 존재요, 받은 그 사랑을 하염없이 내어주어야 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얼마 전 성지에서 아빠로 보이는 한 형제님께서 아이를 테이블 위에 뉘이고서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갓난아이가 엄청나게 유연한 것입니다. 글쎄 너무나 쉽게 자신의 발가락을 입으로 물더군요.
그 유연함에 감탄하면서 “아이가 정말로 유연하네요.”라고 웃으며 말했지요.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어떤 자매님께서
“신부님, 아이는 다 저렇게 유연해요. 아마 신부님도 갓난아기 때에는 유연했을 거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현재 저는 과연 유연할까요? 유연하지 않을까요?
유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딱딱하고 굳은 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몸은 노화가 시작될 때 가장 먼저 유연성이 떨어지는 변화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몸은 말랑말랑하고 부드럽지만, 어른의 몸은 뻣뻣하고 거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이 젊으면 사고가 젊어지고, 생각이 늙으면 사고가 경직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각이 젊고 유연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바로 새로움을 잘 받아들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이 결코 유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매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항상 젊고 활기차게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새로움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직된 사고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시지요.
사랑을 위해서라면 유다인들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또 믿었던 율법의 세부 조항도 무시할 정도로의 새로움을 보여주신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당시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악의 한 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어제 복음에 나왔듯이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은 잊어버리고
단순히 계명의 준수에만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생각의 유연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를 위해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에도 원리를 아는 사람은 복잡한 문제에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 푸는 것에만 집중했던 사람은 약간의 문제 변형에도 당황해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우리의 삶 역시 예외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기본 원칙이라 할 수 있는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고 부드럽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뻣뻣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정신까지 딱딱하게 경직되지 않도록 늘 새로움을 받아들으려는
넓은 마음과 긍정적 생각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의로움과 그들 의로움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강동원은 배신을 많이 당한 끝에
삶이 싫어 죽고 싶어 일부러 살인 누명을 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나영을 만나고 나서는 이젠 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이나영도 엄마를 그렇게 증오하여 죽고 싶었지만 강동원을 알고 나서는
중병에 걸린 엄마를 용서하고 죽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강동원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런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가지는 똑같은 감정으로 나를 대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가 밉고 죽이고 싶다면 내 자신도 밉고 증오스러워 죽이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살인마 유영철에게 어머니, 아내, 아들을 살해당한 고정원씨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은 그 안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는 바로 그 사람과 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신도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영철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내 아들을 죽였어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양자로 삼고 싶다.
유영철이 허락하고 상황이 된다면 그가 남긴 자녀 둘을 내 친손자, 손녀처럼 돌봐주고 싶다.”
그는 유영철에게 편지를 보냈고 사죄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기 전에는 오로지 죽고 싶은 마음 하나였는데
다 용서하고 나니까 그런 마음이 없어졌어요.
아이들을 위해 좀 더 내가 살아야겠구나 했어요.”
유영철씨는 용서라는 것을 했지만 결국 그것은 유영철을 살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면 결국 그는 자살을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미움이란 것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줄 알지만 결국 자신도 그 안경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절의 깃발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한 승려는 깃발이 펄럭인다 하고, 또 하나는 바람이 펄럭인다 했습니다.
이렇게 둘이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자, 육조가 말했습니다.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고, 다만 너희들의 마음이 펄럭일 뿐이다.”
불가의 선문답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미 자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마음 상태에 따라 세상도 보이고 자신도 그렇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안경을 끼지 말고 맑은 마음으로 자신과 우주를 비추어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하시고 입적하였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무학대사도 이성계와의 대화에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남을 어떻게 보느냐가 자신까지 결정하게 된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 색깔이 없는 안경을 쓰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이지만
만약 돈의 색이 입혀지면 산도 돈으로 보이고 물도 돈으로 보이고 자신도 돈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는 방법은 거울에 비추어 보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그 거울을 볼 때는 색안경을 끼고 있는 자신이 그 색을 통해서 보여지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빛으로 자신도 보이게 마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경의 색을 빼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좋은 색이 입혀진 안경을 끼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랑의 안경을 끼면 그 사랑으로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자신도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무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빛깔의 안경을 제공하러 오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림자를 잡으려고 앞으로 가면 그림자도 앞으로 가 버려서 잡히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점점 빨리 걷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그림자도 점점 빨리 달아났습니다.
그는 뛰기 시작했습니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만 그림자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그림자를 잡으려고 뛴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결국 저녁이 되자 그는 탈진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쫓던 그림자는 저녁노을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약 그림자를 쫓는 일을 멈추고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갈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나에게 화가 나거나 증오가 치밀어 오를 때 그것에 집중하여 그것을 제거하려 해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빛을 받지 않도록 자리만 옮기면 그만입니다. 마찬가지로 안경만 바꿔 쓰면 그만이란 것입니다.
나무그늘에 들어가면 더 이상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안경만 바꿔 쓰면 그런 감정들이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모든 안 좋은 감정들이 일지 않도록 감싸주는 그 나무그늘은 무엇일까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 산을 산이도록, 물을 물이도록 직시할 수 있게 만드는 깨끗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겸손의 그늘에서는 어떤 안 좋은 감정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안 좋은 감정의 씨앗이 교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고,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욕하고, 멍청이라고 하면 지옥에 넘겨진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판단하는 그 안경으로 나를 심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런 현상으로 보이게 만드는 나의 시선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본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돼지에서 부처가 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했던 스테파노 성인처럼
아예 미움과 증오의 씨앗조차 존재하지 않게 우리 온 자신을 변화시켜
겸손과 사랑의 그늘이 우리 자신을 완전히 뒤덮을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화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미움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미움이 일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됩시다.
억지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힘들이지 말고 그냥 사람 자체가 사랑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길입니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자신을 괴롭히는
아프고 힘든 관계에서
먼저 자유로워지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화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관계의 본질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욕심이 아닌
감사와 존중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물은
감사와 화해입니다.
화해는 언제나
화해의 여정을
필요로 합니다.
화해의 여정을 통해
우리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만큼만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화해는
거룩함의 함정
추상적인 관계라는 함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예물은
뿌리 깊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화해입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가는 길이
바로 우리를 위한 회개입니다.
먼저 화해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