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엘리바스의 말에 응답 합니다. 욥은 엘리바스의 문제 해결 방식에 실망했습니다. 비록 욥도 자신이 경솔하게 자신의 생애를 저주했다고 생각했지만, 욥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고난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끊어내 버리셨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 자신의 삶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상황도 사실상 그런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차라리 하나님의 손에 죽기를 원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고통을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의원인을 아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10). 그럼에도 여전히 욥이 지쳐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11-13). 이어서 욥은 낙심한 자가 전능자를 저버려도 친구들은 위로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친구는 그렇지 못함에 대해서 책망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속에서 욥은 그의 친구들의 위로와 도움을 기대했지만,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18절에 ‘대상’은 ‘개울들’로 번역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물 길은 그 본류에서 벗어나 사막으로 들어가면 당연히 마릅니다. 데마라는 지역은 무역으로 유명했는데, 상인들이 오아시스를 보고 갔다가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을 욥이 친구들에게 위로를 바랬다가 실망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욥이 그들에게 바란 것은 참된 동정입니다(14-23). 또 친구들이 자신의 논리를 위해서 친구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은 마치 고아와 친구를 파는 것과 같다고 책망합니다(27).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에 있어서 자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논쟁하고자 합니다(28-30).
엘리바스와 달리 욥은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도 하나님께 있다고 봅니다. 비록 욥은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려는 부족한 모습은 있지만, 결국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욥은 자신을 향해 회개하라고 했던 엘리바스의 말도 반박합니다. 욥은 회개 대신에 탄식을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여전히 해결책을 하나님께 찾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욥의 고난의 원인은 미스테리이지만, 하나님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욥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람들은 해결책을 줄 수 없습니다. 위로를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삶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일편단심 하나님만 신뢰는 저와 여러분이되시기 바랍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할 때 먼저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며 살펴주고 해결책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잊지 않도록 참된 위로를 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