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누린 영화(榮華)가 종료된다. 추위를 느낄 정도로 냉방이 잘 되어있으므로 바람막이 점퍼를 준비해야 한다는 조언은 배낭이 화물함에 밀려들어가는 순간에 들었다. 점퍼는 배낭 안에 있었다. 다행이 배낭과 별도로 어깨에 메고 다니는 가방 안에 자외선 차단 소매가 있어서 그것을 양팔에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조언과 다르게 실내는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커튼만 젖히지 않으면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을 벗는다 해도 소란이 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지 않은 만큼은 사회화가 된 인간이다. 흔들림을 견디기 어려워서 몸을 일으켜 앉아 보았다. 허리를 약간 굽히고 등을 창과 벽의 모서리에 밀착시켜야 쓰러지지 않는다. 복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싱글은 커튼이 모두 닫혔고 더블은 세 곳이 열려 있다. 왼발 약지 발톱 근처에 스멀거리는 느낌이 있다. 더운 곳 갈 때 꼭 챙겨가는 것 중에 모기 퇴치약과 모기향이 있다. 이번 여행에도 잘 챙겨오긴 했지만 그것 역시 버스 바닥 배낭 안에 있다. 나에게 어리석음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필요하지 않아서 손을 벗어난 것이 꼭 필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세상에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본연의 뜻을 살릴 수 있는 자리에 반듯하게 있어야 생활이 편안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인간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건 문과충들의 쓸모없는 푸념일 수 있다. 우주 질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질서를 무너트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차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싶더니 엔진이 멈췄다. 11시50분. 출발한 지 2시간 30분이 지났다.
1.75m×0.6m 공간에 구속된 몸이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이 공간에 있어야 했다면 그건 감옥이다. 독립투사들을 옥죄었던 형무소 수준의 감옥이다. 강제 당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으려 할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나는 점유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곳을 독점 공간으로 인식한다. 두 공간 사이에 물리적 차이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식하는 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인간의 지각능력이라는 것이 어떤 때에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어두운 동굴에서 밤을 지내고 눈을 뜨자마자 깨우쳤던 원효의 아침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보편적 인간 지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삶의 본질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와우!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흐름! 후텁지근한 바람이지만 흐름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행복한 순간이다. 간이 휴게소였다. 휴게소라고 해봐야 매점에는 물과 탄산수 몆 종류, 얼음과자가 고작이다. 그나마 먼저 도착한 여행객들이 동을 내고 있었다. 승차 전 들이킨 맥주가 아랫배에 강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이용 가능한 화장실은 없었다. 회장실 개방을 하지 않는 것은 음료수 몇 병 팔아서 화장실 관리할 만한 수익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 가게 앞 흐릿한 조명 속에서 동승한 여성들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곳이 곧 화장실이라는 것이다. 그녀들의 적응력은 단 사흘 만에 인도에 정착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밝음으로 노출되곤 하던 수치심은 어둠과 함께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었다. 본국의 세련됨과 깨끗함을 앞세워 지저분함과 비위생을 향해 퍼부었던 비난은 방광에 가해지는 약간의 압력도 견뎌내지 못하는 허약한 속물근성을 노출한 것에 불과했다. 어둠 속을 서성대는 오십여 명이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체내의 압력을 낮추고 있었다. 인종, 국적, 성별과 관계없이 동일한 원인으로 동일한 행위을 하는 것으로서 모두가 평등해져 있었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라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범하는 행위라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휴게소를 떠나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마구 몸을 흔들기 시작한 Paulo는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진정할 줄 모른다. 비포장길이다. 인도의 중남부 지형은 해안지대의 평야와 내륙의 고원지대로 나뉜다. Paulo는 서쪽 해안 평야지대에서 중부 데칸고원 쪽으로 비탈길을 오르는 중이다. 버스 안에서 최악의 상황은 비포장 오르막길을 오를 때다. 앞쪽을 향한 몸이 뒤로 쏠리면서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흔들릴 때다. 이럴 때에는 다리를 굽혀 발 앞에 여유 공간을 만들고 흔들리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몸을 조금씩 앞으로 밀어내야한다. 그래야 머리가 천정에 부딪히지 않는다. 이층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휴게소에도 내리지 않았다. 도인의 경지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물이 끓는 온도에서 살지 못한다. 그러나 해저 화산의 뜨거운 물에서 미생물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모든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위층의 그녀는 그 미생물 같은 존재라고 할까. 보통 사람이 견뎌내기 힘든 상황을 어려움 없이 이겨내는 특이한 사람이다. 그녀에게 paulo의 떨림과 소음은 요람의 기분좋은 흔들림과 모차르트의 음악일 뿐이다. 누워서도 몸을 가누기 힘들고 목과 허리가 뻑뻑해서 앉아 보았다. 그러나 몸의 접지면적이 축소되면서 자세는 더 불안정해졌고 곧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오전 4시37분을 지나고 있었다.
심한 울렁거림으로 눈을 뜬다. 7시간 20분이 지나고 있었다. 맙소사!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것이다. 두어 시간 남짓 잤을 것이다. Paulo는 여전이 몸을 뒤틀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간혹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상태에 빠져들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이룰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규칙성이 전혀 없는 흔들림, 머리맡에서 쉼없이 울리는 동력원의 굉음, 뒷바퀴가 길바닥을 밀어내면서 생생하게 전달되는 떨림, 태어나고 한 번도 물 구경을 못한 것 같은 그 안에서, 그 냄새 속에서 꿀잠을 잔 것이다. 불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았던 상황을 어느 순간 몸이 받아들이고 잠으로 인도하였다. 잠드는 순간을 기점으로 전과 후의 외부 상황에는 아무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몸은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변화한 것은 시간뿐이었다. 시간이 달라지면서 같은 상황을 몸이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동과 소음과 냄새와 이 모든 불편함이 잠으로 수용 가능한 것이 되었다. 적응한 것이다. 전쟁터나 기아선상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의 고통이 그들의 몸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스가 정차했지만 엔진을 끄지는 않고 있다. 이 시간, 시골길에 신호등이 있을 리 없다. 승객 모두 함께 평등을 실현할 시간이다. paulo가 평등을 구현하기 적당한 장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는 영어(囹圄)의 몸을 풀어주는 해방자이며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광야를 달리는 투사다. 커튼을 걷고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건너편 더블베드에서 젊은 서양 여성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온다. 잠시 물러앉아 있어야 했다. 이어서 같은 칸에서 민소매를 걸친 건장한 사내가 커튼을 젖히고 나온다. 맙소사! 1m 남짓 떨어진 곳에 젊은 커플이 살을 맞대고 누워있었던 것을 밤이 새도록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보편적 속성을 떠올리면서 젊은이들이 그 좁은 공간에서 겪었을 고통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면서 Paulo의 널뛰기가 심해지는가 싶더니 드디어 크게 한방을 날린다. 초반부터 상대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던 그가 마지막 KO 펀치를 휘두른다. 요동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텅'하는 굉음과 함께 버스가 튄다. 전신이 공중으로 붕 떠 오른 것이다. 위층에서는 더 높이 떴을 것이다. 앞쪽에서 '악'하는 비명 소리가 들린다.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낮은 천정에 머리가 부딪혀서 목뼈를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누어있는 30여명이 동시에 튀어 오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다행이 소음과 떨림에 통증을 호소하는 비명이 섞이지는 않는다. 그것으로 동승자들이 공중부양으로부터 안전하게 착지했음을 확인한다. Paulo가 날린 건 KO 펀치가 아니라 과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테스트였다는 걸 깨닫는다. 승객 모두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커튼을 젖히자 뿌연 유리창으로 엷은 오렌지 볕이 들어온다. 어떤 밤보다도 몸과 마음이 분주했던 이 공간에서 곧 벗어날 것이다. 땟국물과 소음, 진동과 냄새에 쪈 Paulo를 벗어날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간 Paulo가 그리워질 날이 올지 모른다. 이 밤이 그의 낡음과 불편함에 거리낌 없이 몸을 맡겼던 이들의 소박한 영혼에 기대어 이전의 어느 밤보다도 푸근했던 밤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목적지 도착 10분전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 엔트로피: 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게 되는 현상. 보존 에너지의 사용으로 결국 사용가능한 에너지가 손실되는 결과를 가져오며 우주는 무질서로 지향하게된다.(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