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생존율 43%… 봄인 줄 알았더니, 겨울의 시작이더라
백석(1912~1996), 김동리(1913~1995), 서정주(1915~2000), 황석영, 최인호, 박범신, 한수산, 이문열, 은희경, 김인숙, 한강, 천운영, 정지아, 하성란, 편혜영, 백가흠…….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백석을 비롯해 서울신문, 동아일보 등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다. 이런 작가들은 어떤가. 고은, 김주영, 조정래, 최영미, 신경숙, 공지영, 김영하, 김연수, 천명관, 정유정, 김애란, 구병모……. 『현대문학』이나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 『대산문학』 등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다. 신춘문예 출신은 특별한 권위를 얻고, 문예지 출신은 독자들과 더 자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오래 문단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춘문예는 1925년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홍명희(1888~1968)가 ‘신춘문예’라는 명패를 내걸고 독자들의 문학작품을 소개한 이후 한국 문학청년들의 최고의 문단 등용문으로 자리 잡았다. 유성호(한양대 교수) 평론가는 “한국 문단을 지탱하는 3대 기둥은 신춘문예와 각 대학 문예창작과, 백화점 등의 문학창작교실”이라고 말한다. 유 평론가는 “억대 상금을 내건 문예지의 상업적인 소설 공모도 어찌 보면 신춘문예의 파생상품”이라고 했다. 창비에서 ‘위저드 베이커리’로 등단한 구병모는 “생각해 보니 신춘문예를 10여년 준비하다가 낙선을 거듭해 차선으로 문예지를 찾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 일간지를 비롯해 지역 신문까지 11월에 신춘문예 응모작을 모집해 새해 1월 1일 당선자와 당선작을 발표해 왔다. 예비 작가들에게 권위 있는 등단 기회이다 보니, 과열현상이 빚어져 당선작 중에는 표절 시비에 시달리거나 명확하게 표절이 확인돼 당선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신춘문예는 한마디로 요즘 대중문화 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전 국민 대상 오디션 프로그램과 같은 문학계의 대축제다. 노소를 가릴 것 없이, 해외는 물론 전국적으로 응모하기 때문이다. 신문사마다 수천 편의 작품이 몰려든다. 서울신문의 경우 지난해 5420편의 응모작이 몰렸고, 이 중 6명만이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정끝별(명지대 교수) 시인이 “신춘문예 당선은 현대판 장원급제”라고 하는 이유다. 바늘구멍으로 낙타가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최근 ‘슈퍼 갑’이라는 인터넷 포털 네이버가 ‘네이버 웹소설’을 내놓으면서 소설가 되기가 쉬어질 수도 있겠지만, 독자에게 사랑받고 문단에서 인정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바늘구멍 돌파에는 ‘우연’이란 변수도 작용한다. 중앙 일간지 K신문의 문학담당 기자는 지난해 12월 소설 예심을 앞두고 M일보 문학담당 기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 신문사에 K신문 신춘문예 응모작 한 꾸러미가 잘못 배달됐으니 가져가세요.” 중앙 일간지가 몰려 있는 서울 광화문우체국은 12월에 신춘문예 응모작을 신문사별로 분류해 배달하느라 북새통을 이룬다. 우편 물량이 많다 보니 K신문 2013년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 조영한(24)의 ‘무너진 식탁’이 들어 있는 꾸러미가 M일보로 잘못 배달된 것이었다.
‘쓰레기통에서 건진 당선작’도 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된 박범신의 작품이 그랬다. 당시 문학담당 기자 정규홍은 ‘탈락’이라고 표시된 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작품을 보고 마음이 아팠단다. ‘혹시 저 쓰레기통에 뛰어난 작품이 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한 그는 동료가 퇴근한 밤에 혼자 남아 쓰레기통을 뒤졌고, 버려지면 억울했을 몇몇 소설을 본심에 끼워 넣었다. 그중 하나가 박범신의 「여름의 잔해」였다. 정 기자는 ‘탈락’으로 표시된 원고의 표지를 찢어 없애고 새 표지를 붙여 올렸다. 신춘문예는 아니지만,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송숙원의 작품도 ‘쓰레기통에서 건진 당선작’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심사위원의 박스에 들어갔느냐에 따라 본심행 여부가 갈린다”는 말이 나온다. 신춘문예는 제한된 시간에 심사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예심을 맡은 심사위원은 소설은 200여편, 시는 1000여편씩 나눠서 본다. 바늘구멍을 통과하면 돈과 명예가 쏟아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또다시 고난의 행군이다. 충남 논산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박범신은 ‘신화’를 만들며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이제 내 인생에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며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원고 청탁은 들어오지 않았고 고생스러운 젊은 시절을 오랫동안 견뎌야 했다고 한 에세이에 소개해 놓았다. 1990년대 말 문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써놓은 소설 두 편 중 한 편이 우연하게 신춘문예에 당선된 공기업 출신의 한 작가는 큰 기대를 품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문단에서 그의 존재는 결국 잊혀졌다.
신춘문예 작가들에게 독자와 만날 기회를 준다는 차원에서 『현대문학』이 ‘1996년부터 시작한 신춘문예 특집’도 신인 작가들에게 지옥과 천당을 경험하게 하는 자리다. 중앙ㆍ지방 일간지의 신춘문예 소설ㆍ시 당선자들에게 작품을 청탁해 싣는데, 작품의 수준에 따라 이후 문예지들의 청탁이 이어지고 작품집 계약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001년 서울신문으로 등단한 백가흠의 회상이다. “당선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현대문학』에서 특집호를 낸다며 청탁을 해왔다. 당시는 그 특집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지 몰랐다. 다른 작가들은 박스에서 묵은 원고를 꺼내 정성스럽게 고쳐서 냈고, 나는 멋모르고 새 작품을 써서 냈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탓에 2년 반 동안 문단에서 버려진 작가가 됐다.” 당시 백가흠의 등단작 「광어」는 각 대학 문예창작과에서 교재로 사용되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현대문학』 신춘문예 특집 4월호를 본 문단의 편집자들은 “운이 좋아서 어쩌다 당선된 작가”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문단에 나오면 살아남지 못할 ‘신춘문예용’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백가흠은 “그 2년 6개월은 어디 가서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던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낀 선배들이 한 문예지 ‘젊은 작가 특집’에서 그의 새로운 작품을 소개했고, 그 패자부활전을 거쳐 그는 요즘 잘나가는 작가의 길을 가고 있다. 『현대문학』 편집부장이자 소설가인 구경미도 백가흠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올해 『현대문학』은 더 가혹해졌다. 신춘문예 특집에 싣는 작품 수를 대폭 줄여 작품 청탁을 소수의 신춘문예 출신들에게 했다. 청탁한 작품 중에서 수준이 떨어지면 싣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구경미 편집부장은 “신춘문예 특집을 실을 때가 가장 판매 부수가 적음에도 신춘문예 작가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어 사전에 신춘문예 출신들을 추렸다”고 했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현대문학 신춘문예 특집’에 작품을 게재한 소설ㆍ시 신춘문예 출신은 245명이었다. 문예지 편집장과 편집자를 겸한 소설가ㆍ시인ㆍ평론가 등 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신춘문예 출신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작가들을 파악해 보니 105명에 불과했다. 소설가 37명, 시인 68명으로 생존율은 42.9%였다. 6명에게 한 표라도 얻은 작가의 수가 그랬다. 최소 3표 이상 얻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는 대폭 줄어들어 43명(17.6%)이었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는 오아시스를 발견하기까지 사막을 터벅터벅 걸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최근 문예지들이 5000만~1억원 상당의 상금을 내건 장편소설 문학상은 신춘문예 출신들의 새로운 출구가 되고 있다.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출신인 박향은 최근 상금 1억원의 세계문학상에 당선됐다. 소설가 성석제가 지난 1월 16일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자들에게 한 격려사의 한 대목을 꺼내본다. “신춘문예 당선자는 바둑으로 치면 초단이다. 프로가 되면 초단이 9단을 단칼에 이기는 경우가 많다. 문학에서 프로가 된다는 것은 습작이 없다. 모든 것이 실전이고, 오늘부터는 더 이상 습작이 없는 것이다. 오늘부터 쓰는 작품은 이 세상에 남을 작품이 되어야 한다. 프로로 이길 수 없다면 링에서 내려가라.”
ㅡ서울신문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신춘문예 특집
1914년 12월10일 매일신보가 ‘신년문예 모집’이라는 이름으로 신춘문예를 시작한 이래 해마다 원단의 신문지상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문단에 신인을 밀어 올리는 구실을 한 ‘문학 등용문’ 신춘문예. 이 신춘문예의 뒷얘기가 월간 『문학사상』 2월호에 특집으로 실렸다.
신승철 문학사상 편집위원이 쓴 특집에 따르면 신춘문예 사상 가장 많은 당선기록은 시인 이근배(한국시인협회장)씨의 5회. 이씨는 1961년 서울신문(현 대한매일)과 경향신문ㆍ한국일보 등 세 신문에 각기 다른 작품으로 동시에 당선됐으며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각각 시조와 시가 당선돼 5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작가 문형렬씨는 지난 75년 매일신문에 동화가 당선된 데 이어 82년에는 조선일보와 매일신문에 시와 소설이, 84년에는 다시 조선일보에 소설이 당선돼 4관왕이 됐다.
그런가 하면 임찬일(작고)씨는 86년 『월간문학』을 통해 소설로 등단한 뒤 같은 해 중앙일보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스포츠서울 시나리오 공모 당선에 이어 92년 동아일보(시조), 96년 세계일보(시) 신춘문예에 당선돼 소설ㆍ시ㆍ시조ㆍ시나리오 등 4개 장르를 석권하는 역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또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가 김도연씨는 3관왕, 소설가 박기동ㆍ최인호씨, 시인 오태환씨 등은 시와 소설 부문 2관왕의 기록을 갖고 있다. 김승희ㆍ정호승ㆍ이병천ㆍ이승하씨는 시로 등단한 뒤 나중에 소설로 다시 등단한 경우이며,남진우ㆍ김이구ㆍ정끝별씨는 시나 소설로 등단했다가 뒤늦게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가로 등단한 경우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심사위원들의 대립으로 공동 수상자를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79년 동아일보의 중편소설 부문의 이문열ㆍ이순씨와 같은 해 이 신문 평론 부문의 정과리ㆍ장석주씨, 81년 한국일보 소설 부문의 황충상ㆍ이건숙씨 등이 이에 속한다. 95년 동아일보 중편소설 부문에서도 은희경ㆍ전경린씨가 공동 수상자로 뽑혔는데 이들 역시 심사위원의 견해차로 공동 당선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집은 이밖에 중복투고ㆍ표절시비와 일부 문인들의 장르 넘나들기, 재등단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ㅡ심재억 기자
[밀물썰물] 신춘문예의 기록들
최인호는 서울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63년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입선, 한 해 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소설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입선한 경복고교 3학년생 황석영처럼 문단에 등단하면서 남다른 화제를 뿌린 작가다. 입선 통지를 받은 최인호가 교복차림으로 신문사 편집국에 나타났을 때 아무도 그가 최인호라고 생각지 못했다. 심부름 온 꼬마로만 알았다. 그 후 ‘감성의 천재’로 불리며 인기작가 반열에 올라선 그 역시 67년 다시 신춘문예에 「견습환자」로 당선하기까지는 신춘문예에 단골로 미역국을 먹었다. 그는 군에 입대하면서 그동안 쓴 20여 편의 작품을 여러 신춘문예에 동시에 응모했다. 응모작품마다 그의 당선소감과 사진이 동봉돼 있었다. 신춘문예 다관왕 기록은 단연 이근배의 5관왕이다. 이근배는 61년 3개 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을 독식한다. 또 62년은 시조, 64년은 시로 다른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을 따낸다. 우리나라 신춘문예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것이다. 이근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63년, 64년에는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의 시ㆍ시조 부문을 거푸 수상한다.
‘70년대 작가’들인 조해일ㆍ조선작ㆍ김주영ㆍ황석영 등은 60년대 신춘문예 단골 낙방생이었다. 조해일은 신춘문예 당선자 중 최고 낙방 기록 보유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62년부터 계속 신춘문예에 응모, 8차례나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70년에 가까스로 당선됐다. 팔전구기(八顚九起)인 셈이다. 「영자의 전성시대」 등 일련의 ‘창녀 소설’로 각광받은 조선작도 신춘문예 단골 낙방생이었다. 그는 71년 종합 월간지 『세대』의 ‘신춘문예 선외(選外) 소설 공모’를 통해 결국 문단에 데뷔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문학지망생들이 열병을 앓는 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경향 각지의 일간신문들이 ‘신춘문예 작품 공모’를 앞다투어 알려, 화려한 등단을 꿈꾸는 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작가란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붙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붙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사랑함으로써 많이 읽고 많이 쓴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작가일 것이다.
이문섭 /논설위원/ (2002/10/26) lms@busanilbo.com
올 신춘문예 3개 신문사 동시 입상 강유정씨 매년 1월 1일 일간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신춘문예’ 사상 44년 만에 처음으로 한 해에 3관왕을 차지한 인물이 나왔다. 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가작 입선한 강유정(姜由楨, 30, 고려대 강사)씨가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문학평론 부문에도 각각 다른 작품으로 당선한 것. 이는 이근배(李根培, 64) 전 한국시인협회장이 1961년 가작 1편이 포함된 ‘신춘문예 3관왕’ 기록을 세운 후 처음이다. 강씨는 특히 올해 동아일보 문학평론 부문에서도 두 작품이 겨루는 최종심까지 올라갔으나 아깝게 ‘동시 4관왕’의 대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강씨는 “지난해 12월 17일 동아일보로부터 첫 통보를 받고 몇 시간 안 돼 조선일보로부터도 통보가 오자 ‘이제 됐다. 10년 공부의 결실을 거뒀다. 겸손하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마침 이튿날 모교(고려대)의 지도교수인 이남호 교수님의 제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어 소식을 알리고 새벽까지 술을 마셨는데, 깨어보니 또 당선 통지가 와서 두렵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강씨가 3관왕 기록을 세운 평론 부문들은 특히 인문계열의 박사들이 대거 응모하는 어려운 분야다. 그는 이미 2001∼2003년 본보 신춘문예 영화평론과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문학평론 부문에 세 차례 응모했으며 그때마다 모두 ‘최종심’까지 올라가는 기량을 보였다. 당시 막판에 그를 낙선시킨 한 심사위원은 심사평에서 “선택은 형벌과 같았다”고 쓰기도 했다. 강 씨는 “잠시 낙담하긴 했지만, 이미 써놓은 응모작에 미련을 갖지 않고 새 글감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ㅡ동아일보 2005/1/1
한국ㆍ강원ㆍ전북일보 소설 당선
(서울=연합뉴스) 일간 신문들이 주관하는 올해 신춘문예에서 3관왕이 탄생했다. 주인공은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 「카리스마 스탭」으로 당선된 김애현(41)씨. 김씨는 올해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빠삐루파 빠삐루파」, 전북일보에 「K2 블로그」를 응모해 당선됐다.
90여년 역사의 신춘문예 응모에서 같은 해에 3관왕에 오른 이로는 이근배(65) 전 한국시인협회장이 있다. 그는 1961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한국일보 등 3개 신문에서 각기 다른 작품으로 시부문 3관왕을 기록했다. 강유정(31)씨는 지난해 신춘문예에서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고, 동아일보 영화평론 부문에서 가작으로 입선해 다른 장르로 3관왕에 오른 바 있다. 소설 부문 3관왕은 김씨가 처음이다.
정천기 기자 ckchung@yna.co.kr
문학평론가 중에 송희복 씨가 있다. 이근배씨나 문형렬씨와 같은 5관왕, 4관왕의 명예를 가진 이는 아니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3관왕’에 가작이 끼어 있는 강유정씨나 지방지가 2개인 김애현씨와 달리 각기 다른 분야 신춘문예에 세 차례 당선한 신춘문예의 맹장(?)이라고 할 수 있다.
송씨는 진주교대를 나와 동국대 국문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한 이후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씨가 두 번 다 심사하였다. 7년 만에 같은 사람을 뽑았으니, 송씨에게는 김주연씨가 스승이나 다를 바 없겠다. 송희복씨는 1995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당선한 후 영화평론집만 5권 이상을 냈다. 200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었다. 등단 절차 없이 시집을 2권 냈으므로 시, 소설, 문학평론, 영화평론 4개 장르를 석권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올해부터는 소설 창작에 매진해볼 생각이라고 한다. 송씨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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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원문보기 글쓴이: 이승하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재미도 있고 정보도 있고 흥미로운 기사네요.
멀고 먼 이상, 프로가 되는 그날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