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미키루크를 아십니까? 허리우드 영화 나인하프 위크에서 킴베신저와 정열적인 베
드신을 한 유명한 섹시스타 영화배우로 많은 영화팬들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네이버나 엠파스 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서 '미키루크'를 치면 이 영화배우 말고 또 한
사람의 유명한 스타를 만나게 된다. 이 친구는 유명한 영화배우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닌 그냥 평범한 양말장수였을 뿐이다. 그런 그가 개혁 네티즌들의 열화와 같은 환
호를 받는 인기스타가 된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한다.
인터넷상에서 쓰는 아이디 미키루크의 본명은 이상호다. 1965년생으로 전문대 중퇴
에 두아들을 둔 그저 평범한 가장에 양말유통회사 사장이다. 얼굴이 영화배우 미키루
크를 닮았고 잘생긴 미남형이라는 점을 빼면 그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이력의 소유자
다.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과거사를 한번 살펴본다. 중학교 2학년때까지는 전
교권으로 공부도 제법 했던 그가 가출과 방황을 하기 시작한 것은 중3때 아버지가 돌
아가신 후라고 한다. 아버지 무서워 공부를 했는데 더 이상 공부할 필요를 못 느꼈다
고 한다. 공부보다는 싸움이 더 재미있고 책읽는 것 보다는 여자 꼬시는 것이 더 쉽
고 재미있었다고 한다. 반반한 미남형 얼굴 때문에 헌팅 성과도 제법 있었으리라.
미키루크는 중 3시절을 실컷 놀고 고등학교에 진학해 보니 공부로는 도저히 1등을
못 할 것 같고 그래서 싸움이라도 1등을 하자고 다짐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입학
식 날 고3 교실에 쳐들어가서 소위 일짱과 맞짱을 떠서 본인이 1학년이면서 전교를
주름잡는 넘버원 일짱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얘기가 뻥이 아니라면 미키루크는 배짱
만큼은 국보급임에 틀림없다. 고등학교 시절은 그야말로 미키의 전성시대였고 그후
본인의 인생관은 돈 잘 벌어 목에 힘주고 다니며 여자들에게 인기 끌고 폼잡고 사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샐러리맨으로 살자니 품위유지비가 감당이 안되었다.
친구에게 비싼 술을 얻어먹는 것도 한두번이지 시체말로 쪽팔려서 돈을 벌어야 했다
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양말장사였다. 부산 롯데 백화점 몫 좋은 곳을 따내는
수법도 기발했지만 더 쇼킹한 것은 아무리 몫 좋은 자리라지만 좌판에서 하루 매상
을 500만원이상 올려야 한다는 조건을 무색하게 입점 첫날 1천 3백만원 어치를 팔았
다고 한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의 묘한 마력이 작용한 것이다. 이날 이후 그는 돈
이 다발째 굴러오는 것 같은 돈버는 재미에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벌고 신나게 마
셨다. '역시 자본주의에서 돈이 최고야!'라는 그의 인생관이 꽃을 활짝 핀 시기였
다.
그러던 그에게 운명처럼 노사모가 다가온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 코믹하게 왔다. 노래
를 좋아하는 이 친구가 인터넷에서 검색 사이트에서 '노래를 어쩌구 저쩌구...'찾다
가 글자가 비슷한 노사모가 튀어 나왔다. 컴퓨터 자판을 잘못 눌러 컴퓨터를 켤 때마
다 노사모 사이트가 초기화면에 떴다고 한다. 컴맹인 그가 노사모 사이트를 초기화면
에 지울수만 있었어도 오늘의 미키루크는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를 켤때마다 뜨는 노
사모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처음에는 정신나간 사람들의 넋두리로 치부해 버렸다. 그
러나 미운 사람도 자꾸 보다보면 정든다고 했던가. 하나 둘씩 올라온 글을 읽다보니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방식의 사람들이 아기자기 하게 감동을 풀어
내고 있었다. 일단 가입하고 처음에는 전국적인 조직이니 양말을 파는 전국적인 조직
망으로도 좋을 것 같아 노사모를 좀 이용하고자 하는 상술적 속셈도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미키루크는 노무현의 '원칙과 소신'의 바다에 빠져들어 갔고 회
원들의 눈물나는 자발적 헌신성에 감동을 받았다. 지역감정의 벽에 맞아 쓰러진 노무
현을 살려내야 한다는 자기 확신이 들어갔다. 시국사건 변론을 맡았던 당시의 노무현
과 본인의 나이가 같았는데 미키루크 본인은 에고이스트가 아닌 사람으로 정작 사회
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자책감도 들기 시작했다. 그 사건의 배석판사였던
이회창은 그에게 더 이상 대쪽판사가 아니었다. 그는 결심했다. 그리고 장문의 글을
노사모 게시판에 올렸다. 양말 팔 욕심을 가졌던 것을 양심고백하고 반성했다. 지금
껏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못난 생각을 고쳐먹고 사심없이 본인의 과거사
등 치부를 낱낱히 고백했다. 회원들은 그의 이런 솔직한 고해성사에 열광했다. 그는
회원배가 사업을 열심히 했다. 노사모 첫 모임때 본인만 몰라 자기를 왕따시키려는
음모라고 치를 떨었던 생전 처음들어 보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솔아 솔아 푸르
른 솔아'도 열심히 배웠다.
타고난 선동가의 기질과 재치와 익살을 갖춘 그에게 물 만난 고기처럼 팔딱팔딱 정열
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찾아왔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에 노무현이 참여
를 결정하자 그는 전국을 누비며 국민참여경선 용지를 돌렸다. 당시 대세론을 타고
금방이라도 대통령이 될 듯한 착각에 빠진 이인제를 꺽을수 있는 유일한 묘수는 50%
의 국민참여경선이었다. 미키루크는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미친 듯이 국민참여 경선
신청자를 끌어 모았다. 이때부터 미키루크는 미친루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렇
게 미친 듯이 뛰어다녀 받아온 숫자가 자그만치 5천 8백명이었다고 한다. 혼자 5천 8
백명의 신청자를 받았다고 상상해 보라. 이게 어디 혼자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믿어지는가? 경상남도지역 경선시 본인이 받아온 사람중 68명이 당첨되었는데 본인
이 일일이 전화작업을 해 이중 66명을 직접 경선장에 데리고 가서 기어코 '노무
현'을 찍게 만들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이렇게 생활속에 묻혀 평범하게
살던 수많은 미키루크들이 만들어 낸 무혈의 정치 혁명이었다.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노사모 사이트에 희망돼지 분양사업에 대한 제안이 올라오자
그는 부산 노사모 사무국장에게 내일 당장 희망돼지 트럭을 준비하라고 명령(!)해 바
로 다음날부터 희망돼지 트럭을 몰고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우선 본인 통장에서 돈
을 찾아 동전으로 바꾸어 돼지저금통에 넣고 그것을 종돈으로 삼았다. 급하게 하루만
에 이사짐 센터에서 구한 트럭은 공교롭게도 노란색깔에 '그날이 오면'이란 로고가
새겨진 우연하게도 준비된 차량이었다. 전국에서 희망돼지 열풍이 불었다. 국민참여
경선 신청자 숫자로 미키루크가 1집음반을 히트시켰다면 희망돼지로 2집 음반은 대박
을 터트린 셈이다.
미키루크는 지금 생활정치 네트워크 국민의 힘 대표일꾼이다. 국민의 힘에서 전개한
정치인바로알기 관련 KBS2 TV 100인 토론에서 그는 '호떡으로 뺨을 치세요' 라며 정
치권을 질타했다. 그가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는 죽었다.'며 죽은 대한민국 정치를
넣을 관을 짰다.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관을 실고 희망돼지 트럭대신 대한민국 정
치의 죽음을 알리는 49재 트럭을 몰고 전국을 누비고 있다. 3집음반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49일동안 그는 상복을 입고 관을 끼고 국회의사당 정문앞을 비롯한 전국 곳
곳에서 검은돈 정치, 망국적 지역감정의 정치, 영혼을 더럽히는 악마의 주술사 조선
일보 퇴치를 위해 그야말로 온몸을 불사르고 있다.
미키루크는 나인하프위크의 배우 미키루크보다 더한 정열적인 에너지로 스크린이 아
닌 정치개혁 언론개혁의 현장에서 그는 정치언터테이너로서 기질을 유감없이 발산해
낸다. 그는 만나면 재미있고 흥이 있고 신이 나게 만드는 엔터테이너다. 그에 대한
열광은 목에 기부스하고 가래 끓는 느끼함으로 무장한 탐욕스런 정치인에 대한 유쾌
한 반란의 상징이다. 평범함이 귀족주의를 이기는 탈권위의 시대적 흐름에 신명나게
썩은 정치, 차떼기 트럭의 돈정치의 종말을 목청껏 노래하는 미키루크의 3집 음반이
성공하길 바란다.
첫댓글희망돼지저금통 만드는데 5억들이고 4억 모금한게 코메디 같지요.....그러나 홍보효과는 수백억 가치가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됩니다......홍사연도 히트음반 한번 준비들해 보세요.....,,좋은 아이디어 공모도 해 보시구요(상금은 석천산방 1박 2일 무료이용권? ㅋㅋㅋ).
첫댓글 희망돼지저금통 만드는데 5억들이고 4억 모금한게 코메디 같지요.....그러나 홍보효과는 수백억 가치가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됩니다......홍사연도 히트음반 한번 준비들해 보세요.....,,좋은 아이디어 공모도 해 보시구요(상금은 석천산방 1박 2일 무료이용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