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도시바 등 '환율 90엔' 수준에 맞춰 허리띠 조이기]
"환율만 믿고 경영하다간 언제 다시 엔高 지옥 올지 몰라"
부품업체에 가격 인하 요청… 보너스·신규 투자도 신중
2000년대 엔低때는 대대적 투자했다 엔高 전환에 쓴맛
"생산 기술의 혁신과 원가 절감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겠다."
엔화 약세로 올해 사상 최고치의 실적도 기대되는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 사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뜻밖에 원가 절감을 강조했다. 엔저(円低)로 순식간에 가격 경쟁력이 강화됐지만 도요타는 환율 변동과 관계없이 내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마른 수건을 다시 짜고 있는 것이다.
아키오 사장은 "새로운 공장을 짓기보다는 기존 설비의 생산성을 높여서 생산량을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
- 일본의 한 외환 거래업체 사무실에 걸린 환율·주가 모니터가 10일 엔·달러 환율이 1달러당 100엔을 넘어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은 이날 4년 1개월 만에 1달러당 100엔을 돌파했다.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 상승(엔화 가치는 하락)으로 일본 수출 기업들의 실적이 더 좋아질 것으로 예상되자 일본 주식시장의 닛케이지수는 전일대비 2.93% 상승한 1만4607로 마감하면서 지난 5년 새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로이터
도요타는 3년간 국내외 공장 신규 투자를 원칙적으로 동결하기로 했다. 도요타는 납품 업체에도 원가 절감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엔화 환율이 달러당 105엔까지는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도요타는 내부적으로 1달러당 90엔을 기준으로 한 올해 경영 계획을 고수하고 있다.
엔저로 사상 최고치의 실적을 낸 스즈키·후지중공업 등 다른 기업도 '잔치' 대신 원가 절감을 외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엔저 호황에 취하는 것을 경계하며 스스로 어려운 상황을 전제로 경영 전략을 세우고 있다. 도시바·마쓰다·닌텐도 등은 올해 환율 전망을 1달러 90엔으로 잡았으며 파나소닉은 85엔이라는 예상을 바꾸지 않고 있다. 환율만 믿고 경영을 하다가는 언제 다시 '엔고(円高)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은 여전하다.
◇환율에 기댄 투자로 몰락 자초한 샤프일본 기업의 위기의식엔 엔 약세를 경쟁력 강화의 기회로 삼지 못하면 몰락한다는 쓰라린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2000년대 환율이 1달러 110~120엔까지 급등하면서 일본 기업은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다. 샤프는 당시 10조원을 들여 오사카(大阪) 사카이(堺) 공장 등을 새로 지었다. 하지만 리먼 쇼크 이후 엔 약세가 엔고로 돌변하면서 수출 경쟁력이 급락, 공장을 제대로 가동도 해보지 못했다. 2011년도에 3760억엔 적자를 낸 샤프는 2012년 적자액이 5000억엔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2007년 2조엔이 넘는 사상 최대 실적을 냈던 도요타도 리먼 쇼크로 대규모 적자를 낸 경험이 있다. 일본 수출 기업이 채산성을 맞출 수 있는 환율은 1달러당 83엔 정도이지만 도요타는 엔고를 견디면서 이미 1달러 79엔에도 흑자를 낼 수 있는 원가 구조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도요타는 작년에 거둔 영업이익 1조3209억엔 중 원가 절감이 4500억엔으로, 엔화 약세로 인한 추가 이익(1500억엔)보다 3배 정도 많다고 밝혔다.
◇사상 최고실적 기업도 투자에 신중일본 기업들은 200조엔에 이르는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엔 약세에도 대규모 투자 계획에는 여전히 신중하다. 엔 약세로 사상 최고치의 영업이익을 낸 후지(富士)중공업의 요시나가 야스유키(吉永泰之) 사장은 "단기적 환율 변동에 따라 국내 생산을 늘리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서 "환율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엔화는 미국·유럽 경기가 불황에 빠져들면 안전 자산으로 평가받으면서 가치가 치솟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무제한 금융 완화 정책으로 상징되는 아베노믹스로 당분간 엔 약세가 지속할 수는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해외 돌발 변수'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일본 정부, 전방위적 규제 완화로 투자 촉진엔화 약세 정책만으로는 기업 투자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한 일본 정부는 전방위적 규제 완화를 통한 기업 투자 촉진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도쿄 등 대도시를 아베노믹스 전략 특구로 지정, 투자 기업에 세금 등의 특혜를 주는 제도 도입도 서두르고 있다. 실효세율이 35%대인 법인세를 한국 등과 비슷한 수준인 20%대로 낮추고 기업이 쇠퇴 산업에서 철수하고, 성장 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근로자 고용제도에 탄력성을 부여하는 제도의 도입도 추진 중이다. 인터넷 약품 판매 허용 등 신규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도 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