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용 만화 정원
김혜순
만화용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만화 정원.
네가 그린 네모 칸들이 달려간다. 네가 그린 물음표들이 매달린 이 칸.
만화에 비 오고 물 넘친다. 만화의 서정이 한강을 건너간다. 쿠콰콰아앙 하고 싶은데 고양이가 먼저 운다.
너는 빨리 적어라. 최대치의 의성어를. 내 슬픔 말로 할 수 없다고 적어라.
검은 물처럼 고양이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 내 심정. 엉겨 붙은 고양이는 허리가 길다. 심지어 한 페이지를 넘어간다. 두 마리가 한 마리 같다. 물에젖은고양이허리뱀!
칸칸이 나누어진 만화의 칸마다 젖은 우산이 내 바지를 적신다, 바닥에 들러붙은 젖은 종이. 거기 그려진 내 얼굴. 만화를 닦은 수건에선 이 세계의 본래적 냄새가 난다. 즉 즉 즉 쉰내다. 나는 만화의 머리칼을 탁 탁 탁 털면서 눈물을 감춘다.
네모난 천을 맞붙인 다음, 그 속에 솜을 집어넣으면 아픈 내 머리를 기댈 수 있는 베개가 되듯이. 보이지 않는 희디흰 베개 위에 매일 밤, 죽은 이의 머리를 올려보듯이. 외국에 나와서 제일 그리워하는 고국의 것이 무엇인가, 외국의 독자가 물었을 때. 내 베개! 라고 내가 대답하듯이. 이 희디흰 평면. 중환자실처럼 흰 천창. 거기에 몇 점 뿌려진 핏자국. 거기서라도 너와 마주보게 해다오. 천장에라도 눕혀다오.
나는 만화의 한 칸에 2차원적으로 멍하니 앉아 있어 본다. 기다리는 자세일까? 네모를 그리고 칸칸마다 번쩍 번쩍 사람을 집어넣고. 머리 위엔 쿠콰콰아앙 비명을 올리고. 땅속에도 쿠콰콰아앙 목이 쉬고 현기증이 폭발할 때까지. 전동차가 내 슬픔을 뭉개며 달리게 하라! 혹은 열차를 강 위에 올려놓고 터지게 하라!
이 만화의 계절에서. 이 만화의 의자에서.
어릿광대춤꾼고아어린복서들이.
내가 눈을 뜨고 본 것은 무엇인가. 왜 이리 페이지는 얇은가. 왜 이리 빨리 넘어가는가. 누가 이 만화의 정원을 가꾸는가. 절대로 녹지 않는 흰 눈으로 가득 찬 이 겨울 왕국에서. 잠깐 정지. 지하철에는 중간고사를 끝내고 만화의 세계로 돌아온 학생들이 실려 간다. 나른한 수족관에 가득히 잠긴 듯 가는 줄도 모르고 간다. 땅이라든가. 하늘이라든가. 뭣이라든가. 있거나 없거나 다 상관없다. 저 보이지 않는 기관사만 정면을 보고 가면 된다. 우리는 그렇게 간다.
칸칸이 나누어진 만화에서 우주선이 발진한 다음. 몇 광년이 지나고. 나는 이 만화에서 퇴직할 거다. 칸칸이 나누어진 방에서는 누구나 영안실의 사진처럼 다 검은 테두리에 갇혀. 즉즉즉 대뇌피질에 갇혀.
우리를 적시는 빗방울들도 검은 테두리에 갇혀.
최대한 낯설게 하기. 최대한 거리두기. 지하철의 학생들이 저마다 납작하게 검은 테두리에 갇혀 있다. 절대로 이 나라엔 다시 오지 마라.
강물 위에 오른 만화가 한 칸 한 칸 철교를 지나간다. 이가 부러진 물음표들이 쿠콰콰아앙. 천장에 매달려 흔들흔들 떠갈 때 비가 내리니 만화가 우는 것 같다 만화가 비에 젖는 것 같다. 나는 이 네모를 나가는 법을 모른다. 이 만화용 신발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계간 《청색종이》 2022년 겨울호-----------------------
김혜순 /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 『여성, 시하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