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저주하고 자신의 삶이 미약하니 어서 거두어 가시기를 소원할 때, 이 말을 들은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말을 책망합니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다는 것은 하나님께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모든 잘못을 욥에게 돌립니다. 그리고 그 관점도 역시 인과응보의 원리입니다. 빌닷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오로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죄인을 벌하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시는 흑백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틀림 없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에게 주어지는 충고도 다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고 청결하고 정직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너무 처참하지만 결국 창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7).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선조들의 지혜와 전통입니다(8-10). 여기서 선조들의 지혜는 일반적인 원리와 이치를 포함하고 또 신앙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서 터득한 지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지혜 자체는 소중한 것이고 일반적으로 옳습니다. ‘왕골’은 파피루스인데 질퍽한 진흙에서 자랍니다. 갈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땅이 마르면 금방 파피루스와 갈대는 말라 죽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누구나 알고 있는 지식이자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도 다 이와 같다고 빌닷은 충고합니다. 욥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욥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잊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을 붙든다면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다시 회복이 될 것이라고 충고 합니다(11-22).
빌닷의 이런 주장은 일반적으로는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빌닷은 잘못은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틀에 가두어 놓고, 삶의 일반적인 원칙과 지혜에 가두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의 상황을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평가하는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일반적인 원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조상들의 지혜, 오늘날로 따지면 경험과 학문적인 연구들이 항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우리는 십자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잘못이 없으신 예수님은 죽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욥의 고난도 인과응보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들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하고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때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빌닷의 잘못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과 일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단번에 빌닷의 원리에 욥이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욥은 악한 일로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하나님께서 꼭 벌주시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무 일이 없다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또 우리와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설명이 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원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절대화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살피며 어려운 일당할 때 하나님께 호소하고, 즐거울 때 감사하고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