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옥
일제강점기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부비항원, 대한애국부인회 사교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비행사.
가명 임국영(林國英). 권기옥(權基玉)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애국부인회 사교부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다.
활동사항
1. 학창시절과 3·1운동
권기옥은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호적대장에서는 1903년 1월 11일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1913년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이 해에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다.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권기옥은 교사 박현숙과 정일성의 영향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3·1운동을 준비하였고, 직접 거리에 나가 만세 시위를 하다 유치장에 구류되기도 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공채를 팔아 송금하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 9월 미국 국회의원 동양시찰단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대대적인 시위 행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폭탄을 던질 목적으로 독립단원들을 국내에 잠입시켰다. 권기옥은 숭현소학교 석탄창고를 은신처로 제공하여 독립단원들이 이곳에서 폭탄을 제조, 그 해 8월 3일 거사에 사용하게 하였다.
2. 중국 망명과 비행학교 졸업
권기옥은 1920년 동료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1921년 중국어와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서양선교사가 경영하는 항주의 홍도여학교 중학과에 입학해 1923년 6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로 돌아와서 인성학교 교사로 5개월간 재직하였다. 권기옥은 이 기간 동안 비행사가 되기위하여 영어를 습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비행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학창시절인 1917년 미국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1923년 12월 권기옥은 한국인 청년 3명과 함께 운남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육군 항공대 창설과 비행사 양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에 권기옥은 임정 요인인 이시영의 추천서와 중국인 혁명가 방성도(方聲濤), 운남성장 겸 독군 탕자오[唐繼堯]의 추천서를 받아 항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25년 2월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비행탑승 적성검사에 합격해 비행사가 되니,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다.
3. 결혼과 비행사 활동
비행사가 되어 1925년 5월 상하이로 돌아왔지만, 임정의 재정 상황이 열악하여 항공대 창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권기옥은 계속적인 비행 연습을 위해 중국 비행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군벌 간의 경쟁으로 피난을 가거나 군이 해산되면서 한군데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장가구(張家口)·내몽골·베이징[北京] 등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1926년 초 장가구에서 이상정(李相定)과 혼인하였다.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10월 내몽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1927년 전 운남항공학교 교장 유패천(劉沛泉)의 소개로 상하이로 가서 장제스[張介石]의 국민혁명군 항공사령부 소속 비행사로 합류하였다. 난징[南京]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는 난징으로 이동해 국민정부 항공서(1935년 이후 항공위원회로 개칭) 1대 소속 부비항원(副飛航員)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중외일보』(1927.8.28)에 따르면, 권기옥은 다른 재중 조선인 비행가들과 함께 “중국혁명전선의 한국인 비행가”로 불렸다. 권기옥의 비행시간은 총 7000시간이었다.
남경에 머무르면서 권기옥과 이상정은 김원봉을 비롯하여 의열단과 관련을 맺었고, 조선민족혁명당원들과 교류하였다. 일제 첩보 자료(『사상휘보』 4, 1935.9)에 따르면 권기옥은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비행사이자 의열단 여자부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6년 하반기 권기옥과 이상정은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체포·수감되었고, 8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이리하여 권기옥의 13년 비행 경력은 끝이 났다.
4. 임시정부 및 해방 뒤 활동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1937년 11월 이상정과 함께 난징을 떠나 1938년 3월 충칭[重京]에 도착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국민정부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며, 라디오 방송(일본어)을 듣고 내용을 기록하여 군에 제출하는 정보 수집 업무도 수행하였다. 1943년에는 김순애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고,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던 최용덕 등과 함께 중국 공군의 한국인 비행사를 활용하여 광복군 비행대 편성 및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
해방 후 1949년에 귀국하였다. 남편 이상정은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으로 먼저 귀국하였는데, 11월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권기옥은 1950∼1955년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정계에도 입문하였으나, 1965년 신익희의 사망과 함께 더 이상 정치를 꿈꾸지 않았다. 1966∼1977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 명예회원 및 재향군인회부인회 고문을 역임하였다.
1988년 4월 19일 87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988년 4월 19일 87세로 별세하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3년 국가보훈처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