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David Oistrakh violin
Eugene Ormandy conductor
Philadelphia Orchestra
1878년 봄, 차이코프스키는 결혼생활에서 온 우울증(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밀류코바라는 여성과 마지못해 결혼했지만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 치료차 스위스 제네바 호수 연안의 클라렌스 리조트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 그곳을 그의 제자인 요시프 코테크(Yosif Kotek)가 찾아왔다. 베를린에서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악보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즐겨 연주했다. 그러던 중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으로 자신의 평생 후원자가 되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때의 사정을 적어 보냈다.
"들리브나 비제의 작품처럼 랄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 안에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하는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 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작곡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1악장은 완성되었고, 내일부터는 2악장을 시작할 겁니다. 이 협주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작품에 끌렸습니다. 방문객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어서 이런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평생 후원자가 되어준 폰 메크 부인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연주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곡의 바이올린 독주 부분은 코테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작곡은 매우 빨리 이루어져 한 달 안에 곡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2악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결국 처음 작곡했던 2악장을 버리고 새로운 안단테 악장을 썼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그 해 10월에, 오케스트라 파트 악보가 이듬해 8월에 출판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코테크가 초연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연주 경력이 많지 않아 명성이 없었던 코테크는 이 작품의 연주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차이코프스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두려워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에게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아우어는 자서전에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에서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을 맡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코프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손을 보아야만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내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년여를 기다리다 지친 차이코프스키는 넌더리를 냈다. "우리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우어는 나의 협주곡을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비르투오소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애꿎은 나의 협주곡만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치 영원히 잊혀진 것 같았다."
그러다 마침내 구원자가 찾아왔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Adolph Brodsky)가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의 지휘로 초연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벌써 2년 전 일이었죠. (...) 러시아에 돌아와서 몇 달째 하루 종일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했습니다. 거의 미친 듯이 매달렸는데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오래 연습했는데도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테크닉이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작품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빈에서 초연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된 거죠."
그러나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음악계를 주름잡던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음악이 이토록 심한 악취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증명했다"고 혹평했다. 또 다른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야유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허무주의" "괴이한 음악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둥둥.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절망 대신 몇 개월 후인 1882년 4월 런던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다시 협연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이어 8월 20일 모스크바 초연을 했고 여기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란 이름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인식한 차이코프스키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첫댓글 항상 좋은 음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