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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심제복(注心臍腹)
묵묵히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에 집중시켜라. 그러면 정신이 집으로 돌아오고, 뜬 기운이 물러나 고분고분해진다.
注 : 부을 주(氵/5)
心 : 마음 심(心/0)
臍 : 배꼽 제(月/14)
腹 : 배 복(月/9)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뜬생각이 늘 문제다. 홍대용(洪大容)이 연행 길에서 만난 중국 선비 조욱종(趙煜宗)에게 공부하는 법을 친절히 일러준 '매헌에게 주는 글(與梅軒書)'에도 이에 대한 걱정을 담았다.
凡浮念不可一朝凈盡.
뜬 생각을 하루 아침에 말끔하게 없앨 수는 없다.
惟貴勿忘, 隨加澄治.
다만 잊지 않으면서, 여기에 더해 맑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或値心氣不平, 纏縛不去, 卽默坐闔眼, 注心臍腹.
간혹 평온치 않은 심기가 나를 옥죄어 떠나지 않거든, 바로 묵묵히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에 집중시켜라.
神明歸舍, 浮氣退聽.
그러면 정신이 집으로 돌아오고, 뜬 기운이 물러나 고분고분해진다.
글 속에 나오는 주심제복(注心臍腹), 즉 마음을 배꼽에 집중시키라는 말이 귀에 익어 찾아보니 주자가 제자 황자경(黃子耕)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한 말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病中不宜思慮.
병중에 생각에 잠기는 것은 좋지 않다.
凡百可且一切放下,
專以存心養氣爲務.
모든 일을 잠깐 내려놓고 오로지 마음을 보존하고 기운을 기르는 것에만 힘쓰는 것이 옳다.
但加趺靜坐, 目視鼻端, 注心臍腹之下.
다만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앉아서 눈은 코끝을 보고, 마음을 배꼽 아래에다 집중시키도록 해라.
久自溫煖, 卽漸見功效矣.
오래되어 저절로 따뜻해지면 점차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강준흠(姜浚欽)은 '밤중(夜)'이라는 시에서 '사방 벽엔 책뿐이요 아무 일도 없는데, 배꼽에 마음 모으니 기운이 따스하다(四壁圖書無一事, 注心臍腹氣氤氳)'고 썼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시선은 코끝을 응시한다. 일렁이는 마음을 달래 단전 쪽으로 내려보낸다. 그러면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일어나 몸을 덥혀주어 순환이 순조로워지고 잡념이 사라진다.
하지만 조선 후기 박장원(朴長遠)은 '차록(箚錄)'에서 주자의 이 편지를 인용한 뒤, '이제 이 방법에 따라 공부를 하려 하는데, 마음속의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의 실마리들을 몰아낼 수가 없으니, 소용이 없을까 걱정스럽다(今欲依此下工夫, 而心下千頭萬緖, 驅去不得, 恐無得力處也)'고 탄식했다.
코끝을 응시하며 마음을 내려놓는 방하착(放下着)의 시간!
매헌에게 주는 글(與梅軒書)
홍대용(洪大容)이 연행 길에서 만난 중국 선비 조욱종(趙煜宗)에게 공부하는 법을 친절히 일러준 글이다.
홍대용이 중국 선비 조욱종(趙煜宗)에게 독서의 방법을 적어 보낸 편지다. 매헌(梅軒)은 조욱종의 호다. 그는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었다.
그에게서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를 받고, 모두 16개 단락으로 나눠 자신이 생각하는 독서의 바른 자세와 공부의 방법을 일러주었다. 이제 차례로 살펴보겠다.
1. 초학들의 책 읽는 방법
讀書固不貴記誦, 惟初學舍記誦, 益無依據.
독서는 진실로 외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외우는 것을 버린다면 더더욱 기댈 바가 없게 된다.
每日將所受書, 先要精誦, 音讀無錯.
날마다 배운 책을 가지고 우선 정밀하게 외워 음과 구두에 착오가 없어야만 한다.
然後始立算, 先讀一遍, 次誦一遍, 次看一遍, 看已復讀. 摠得三四十遍而止.
그런 뒤에 비로소 서산(書算)을 세워 먼저 한 차례 읽는다. 그 다음은 한 차례 외우고, 다시 한 차례 본다. 보기를 마치고는 다시 읽는다. 이렇게 모두 3,40 차례 하고 그만둔다.
每畢受一卷或半卷, 幷前受亦先讀, 次誦次看, 各得三四遍而止.
매번 한권이나 반권을 떼고 나면 앞서 배운 것까지 아울러 또한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외우고, 그 다음에 보기를 각각 서너 차례 한 뒤에 그만둔다.
(解)
처음 기송(記誦), 즉 글을 외우는 일에 대해 설명했다. 무조건 암기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인 학습법은 아니다. 하지만 초학이라면 경우가 다르다. 우선은 외우는 것이 먼저고, 의미를 캐는 것은 그 다음이다.
외우는 데도 단계를 두었다. 글자의 독음과 구두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가장 먼저다. 잘못된 독음과 엉터리 구두로 읽으면 외우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다.
독음과 구두를 확실히 한 후에 서산(書算)을 일으켜 세운다. 서산을 세운다는 말은 읽을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처음은 '읽기(讀)'다. 또박또박 소리를 내서 찬찬히 읽는다. 다음은 '외우기(誦)'이다. 책을 보지 않고, 좀전에 읽은 글을 암송한다. 다음은 '보기(看)'이다. 소리를 내지 않고 눈으로 책을 읽는다. 방금 외운 것에 착오가 없는 지 확인하는 절차다.
읽기-외우기-보기를 한 셋트로 해서 이것이 끝나면 다시 같은 순서를 되풀이 한다. 이렇게 3-40번을 읽으란 말은 적어도 10차례 이상 이 세 과정을 되풀이하라는 뜻이다.
책을 보며 소리 내서 읽고, 눈을 감고 소리 내서 읽고, 책을 보며 눈으로만 읽으면, 서로 다른 방식에 따라 문장과 문맥이 의미로 와서 내게 맺힌다.
이렇게 외운 것을 누적시켜, 책 한 권이나 절반이 끝났을 때 통째로 서너번을 되풀이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전체 글의 구조가 일목요연하게 잡힌다.
덮어놓고 소리만 내서 읽는 것은 독서력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소리를 따라 의미가 허공으로 둥둥 떠내려 가고 만다.
2. 책 읽기의 자세
凡讀書,
책을 읽을 때,
不可高聲, 聲高氣乏.
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 소리를 높이면 기운이 빠진다.
不可遊目, 目遊心馳.
눈을 놀려서도 안 된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 마음이 부산스러워진다.
不可搖身, 身搖神散.
몸을 흔들어서도 안된다. 몸을 흔들면 정신이 흩어진다.
(解)
앞서 말한 세 단계 중 첫 번째인 읽기(讀書)의 바른 태도를 설명했다. 낭랑하게 읽겠다고 목청을 돋우면 금세 기운이 빠져 지친다. 오래 갈 수가 없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바쁘게 굴려도 못 쓴다. 더 빨리, 더 많이 읽으려는 욕심을 앞세우면 마음이 부산스러워져서 한 곳에 집중이 어렵다.
전후 좌우로 몸을 흔들며 읽는 버릇도 못 쓴다. 몸을 흔들 때마다 정신도 흔들려 흩어진다.
공부는 집중이다. 독서는 안으로 의미를 길어올리는 훈련이다. 큰 소리와 움직이는 눈동자, 흔들리는 몸뚱이로는 안 된다. 몸을 기둥처럼 곧추 세우고, 눈은 책 위로만 고정시켜라.
소리는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을 정도로만 절도 있게 낸다. 공연히 큰 소리로 몸을 흔들며 폼 잡지 말라. 폼을 잡을수록 보람이 적어진다. 내실을 기하고, 무게를 깃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3. 책 보는 마음가짐
凡看書, 默誦其文, 玩索其意, 參以註釋, 潛心溫繹.
책을 볼 때에는 마음속으로 그 문장을 외면서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여 찾되, 주석(註釋)을 참고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窮究)해야 한다.
若徒寓目而心不在, 亦無益也.
만일, 한갓 눈만 책에 붙이고 마음 을 두지 않으면 또한 이득이 없다.
(解)
세 번 째는 책 보기(看書)다. 눈으로만 읽을 뿐 입을 다문다. 소리는 속으로만 낸다. 그래야 비로소 의미가 맺힌다. 눈길이 행간을 맴도는 동안 의미의 통로가 스르르 빗장을 푼다.
본문으로 이해가 안 되면 그 아래 달린 주석을 훑는다. 마음을 깊이 담궈 찬찬히 따져본다. 얽힌 실타래를 풀듯 조심조심 실마리를 찾는다.
그냥 눈으로만 훑는 것은 간서가 아니다. 거기에 마음이 실려야 한다. 마음이 실리지 않는 간서는 눈이 활자 위를 훑고 지나간데 지나지 않는다.
4. 세 단계 독서의 보람
右三條, 分言雖殊, 要專心體究則一也.
위의 독서, 송서, 간서의 세 조목은 나눠 말하면 다르지만, 마음을 오로지 하여 체득해서 얻어야 하는 점은 꼭 같다.
須斂身正坐, 目定視, 耳收聽, 手足不妄動, 聚合精神, 灌注于書.
몸을 거두어 똑바로 앉아, 눈은 똑바로 보고, 귀는 다른 소리를 거둔다. 손과 발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신을 한데 모아 책에도 쏟아붓는다.
循此不已, 意味日新, 自有無窮妙蘊.
이렇게 하기를 계속하면 의미가 나날이 새롭고, 절로 무궁한 온축이 있게 된다.
(解)
소리 내서 읽고, 안 보고 외우며,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삼단계 독서법은 다르면서 같고, 같고도 다르다. 마음을 오로지 쏟아 몸으로 궁구해야 보람이 있다.
오로지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먼저 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몸가짐을 바로 해서 똑바로 앉는다. 시선을 고정한다. 귀를 닫는다. 손발을 경박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야 비로소 정신이 차분해진다. 책에 몰입할 수 있다. 이 상태를 유지할 때 책 속에 담긴 의미가 새록새록 내 것이 된다.
날마다 하는 공부가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이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열심히 읽어도 손에 쥔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공부가 쌓이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5. 뜬 생각과 의문
凡初學, 不能會疑, 人之通患.
처음 배우는 사람이 의문을 깨칠 수가 없는 것은 일반적인 병통이다.
然原其病根, 馳逐浮念, 志不專於書也.
하지만 병의 뿌리를 따져보면 뜬 생각을 쫓아 내달리느라 뜻이 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故不去浮念, 强欲會疑, 迂滯淺率, 眞疑不會.
때문에 뜬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서 억지로 의문을 깨치려 들면, 에돌고 막히고 얕고 가볍게 되어, 참 의문을 깨치지 못한다.
是故欲會疑, 先去浮念.
이 때문에 의문을 깨치려면 먼저 뜬 생각을 없애야만 한다.
然浮念亦不可强排. 强排則卽此轉添一念, 適增攪繞.
하지만 뜬 생각은 또한 억지로 밀쳐낼 수가 없다. 억지로 밀쳐내려 들면 이것이 외려 한가지 생각을 덧보태게 해서 어지러히 뒤엉킴을 더하게 만든다.
惟竦直肩背, 鼓發意趣.
다만 어깨와 등을 곧추 세워 뜻을 고무시켜 편다.
一字一句, 心口相應, 浮念倐散, 亦不自覺也.
한 글자 한 구절도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면 뜬 생각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금세 흩어지고 만다.
(解)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모를 것 투성이다. 개념도 안 들어오고, 맥락도 잡히지 않는다. 이게 뭘까? 어떻게 해야지? 왜 하는 거야? 의문에 사로잡혀 혼란에 빠진다. 공부를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따로 논다. 범인은 뜬 생각이다. 생각에도 종류가 참 많다.
념(念)은 머리 속에 콕 박혀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쓸데 없는 생각이 콕 박히면 잡념(雜念)이요, 떠오른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상념(想念)이다.
공부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뜬 생각(浮念)이다. 뿌리도 없이 제멋대로 떠나니며 사람 마음을 이랬다 저랬다 하게 만든다. 이래 가지고는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뜬 생각을 걷어내는 공부가 우선이다.
그런데 뜬 생각은 없애려 마음 먹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문제다. 어거지로 없애려 들면, 없애고 말겠다는 그 집착이 또 하나의 뜬 생각을 만든다.
나는 뜬 생각에 더 교란되고, 둘러싸여 어찌해 볼 수조차 없게 된다. 어찌 해야 할까? 역시 답은 바른 자세에서 출발한다.
등허리를 곧추 세워라. 척추는 정신이 지나가는 통로다. 통로가 열려야 길이 뚫린다. 그 길로 굳센 의지를 활보하게 한다. 한 글자 한 구절에 마음과 입을 온전하게 일치시킨다.
뜬 생각은 어느새 간 곳이 없다. 뜬 생각은 제풀에 꺾이고,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이지, 거기에 휘둘리면 더 커져서 괴물이 된다.
6. 뜬 생각을 다스리는 법
凡浮念不可一朝凈盡.
惟貴勿忘, 隨加澄治.
무릇 뜬생각은 하루 아침에 깨끗이 없앨 수가 없다. 다만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수시로 맑게 다스림을 보태야 한다.
或値心氣不平, 纏縛不去, 卽默坐闔眼, 注心臍腹. 神明歸舍, 浮氣退聽.
혹 심기가 평온하지 않거나 옭죄인 생각이 떠나지 않거든, 즉시 묵묵히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에 집중시키다. 그러면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뜬 기운이 물러난다.
果能此道, 時月之間, 用功漸熟, 責效漸長, 不惟文識日進, 心安氣和, 作事專精.
과연 이 도리를 능히 하여 나날이 다달이 공력을 쌓음이 점차 익숙해지고, 보람이 점점 커지면 글을 보는 식견이 날로 발전할 뿐 아니라 심기가 편안하고 화평해져서 일을 함에 몰두하여 정밀하게 된다.
上達之學, 亦不外是.
위로 도달하는 배움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解)
뜬 생각을 당장 어쩌겠다는 생각보다 뜬 생각을 없애야 한다는 당위를 늘 기억하는 것이 더 요긴하고 중요하다. 염두에 두는데 그치지 않고, 징치(澄治) 즉 해맑게 다스리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흙탕물을 오래 가라앉히면 맑은 물이 된다. 처음엔 뿌옇게 흐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물도 오래 가라앉혀 맑게 하면 맑아진다.
뜬생각은 언제 어떻게 생길까? 본마음이 흔들려 헛생각에 마음을 빼앗길 때 생긴다. 이럴 때 해법은 묵좌(默坐)에 있다. 떠들며 돌아다니지 말고 한 자리에 묵직하게 앉아 입을 다무는 것이 중요하다.
합안(闔眼), 즉 두 눈도 감아라. 더 이상 입력하지 말고, 이미 입력된 것을 걷어내야 한다. 단전으로 마음을 끌어내려야 한다. 뱅글뱅글 머리 속을 바삐 돌던 생각이 겨우 제 자리를 찾아간다. 뜬기운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조금씩 차차로 익혀 내 것으로 만들면 식견이 늘고, 마음이 차분해지며, 일에 집중력이 몰라보게 향상된다.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공부는 모름지기 뜬생각을 처리하는 훈련에서 출발한다.
7. 의문의 중요성
義理無窮, 切不可妄自滿足.
의리(義理)는 다함이 없으니, 결코 망녕되이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凡文字粗通者, 必無疑.
非無疑也, 究索之不到也.
글을 대충 통한 사람은 반드시 의문이 없다. 이는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궁구하여 탐색한 것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疑生於無疑, 味生於無味, 然後可謂能讀書矣.
의문이 없던 데서 의문이 생기고, 아무 맛 없는 데서 맛이 생겨난 뒤라야 능히 독서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解)
공부에 끝은 없다. 못난 사람은 조금 이루고 크게 만족한다. 하나를 익히면 공부가 끝난 줄 안다. 도랑을 벗어나야 강물과 만나고, 강물은 흘러 큰 바다로 든다. 우물 개구리의 소견으로 바다 고래의 배포를 어찌 짐작이나 할까?
공부의 적은 자만과 자족이다. 대충 어싯비싯 알면 의문도 없다. 다 쉬워 모를 게 없다. 이 정도 쯤이야 싶다. 막상 따져보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당황스럽다. 의문도 뭘 알아야 생긴다. 의문이 돋아나면 공부가 자랐다는 의미다.
공부가 더 커지면 온통 모두 모를 것 투성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모를 것 투성이라야 한다. 처음엔 당연하던 것이 왜 그럴까로 바뀌어야 한다.
무미건조하던 글이 가슴에 콕콕 맺혀 와야 한다. 절절하고 아프다. 그땐 왜 몰랐을까 싶다. 안타깝고 부끄럽다. 마음 속에서 이런 작용이 활발해지면 내 공부가 비로소 궤도를 잡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도 좋다.
8. 의문을 깨치려면
凡讀書, 切不可徑要會疑.
只平心專志, 讀來讀去.
무릇 독서는 절대로 서둘러 의문을 깨치려 들면 안 된다. 단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오로지 해서 읽고 또 읽는다.
不患無疑, 有疑則反覆參究.
의문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의문이 생기면 되풀이해서 살피고 탐구한다.
不必專靠文字, 或驗之應事之際, 或求之游泳之中.
반드시 문자에만 집착할 일도 아니다. 혹 일에 응하는 가운데 이를 징험해 보고, 혹 잠겨 노니는 중에 구해본다.
凡行步坐臥, 隨時究索.
빨리 가거나 걸어가거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수시로 살피고 탐색한다.
如是不已, 鮮有不通. 設有不通, 先此究索而後問於人, 乃可以言下領悟.
쉬지 않고 이렇게 하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설령 통하지 않더라도, 이같은 탐색을 먼저한 뒤에 남에게 묻는다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가 있다.
(解)
의심이 들고 의문이 생기면 석연하게 깨쳐야 시원스럽게 된다. 흐린 구름이 걷힐 때 그 너머 푸른 하늘이 환히 드러난다. 의심과 의문은 걷어내겠다는 의지만으로는 걷히지 않는다.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의문이 없는 것은 그냥 넘어간다. 걸리는 데가 있으면 해결하고 넘어간다. 이때 언어의 그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단순하게 실제 생활 속에 적용해 보거나, 딴 일 하면서 가늠해 보기도 한다. 일거수 일투족마다 살펴 헤아리다 보면 의문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없다.
끝내 몰라도 괜찮다. 이런 모색의 시간이 누적되어 있으면, 누가 곁에서 무심히 던지는 한 마디로도 마침내 통쾌하게 뚫린다. 내가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문 가능한 일이다.
9. 책 읽기의 못된 버릇
凡讀書, 虛張聲氣, 錯亂音讀, 强拈字句, 信口發難,
책을 읽을 때 공연히 소리의 기세를 펴거나, 글자를 잘못 틀리게 읽는 것, 어거지로 자구를 가져다 붙이거나, 입에서 나오는대로 논난을 펼치는 것,
答語未了, 掉過不顧, 一問一答, 不復致思, 此無意於求益也, 不足與爲學也.
대답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나쳐버려 돌아보지 않거나, 한번 묻고 한번 대답하고는 다시는 생각하지 않는 것 등은 더 나아짐을 구하려는데 생각이 없는 것이니, 함께 배우기에 부족하다.
(解)
책은 차분하고 진중하게 읽어야지 경망하면 못 쓴다. 소리를 크게 내서 폼만 잡으면 의미는 다 숨고 기운만 빠진다. 또박또박 안 읽고 건성건성 읽으면 안 읽으니만 못하다.
연관도 없는 구절을 끌어다가 견강부회 하는 버릇이나, 내용도 모르면서 되는대로 질문하고 떠들어대는 습관은 참으로 고약하다. 일껏 묻고 대답에는 귀 기울이 않고, 묻고 대답한 후 곱씹어 음미하지 않고 그것으로 지나쳐 버리는 것도 향상을 막는 적이다.
이런 공부는 발전이 없다. 나아지지 않는다. 헛 공부다. 곁에 두면 안 된다. 기운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고, 따져 음미하며, 곱씹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 보람이 찬연해진다.
10. 옛것을 내게 비춰보라
凡看聖賢言語, 參之古人, 考其已然之跡, 反之吾身, 求其通變之宜.
성현의 말씀을 볼 때 옛 사람을 참고 삼아 이미 그러한 자취를 살피고, 내 자신에게 이를 돌이켜서 통변(通變)의 마땅함을 구해야만 한다.
歆動惻怛, 如針箚身.
받아들여 감동하고 슬퍼하고 두려워 하기를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는 것처럼 한다.
古人讀書, 盖有此本領, 不如是, 皆僞學也.
옛 사람의 독서는 대개 이같은 바탕이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거짓 학문이다.
(解)
옛 성현의 말씀을 읽더라도 덮어놓고 읽으면 보람이 적다. 옛 사람의 행실에 비춰 글의 맥락을 징험해 본다. 틀림이 없고 어김이 없다. 이번엔 내 차례다. 나는 어떤가? 지금도 그런가?
옛날과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으니, 그대로는 안 된다. 눈금을 고치고 잣대를 바꿔야 한다. 이것이 통변(通變)이다. 세월이 바뀌면 환경이 변한다. 그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하지만 바뀐 것은 거죽이고, 알맹이는 똑 같다. 꽉 막혀 안 통하던 것이 바꾸면 통한다. 딴 세상 말 같던 얘기가 나 한테 직접 대놓고 하는 따끔한 가르침이 된다.
한마디 한마디가 내 폐부를 찌르는 바늘 같아야 산 독서다. 글 따로 나 따로는 읽으나 마나다. 헛 공부요, 가짜 독서다.
11. 이의역지(以意逆志) 독서법
余嘗以孟子以意逆志四字, 爲讀書符訣.
내가 일찍이 맹자가 말한 '내 뜻으로 지은이의 뜻을 거슬러 구한다'는 이의역지(以意逆志) 네 글자를 독서의 비결로 삼았다.
古人作書, 不惟義理事功, 雖篇法起結文辭之末技, 莫不各有其志.
옛 사람이 지은 글은 의리(義理)나 사공(事功) 뿐 아니라 편법(篇法)과 기승전결 같은 문사의 말단 기교조차도 각각 뜻을 두지 않음이 없었다.
今以吾之意, 逆古人之志, 融合無間, 相說以解, 是古人之精神見識, 透接我心.
이제 나의 뜻을 가지고 옛 사람의 뜻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로 합쳐져 아무 간격이 없고 서로 기뻐하여 이해하면, 이는 옛 사람의 정신과 식견이 내 마음에 스며 하나가 된 것이다.
譬如乩神降附靈巫, 分外超悟.
不知自何而來, 能如是.
비유하자면 귀신이 무당에게 내려와 딱 붙으면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와서 능히 이처럼 하게 되는 줄은 모르는 것과 같다.
不待依㨾章句蹈襲陳跡, 而酬酢萬變, 左右逢原, 我亦古人而已矣.
문장 구절을 본뜨고 해묵은 자취를 흉내내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주고받음이 만 가지로 변화하고, 바로 곁에서 근원과 만나게 되어, 내가 또한 옛사람일 뿐이다.
如是讀書, 然後可以奪天巧.
이처럼 책을 읽은 뒤라야 하늘의 교묘함을 빼앗을 수가 있다.
(解)
의(意)는 '내 뜻', 지(志)는 객관적인 남의 뜻이다. 이의역지(以意逆志)는 읽는 주체가 책에서 글쓴이의 뜻을 마중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책 속에는 글쓴이의 생각이 담겨있다. 그것을 읽고 생각하는 것은 나다. 나와 글쓴이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의 큰 단절이 놓여 있다. 아전인수격으로 내멋대로 생각하면 자칫 엉뚱한 샛길로 빠져 길 잃고 헤맨다.
나와 너, 지금과 옛날 사이에 소통의 경로를 뚫어야 한다. 그는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이 말 속에는 어떤 감춰진 맥락이 있나? 궁극적으로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하나하나 눈금을 맞추고 눈높이를 조정하면 한 순간에 핀트가 딱 맞아 흐릿하던 사물에 초점이 딱 잡힌다. 기쁘고 좋다.
옛 사람이 내 안으로 들어와 그와 내가 하나가 된 것이다. 푸닥거리 하던 무당이 접신의 경지에 들면 날이 시퍼런 작두 위를 펄펄 뛰면서 죽은 사람 목소리를 낸다.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책읽기는 일종의 접신의 경지다.
말투나 흉내 내고, 시늉이나 하자고 들면 너 따로 나 따로의 외곬으로 빠진다. 너와 내가 만나고 지금과 옛날이 하나가 되어야 독서의 위력은 비로소 막강해진다.
12. 천하의 쓸모없는 재주
古人作書, 非敎人飭文藻以取功名, 資記覽以干名譽.
고인이 책을 지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장의 꾸밈에 힘을 쏟아 공명을 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고 살핀 것을 밑천 삼아 명예를 구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然要飾文藻而資記覽者, 亦不可以躁淺涉獵而得之.
하지만 문장의 꾸밈에 힘을 쏟고 기억하여 살핀 것을 밑천으로 삼는 것 또한 조급하고 얄팍하게 섭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今終日誦讀, 目不離行墨, 自以爲如是足矣.
이제 온종일 소리 내서 읽어, 눈이 책의 행간에서 떠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
然意慮飛越, 口到而心不到, 視作者本志, 不啻隔十重鐵關.
하지만 뜻과 생각이 날리고, 입으로만 읽을 뿐 마음이 이르지 않고 보니, 작자의 본래 뜻을 살피는 것은 열 겹의 무쇠 관문에 가로막힌 격이다.
豈不益遠於道乎? 此天下之棄才也.
어찌 도에서 더욱 멀어지지 않겠는가? 이는 천하의 쓸모없는 재주다.
(解)
옛 사람의 저술은 공명을 얻고 명예를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설령 이것을 구하려고 글을 쓴대도 대충 해서는 그나마 얻을 수가 없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종일 책을 들고 앉아 소리내서 읽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뜻이 전일하게 집중 되어야지, 입 따로 마음 따로 놀면 안 된다. 입과 마음이 따로 놀면 읽으나 마나한 독서요, 하나 마나한 공부다. 작자의 본뜻과 못 만난다면 철옹성 앞에 선 오합지졸 격이다.
하루 종일 책 읽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덮어놓고 공부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하고 알차게 하고 나름대로 해야 한다. 입으로만 하고 눈으로만 하고 건성으로 하면 끝내 거둘 보람이 없다.
13. 무한히 즐거운 일
初學讀書, 孰不苦其難也.
처음 배움을 시작한 사람은 책을 읽을 때 어려워 괴롭지 않은 사람이 없다.
然任其苦難, 聊占便宜, 以圖苟安, 是終於棄才而已.
하지만 어려워 괴롭다고 내버려 둔 채 그저 손쉬운 것만 차지해서 구차하게 편안하기만 도모한다면 이는 버린 재주로 마치는 것일 뿐이다.
若稍自堅忍, 不忘省檢, 旬日之間, 必有消息.
만약 조금만 스스로 굳게 참아, 살펴 점검할 것을 잊지 않는다면 열흘 사이에 반드시 소식이 오게 되어 있다.
苦難漸去, 趣味日新.
어려워 괴롭던 것은 점차 사라지고 취미가 날로 새로워진다.
馴致乎手舞足蹈, 將有無限樂事.
손이 춤추고 발이 뛰는 것이 자연스레 이르러 장차 무한히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다.
(解)
독서는 처음 단계에서 무한히 지겹고 지루해서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렇다고 이것을 내팽개쳐서 예전 편히 놀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작은 성취조차 이루지 못한 채 인생을 탕진하고 만다.
참고 견뎌야 소식이 온다. 살피고 점검해야 진전이 생긴다. 어렵고 괴롭던 것에 차츰 재미가 난다. 재미가 나니 손발이 춤추고 마음이 즐겁다.
마음이 즐겁게 되면 더이상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게 된다. 공부는 이 단계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괴로워도 건너가라.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변화시키는 마술이 곧 공부요 독서다.
14. 먼 길을 가려면
且讀書, 將以明夫理而措諸事也.
독서란 장차 이치를 밝혀서 일에다 펼치려는 것이다.
苟能讀之精, 講之熟, 見之的, 得之眞, 則彼書者, 乃無用之故紙也, 可以束之高閣矣.
진실로 정밀하게 읽고, 익숙하게 강하며, 적실하게 보고, 진실되게 얻는다면, 저 책이란 것은 아무 짝에 쓸데 없는 낡은 종이일 뿐이니, 이를 묶어 다락에 올려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惟精也熟也的也眞也, 雖聖人猶有所憾焉.
오직 정밀하고 익숙하며, 적실하고 참된 것은 비록 성인이라 해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다.
則讀書者, 其功固無涯岸, 而果學者之終身事業也.
그럴진대 독서란 것은 그 공부가 진실로 끝이 없어, 실로 배우는 자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사업이다.
雖然, 知行兩端, 固不可偏廢.
비록 그렇긴 해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두 가지는 진실로 한쪽에만 치우쳐 다른 하나를 폐할 수가 없다.
而本末輕重之分, 又大有等別.
하지만 본말과 경중의 차이로 또 크게 등급의 구별이 생긴다.
於此有差則不入於頓悟, 必歸於訓詁, 可不懼哉.
이점에서 문제가 생기면 돈오(頓悟)로 들어가지 않으면 반드시 훈고로 귀착되고 마니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今吾輩之讀書, 鹵莽涉獵, 忽斷忽續.
지금 우리의 독서란 대충대충 섭렵하여 읽다 말다 하는 것이다.
旣未精熟, 何論的眞.
이미 정밀하지도 익숙치도 않은데 어찌 적실하고 진실됨을 논하겠는가?
其讀書之功旣如是, 而又讀盡一書, 便謂吾事已了, 乃猖狂妄行, 無所忌憚.
독서의 공부가 이런 지경인데도 또 한 책을 다 읽고는 내 일을 이미 마쳤다고 말하며, 함부로 날뛰고 망녕된 행동을 하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不知讀書盡後便去行之, 方大有事在.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문득 가서 이를 실행하는 큰 일이 남아 있음을 알지 못한다.
譬如有人欲作遠行.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려 하는 것에 비유해 보자.
書者一部路程記也, 行者秣馬脂車, 按記而驅且馳者也.
책이란 한 부의 노정기(路程記)이고, 행함이란 말에게 꼴을 먹이고, 수레에 기름칠 해서 노정기에 따라 몰고 또 달리는 것이다.
惟縶馬理輪, 弗驅弗馳, 切切焉惟記之是講, 所以行邁之謀, 終無潰成之日也.
다만 말에 고삐를 씌우고 수레를 손질해 두고는 몰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으면서, 오직 열심히 노정기만을 강론한다면, 먼 길을 가려는 계획은 끝내 무너져 이루어질 날이 없다.
(解)
독서의 보람은 이치를 밝히고 실제 일에 적용하는데서 성취된다. 그러려면 정밀하고 익숙해야 한다. 나아가 적실하고 진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에서 정밀과 익숙, 적실과 진실을 얻었다면 이미 그 책은 쓸모를 다한 것이니 다락에 올려 두어도 괜찮다.
하지만 이 네 가지는 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서하는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얻기 위해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문제는 지(知)와 행(行)의 두 갈래에 대한 구분이다. 이 분간을 잘못하면 대충 해놓고 깨달았다고 우기는 돈오(頓悟)의 길로 빠지거나, 앎만 있고 설천은 없는 훈고(訓詁)의 나락에 떨어진다.
대충 읽어서는 보람이 없다. 읽다 말다 해서는 소용이 없다. 독서 목록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먼 길을 가려면 계획이 필요하고, 노정기가 있어야 한다.
노정기가 없이는 딴 길로 빠져서 고생하기 쉽다. 그렇다고 길은 안 떠나면서 노정기만 연구하고 있는대서야 되겠는가?
노정기는 먼 길을 가는데 도움이 되자는 것이지 그것만 읽어서는 쓸데가 없다. 우리들의 독서가 출발은 않고서 길 떠날 준비만 하고 있는 것이서는 곤란하다.
15.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
嗚呼! 不磨不琢, 崑崗之玉, 猶之瓦礫矣.
아아! 곤륜산의 옥도 갈고 쪼지 않으면 기왓장 자갈돌과 한 가지다.
不鑿不斲, 豫章之材, 猶之樲棘矣, 不學不修.
예장(豫章)의 훌륭한 재목도 깎고 다듬지 않으면 가시나무와 다를 게 없다.
顔孟之姿, 不離於凡夫賤卒.
안연(顔淵)과 맹자의 자질로도 배워 닦지 않는다면 평범하고 천한 사내를 벗어나지 못한다.
是以玉不可以不琢, 材不可以不斲, 人不可以不學.
때문에 옥은 쪼지 않을 수 없고, 재목은 깎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람은 배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人而不知學, 可謂智乎.
사람으로 배움을 알지 못한다면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知而不能爲, 可謂義乎.
알면서 능히 행하지 못한다면 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爲而不能力, 可謂勇乎.
하긴 해도 힘껏 할 수 없다면 용기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知而爲之, 勇以將之, 斯其爲好學者歟.
알고서 행하고, 용기로 나아갈 때 이를 두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昔者孔氏之門, 其徒三千, 稱好學者獨有顔淵.
옛날 공자의 문하에 제자가 3천 명이었으되,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일컬어진 자는 홀로 안연 뿐이었다.
曾閔以下, 盖無與焉.
증자(曾子)와 민자(閔子) 이하로는 대개 축에 들지도 못했다.
若是乎好學者之難得也.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얻기 힘들기가 이와 같았다.
况乎去聖人之世數千有餘歲, 去聖人之居數千有餘里.
하물며 성인의 시대에서 수천 여년이나 떨어지고, 성인의 살던 곳에서 수천 여리라 떨어진 곳임에랴!
淳風日喪, 而薄俗日競.
도타운 풍속은 날로 사라지고, 경박한 풍속만 날로 심하다.
當此之時, 欲求見孔氏所謂好學之士, 不亦難乎?
이러한 때를 당해 공자께서 말씀하신 배우기를 좋아하는 선비를 만나 보려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雖然, 顔淵何可當也.
비록 그러나 안연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若絶意名利, 潛心簡編, 不避難險, 惟道之是求者, 亦可謂今之好學者矣.
만약 명리에 뜻을 끊고 책에만 마음을 쏟아, 어렵고 험한 길을 피하지 않고서 오로지 도만을 구하는 사람은 또한 오늘날의 배움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할만 하다.
(解)
옥은 쪼지 않으면 자갈돌과 한 가지다. 목재는 다듬어야 기둥으로 쓸 수 있다. 사람도 배워서 닦지 않으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배우고 열심히 행하고, 힘껏 나아간다.
공자의 3천 제자 중에 이를 제대로 실천한 사람은 안연 한 사람 뿐이다. 말은 간단해도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가 않다. 안연의 경지까지야 바라지도 않는다.
명리를 향한 집착을 딱 끊고 오로지 책에만 마음을 깊이 쏟아 어떤 어려움에도 굴함 없이 도만을 추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호학(好學)의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16. 독서에 임하는 자세
讀書必整襟肅容, 專心易氣.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옷 매무새를 정돈하고 낯빛을 엄숙하게 해야 한다.
毋生雜念, 毋主先入.
마음을 집중하되 기운은 편안하게 갖는다.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선입견을 주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搖身數者, 其志促, 轉睛亂者, 其心浮.
몸을 자주 흔드는 것은 그 뜻이 급해서이고, 눈동자를 어지러이 굴리는 것은 그 마음이 들떠 있기 때문이다.
竦身定睛, 中心必式.
몸가짐을 바로하고 눈동자를 고정시키면 중심에 법도가 갖춰진다.
存心致知, 一擧兩得.
마음을 보존하고 앎에 도달하게 되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先觀其大義, 而後推其曲.
먼저 대강의 뜻을 살핀 뒤에 곡절을 미루어 헤아린다.
必措諸事爲, 而毋繳繞於章句.
반드시 일을 하는데다 중점을 두어 문장의 구문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才見一句, 便要知之,
才知一句, 便要行之.
한 구절을 보고나면 문득 이를 알아야 하고, 한 구절을 알고 나면 이를 행해야 한다.
一知一行, 足目兩進.
한 가지를 알아 한 가지를 행하면 발과 눈이 둘다 나아가게 된다.
經史之外, 異端雜書, 亦必捨其所短, 而取其所長.
경전이나 역사책 외에 이단의 잡서는 또한 반드시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해야 한다.
如淫媟不經之說, 害工喪志, 切勿寓目.
음란하고 불경스런 주장은 공부를 해치고 뜻을 잃게 만드니 절대 읽어서는 안 된다.
(解)
자세가 발라야 집중도가 높다. 등을 곧추 세우고 똑바로 앉되 긴장은 푸는 것이 좋다. 잡념을 걷어내고, 불필요한 선입견도 걷어내라.
방정맞게 몸을 자주 흔드는 것은 뜻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눈동자가 왔다갔다 하는 것은 마음이 들뜬 연유다. 중심이 딱 잡혀야 존심치지(存心致知)가 가능하다.
전체의 얼개를 파악한 후 부분을 살핀다. 문자에 얽매이는 대신 실제 적용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옳다. 읽어 안 후, 행동으로 옮겨봐야 마음 속에 간직된 것이 살아있는 지식으로 되살아난다.
그러자면 귀감이 될 고전만 읽기에도 바쁜데 음란하고 잡스런 책에 정신을 파는 것은 공부를 망치고 뜻을 잃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조선 후기의 실학자, 과학사상가,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홍지(弘之),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사간 용조(龍祚)의 손자이며, 목사(牧使) 역(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풍(淸風) 김씨 군수 방(枋)의 딸이고, 부인은 이홍중(李弘重)의 딸이다.
특히,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그의 활약은 이런 관직과 관련된 것이기보다는 1765년 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와 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억(檍)의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이 때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과학사상을 담은 '의산문답(醫山問答)' 역시 북경 여행을 배경으로 쓰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인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전설, 생명관, 우주무한론으로 전개되는 홍대용의 자연사상은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일관된 것으로, 이와 같은 상대주의는 그의 사회사상에 연장, 발전된다.
첫째,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쪽이 화(華)이고, 어느 쪽이 이(夷)일 수 없다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한다.
둘째,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과거의 인본적(人本的)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것으로 상대화하였다.
셋째, 그는 당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과학사상과 그에 바탕을 둔 사회사상 등은 상당한 독창성을 보이고 있지만, 서양 과학과 도교적인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서양 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썼으며, 여러 가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농수각(籠水閣)이라는 관측소에 보관하기까지 하였다.
홍대용의 사상 속에는 근대 서양 과학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 또 근대적 합리주의와 도교의 신비사상, 그리고 지구 중심적 세계관과 우주무한론 등이 때로는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섞여 있는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였다.
▶️ 注(부을 주/주를 달 주)는 ❶형성문자로 註(주)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主(주)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主(주)는 등불의 중심, 물건이 한군데 집중(集中)하는 것을 나타낸다. 注(주)는 물이 한군데로 흐르는 일, 또 물을 붓듯이 어려운 말을 쉽게 설명하는 일을 말하는데, 나중에 써놓다, 설명하다의 뜻에는 註(주)라고도 썼으나 지금은 그 뜻에도 注(주)를 쓴다. ❷형성문자로 注자는 '붓다'나 '(물을)대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注자는 水(물 수)자와 主(주인 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主자는 '주인'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무언가를 들이부어 채우는 것을 '주입(注入)하다'라고 한다. 注자는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집어넣음을 뜻하는 글자이다. 사전상으로는 注자를 '물댈 주'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물을 대다'라는 것은 무언가를 '채워 넣다'나 '주입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注(주)는 ①붓다(액체나 가루 따위를 다른 곳에 담다) ②물을 대다 ③뜻을 두다 ④흐르다 ⑤끼우다 ⑥모으다 ⑦비가 내리다 ⑧치다 ⑨주를 달다 ⑩적다, 기록하다 ⑪별의 이름 ⑫그릇 ⑬부리 ⑭주석(註釋) ⑮흐름 ⑯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을 주의해서 봄을 주목(注目), 부탁하여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맞추는 일 또는 그 조건을 주문(注文), 자세히 눈여겨 봄을 주시(注視), 몸에 약을 바늘로 찔러 넣음을 주사(注射), 자동차 등에 휘발유를 넣음을 주유(注油), 흘러 들어가게 쏟아서 넣음을 주입(注入), 힘을 기울임을 주력(注力), 사물을 기록하는 일을 주기(注記), 술 따위를 담아서 잔에 따르게 만든 주전자를 주자(注子), 외부 또는 외국에 주문함을 외주(外注), 기울여 쏟음으로 한 곳으로 주의나 힘을 기울여 모음을 경주(傾注), 물건을 주문함을 발주(發注), 주문을 받음을 수주(受注), 노름꾼이 남이 있는 돈을 다 걸고 승패를 단번에 작정함을 고주(孤注), 언어와 동작을 그대로 기록함을 기주(記注), 인물을 심사하여 적당한 벼슬 자리를 배정함을 전주(銓注), 조사하여 기록함 또는 그 문서를 감주(勘注), 물이 흘러 들어감을 관주(灌注), 비가 갑작스럽게 많이 쏟아짐을 폭주(暴注), 미리 뜻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일을 일컫는 말을 고의주의(故意注意), 노름꾼이 남은 돈을 한 번에 다 걸고 마지막 승패를 겨룬다는 뜻으로 전력을 기울여 어떤 일에 모험을 거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고주일척(孤注一擲) 등에 쓰인다.
▶️ 心(마음 심)은 ❶상형문자로 忄(심)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심장의 모양, 마음, 물건의 중심의, 뜻으로 옛날 사람은 심장이 몸의 한가운데 있고 사물을 생각하는 곳으로 알았다. 말로서도 心(심)은 身(신; 몸)이나 神(신; 정신)과 관계가 깊다. 부수로 쓸 때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로 쓰이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心자는 '마음'이나 '생각', '심장', '중앙'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心자는 사람이나 동물의 심장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心자를 보면 심장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심장은 신체의 중앙에 있으므로 心자는 '중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감정과 관련된 기능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心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마음이나 감정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心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위치에 따라 忄자나 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心(심)은 (1)종기(腫氣) 구멍이나 수술한 구멍에 집어넣는 약을 바른 종이나 가제 조각 (2)나무 줄기 한 복판에 있는 연한 부분 (3)무, 배추 따위의 뿌리 속에 박인 질긴 부분 (4)양복(洋服)의 어깨나 깃 따위를 빳빳하게 하려고 받쳐 놓는 헝겊(천) (5)초의 심지 (6)팥죽에 섞인 새알심 (7)촉심(燭心) (8)심성(心星) (9)연필 따위의 한복판에 들어 있는 빛깔을 내는 부분 (10)어떤 명사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마음, 뜻, 의지(意志) ②생각 ③염통, 심장(心臟) ④가슴 ⑤근본(根本), 본성(本性) ⑥가운데, 중앙(中央), 중심(中心) ⑦도(道)의 본원(本源) ⑧꽃술, 꽃수염 ⑨별자리의 이름 ⑩진수(眞修: 보살이 행하는 관법(觀法) 수행) ⑪고갱이, 알맹이 ⑫생각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건 물(物), 몸 신(身), 몸 체(體)이다. 용례로는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심리(心理), 마음에 품은 생각과 감정을 심정(心情), 마음의 상태를 심경(心境), 마음 속을 심중(心中),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어떤 일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심취(心醉), 마음에 관한 것을 심적(心的), 마음의 속을 심리(心裏), 가슴과 배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를 심성(心性), 마음의 본바탕을 심지(心地),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묵묵한 가운데 서로 마음이 통함을 이르는 말을 심심상인(心心相印),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먹었던 마음을 바꿈을 일컫는 말을 심기일전(心機一轉),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일컫는 말을 심열성복(心悅誠服), 마음이 너그러워서 몸에 살이 오름을 일컫는 말을 심광체반(心廣體胖),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심복지인(心腹之人), 높은 산속의 깊은 골짜기를 이르는 말을 심산계곡(心山溪谷), 심술꾸러기는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심술거복(心術去福), 마음이 번거롭고 뜻이 어지럽다는 뜻으로 의지가 뒤흔들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심번의란(心煩意亂),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심심풀이로 어떤 일을 함 또는 그 일을 일컫는 말을 심심소일(心心消日), 마음이 움직이면 신기가 피곤하니 마음이 불안하면 신기가 불편하다는 말을 심동신피(心動神疲), 심두 즉 마음을 멸각하면 불 또한 시원하다라는 뜻으로 잡념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불 속에서도 오히려 시원함을 느낀다는 말을 심두멸각(心頭滅却), 마음은 원숭이 같고 생각은 말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생각을 집중할 수 없다는 말을 심원의마(心猿意馬) 등에 쓰인다.
▶️ 臍(배꼽 제)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齊(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臍(제)는 ①배꼽(배의 중앙에 있는 탯줄의 자국) ②오이가 달린 꼭지(과실이 달린 줄기)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배꼽 밑을 제하(臍下), 배의 배꼽이 있는 부위를 제두(臍肚), 탯줄을 제대(臍帶), 탯줄로 태아와 태반을 연결하는 교질의 흰 육관을 제서(臍緖), 배꼽과 그 언저리가 염증으로 곪아서 생기는 갓난아이의 병을 제염(臍炎), 어린아이의 배꼽에 부스럼이 생기는 병을 제종(臍腫), 아이를 낳은 뒤에 탯줄을 끊음을 절제(截臍), 뜸을 뜨는 방법의 하나로 증제(蒸臍), 탯줄을 잘못 자르거나 자른 뒤에 바로 거두지 못하여 배꼽 언저리에 생기는 염증을 제대염(臍帶炎), 탯줄을 통하여 타아와 태반을 잇댄 핏줄을 제동맥(臍動脈), 신기腎氣로 말미암아 생기는 배꼽 아래가 아픈 병을 제축증(臍縮症), 종기부리의 한가운데가 움푹 들어가고 터지면 누르스름한 물이 흐르고 가장자리가 붓는 병을 어제정(魚臍疔),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이 그릇된 뒤에는 후회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비유한 말을 서제막급(噬臍莫及) 등에 쓰인다.
▶️ 腹(배 복)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复(복)은 아래 위가 같고 가운데가 불룩한 모양으로, 月(월)은 몸에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腹자는 오장육부 중 하나인 '배'를 뜻하는 글자이다. 腹자는 ⺼(육달 월)자와 复(돌아올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신체기관을 뜻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자가 의미요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复자는 성(城) 밖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돌아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腹자는 이렇게 '순환'의 의미가 있는 复자에 ⺼자를 결합한 것으로 사람의 '배'를 뜻하고 있다. 그래서 腹(복)은 ①배(오장육부의 하나) ②마음, 속마음 ③가운데, 중심 부분 ④앞, 전면(前面) ⑤품에 안다 ⑥껴안다 ⑦두텁다, 두껍다 ⑧받아들이다, 수용하다 ⑨아이를 배다, 임신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배 두(肚),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등 배(背), 가슴 흉(胸)이다. 용례로는 배를 앓는 병을 복통(腹痛),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계획을 복안(腹案), 배. 물건의 머리 부분과 꼬리 부분 사이에 있는 가운데 부분을 복부(腹部), 내장에서 새어 나오는 액체가 뱃속에 괴는 병을 복수(腹水), 배와 등이나 앞과 뒤를 복배(腹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깊은 속마음을 복심(腹心), 뱃속의 아이를 복아(腹兒), 가슴과 배로 썩 긴하여 없어서는 안될 사물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음식을 먹지 아니하여 고픈 배를 공복(空腹), 배가 잔뜩 부름을 만복(滿腹), 먹고살기 위하여 음식물을 섭취하는 입과 배를 구복(口腹), 수술을 하려고 배를 쨈을 개복(開腹), 배를 갈라 자살함을 할복(割腹), 한 어머니가 낳은 동기를 동복(同腹), 아주 우스워서 배를 안음을 포복(抱腹), 의식에 입는 옷을 의복(儀腹), 배가 남산만 하다는 말을 복고여산(腹高如山), 마음이 맞는 극진한 친구를 이르는 말을 복심지우(腹心之友), 배와 등에 난 털이라는 뜻으로 있으나 없으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복배지모(腹背之毛), 나라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이르는 말을 복리지면(腹裏地面), 앞뒤로 적을 만난다는 말을 복배수적(腹背受敵), 입으로는 달콤함을 말하나 뱃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친절하나 마음속은 음흉하다는 말을 구밀복검(口蜜腹劍),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 마음을 먹는다는 말을 면종복배(面從腹背), 배를 두드리고 흙덩이를 친다는 뜻으로 배불리 먹고 흙덩이를 치는 놀이를 한다 즉 매우 살기 좋은 시절을 이르는 말을 고복격양(鼓腹擊壤), 배를 안고 넘어진다는 뜻으로 몹시 우스워서 배를 안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웃음을 이르는 말을 포복절도(抱腹絶倒) 등에 쓰인다.